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3
아리조나주를 지나 유타주로 들어오니, 화창했던 날씨가 어느새 변하여 세찬 비바람이 부는데, 도로변에 바람 막는 가로수가 없어 차가 몹시 휘청거린다. 게다가 산세가 험하고 가파른 언덕길에 성가신 엔진 소리를 내며 맹렬히 추격해 오는 대형트럭들이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무섭게 앞질러 간다. 불안한 마음에 경치를 즐길 여유 없이 바쁜 차량들을 앞으로 보내며 조심조심 산길을 넘고 나서 조금 한가한 국도로 30마일을 달리고 나니, 붉은 산들이 찌푸린 하늘 아래 풀이 죽어 있긴 하지만 긴장이 좀 풀려서 그런지 꽤 근사해 보인다.
자이언 국립공원(Zion National Park) 입구에 있는 스프링데일(Springdale)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묵을 곳을 찾아보는데,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인 미국의 현충일(Memorial Day) 휴가부터 성수기라서 호텔도 만원이고 민박(대체로 호텔보다 더 비싸다)에도 빈 방이 없다. 운 좋게 빈 방이 하나 남은 깨끗한 호텔을 발견했지만 너무 비싸다. 다시 나와 빈 방 있다는 네온사인이 켜진 호텔에 들어가니 실수로 불을 안 껐단다. 실수한 대가로 빈 방 있는 다른 호텔이라도 알아봐 달라니까, 꼭 하나 있는데 방 값이 방금 나온 호텔의 두 배다. 황급히, 나왔던 호텔로 되돌아 가 보니 방이 벌써 나갔단다. 결국 다른 호텔에 두 배의 방 값을 내고 들어 갔는데, 아침밥도 안 준단다.
시간이 없어 호텔에 수속만 하고 짐도 풀지 않고 나오니 마침 날씨가 개여서 주변의 산정이 밝다. 하지만 공원 안에 들어갔을 때는 산 그림자에 가려서 어둡기만 하다. 공원 안내소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내판을 보니 계곡 안은 순환코스(Zion Canyon Scenic Drive)를 도는 셔틀버스를 타고 정해진 정류장에 내려서 경치를 관람한단다. 벌써 공원도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지체 없이 셔틀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자 운전사가 마이크(운전대가 아니라)를 잡고 운전하며 코스에 대해 안내하고, 정류장에 설 때마다 내려서 무엇을 볼 것인지, 또 몇 분 후에 다음 차가 오는지 자세히 가르쳐 준다. 너무 친절한 아저씨! 얼굴은 조지 클루니만 못해도 말 한마디에 정이 간다. 나도 이런 가이드 하고 싶은데... 어려울까? 모자라는 건 얼굴로 때우면 되지 뭐!
버스는 계속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점입가경이라, 점점 더 우람한 바위산들이 옷을 예쁘게 차려 입고 인사한다. 나 어때? 예뻐? 구름 걷힌 푸른 하늘 아래에서 산이 따뜻하게 치장을 하고 서 있으니 계곡 아래에서 높이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데 고개가 다 아프다. 절벽 아래도 아니고 분명 계곡인데 산이 마치 머리 위에 있는 것 같다.
순환코스의 끝까지 올라오니 셔틀 조종사가 계곡 안으로 들어가 협곡 사이를 흐르는 개울(The Narrows)을 꼭 가 보란다. 말씀을 안 듣고 앉아 있기가 미안해서 차에서 내려 계곡의 우람한 바위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산책로를 따라 계곡 안으로 들어가니 깎아지른 두 암벽 사이로 좁은 개울에 물이 세차게 흘러간다. 물 때문인지 춥기도 하고 들어갈수록 계곡이 좁아져서 얼마 안 가 되돌아 나왔다. 좀 더 갔으면 길이 없어서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데 바닥에 깔린 자갈이 아주 미끄럽단다. 준비 없이 기사 말만 듣고 계속 갔다가 코 깨질 뻔했다.
정류장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주변의 산들을 보니 거대한 바위산의 위엄이 시야를 압도한다. 수직으로 깎인 벼랑의 색깔이며 봉우리의 모양이며 바위산의 웅장함이 한마디로 숨을 막히게 한다. 이곳의 원주민이야 당연히 인디언이었지만, 이곳을 발견한 몰몬교인들이 이런 바위산에 아브라함, 모세 등 성경 속 인물들의 이름을 붙이고 계곡을 자이언(Zion: 성서의 시온산)이라고 부른 것이 잘 어울린다.
미국의 현충일 휴일에 관광객이 부쩍 늘어나, 평시의 두 배 이상 껑충 뛴 숙박비를 낸 호텔에 식당도 없어서, 피자 맛이 좋다는 꽤 먼 데 있는 식당을 찾아가 저녁을 먹고, 다음날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샌드위치 잘한다는 집까지 차를 타고 가서 아침을 먹었다. 넓은 땅을 가진 나라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었지만, 미국처럼 큰 나라에는 모든 시설이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멀다. 자동차 없이 살다가는 굶어 죽을 나라다.
아침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호텔 근처 풀밭에 조그만 장이 섰는데, 인근의 주민들이 농장에서 가꾼 농작물과 집에서 만든 잼, 채집한 꿀 등을 팔고 있었다. 거기에 한 할머니가 피칸넛(Pecan nut: 미국 호두)을 파시기에 1파운드(500g)를 샀더니, 공원 입구의 피칸 나무 있는 집에 혼자 사는데 먼 데서 아들이 와서 따 줬단다.
스프링데일을 떠나 그랜드캐년으로 가는 길은 자이언 국립공원을 통과한다. 다시 공원 입구에 이르니 휴일이라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전날에 본 우람한 바위산들이 흐린 날씨에 기가 죽어 있다.
계곡의 동편 길로 올라가 터널을 지나니 기대치 않게, 감색의 두리뭉실한 언덕이 온통 소나무 껍질처럼 갈라진 모양이며, 고산에 푸른 소나무가 손 잡고 강강술래 하는 폼이 흐린 날씨에도 아랑 곳 없이 예쁘기만 하다.
자이언 계곡 안에서 본 거봉들과는 달리 꼬부랑길을 돌 때마다 풍상에 시달려 주름이 깊게 파인 삼각산이며, 골골이 좀 먹은 듯한 골짜기, 바둑판처럼 가로세로 줄쳐진 바위산이 얼굴을 내민다.
이 바위산이 장관이라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데 오토바이 클럽이벌떼 처럼 붕붕거리며 달려온다. 관광객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몰려드니 성수기인 것이 분명한데, 이걸 모르고 호텔도 예약하지 않고 와서 그나마 잠을 자고 나간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자이언 국립공원의 동문을 빠져나가니, 옛날에 개척자들의 사랑을 받아 멸종("아무리 사랑해도 그렇지 씨가 마르도록 다 먹냐? 인간들아!" - 들소 어록)된 미국 들소(Bison)들이 목장에서 풀을 뜯는다. 뜻밖에 만난 원시적 풍경에 이끌려 차에서 내려 한참 바라보다가, 서둘러 낙타산을 정면에 두고 동방으로 차를 몰았다. 그랜드캐년 노스 림(Grand Canyon North Rim)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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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랜드캐년 사우스림(+우팥키공원과 화산, 메테오르 크레이터, 윈슬로)
11. 엘로우스톤 국립공원을 향하여(+그랜드테튼 국립공원)
13. 쏠트레이크씨티(+그레이트쏠트레이크, 빙감캐년마인)
14. 브라이스캐년(+코다크롬배이슨, 라스베가스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