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기 2
라스베가스 시내를 관통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20마일쯤 달리니 키 작고 메마른 풀들만 드문드문 나 있는 사막길이다. 네바다 사막의 군사기지와 인디언 보호구역 주변으로 길게 뻗은 이 길은 풍경이 단조롭고, 지나는 차량마저 드물어 한참을 달려도 마치 제자리걸음만 한 것 같다.
꼭 한 시간쯤 지루한 고속도로를 달린 후에 아마르고싸밸리에서 남으로 꺾어 데쓰밸리 분기점으로 가는데 중간에 캘리포니아주 경계선이 나온다. 이제 30분만 더 가면 데쓰밸리 국립공원(Death Valley National Park)이다.
데쓰밸리 국립공원 경계 안으로 들어오니 이따금씩 바람이 모래를 쓸어 아스팔트 위로 바쁘게 지나가는데 벌써 오후 2시가 넘었다. 공원안내소 표지판을 보고 잔돌이 흩어진 꼬부랑길을 돌아가니 쑥색의 구릉과 겨자색의 민둥산이 나오기 시작한다.
안내판에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라고 적혀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바람이 세게 부는 언덕 위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니, 마치 카레가루를 쏟아 놓은 듯이 연한 황색의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행안내서에 모든 국립공원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데, 공원 입구에 매표소가 없어서 돈 안 내는 좋은 길로 들어온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니, 작은 정원 옆의 공원안내소(Death Valley Visitor Center)에서 입장료를 받는다. 다행히 한 차에 탄 사람이 몇 명이든지 1년간 국립공원들을 자유로이 입장할 수 있는 패스(Annual Pass)가 자그마치 40달러다.
패스를 손에 넣으니 보이스카우트 같은 유니폼을 입은 레인저(Ranger)가 공원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는데, 안내소 안에는 데쓰밸리의 지형과 생태 그리고 거기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경제활동이 소개된 전시실도 있다.
데쓰밸리 국립공원은 면적이 5270평방 마일(13650제곱킬로미터, 남한의 1/7)로 알라스카를 제외한 미국의 모든 국립공원들 중에서 제일 넓다. '죽음의 계곡'이란 공원의 이름은 1848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된 이후, 포티나이너(49er)들이 데쓰밸리를 지름길로 생각하고, 이곳에 마차를 끌고 단체로 들어왔다가 죽을 고생을 한 후에 포기하고 되돌아가며 "Goodbye Death Valley"라고 고별인사를 한 것에서 유래한다 - 49er란 1849년경에 금광을 찾아 캘리포니아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을 칭함.
데쓰밸리는 이후에 은광이 발견되어 잠시 투기꾼들이 쇄도하고 중국인 노동자들까지 투입되는 등 광산개발이 붐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지금은 모두 폐광이 되었다. 공원안내소에서 가까운 곳에도 붕사(硼沙: Borax)를 제조했던 공장이 있는데, 폐허가 된 작은 집터와 광차의 녹슨 쇠바퀴가 남아서 노무자들이 사투하며 일했던 노동현장을 지키고 있다.
공원안내소 밖에 폐허로 남아 있는 붕사 공장을 보고 나서 다시 광활한 사막길을 달리는데 아스팔트 위에서 어지럽게 춤추는 모래 바람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차를 세우고 바람이 자면 다시 가려해도 세워 둔 차에 모래가 쌓이면 더 곤란할 것 같다. 경치는 이제 관심 없고 다만 숙소가 있는 스토브파이프웰스 마을(Stovepipe Wells Village)까지만 무사히 가는 게 목표다.
그런데 호텔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원래 방을 예약할 때부터 호텔 주소에 간단히 'Hwy 190 퍼니스크리크 북서로 23마일'이라고만 적혀있어서, 내비게이터에도 위치가 안 나온다. 그래서 지도를 보고 퍼니스크리크로 가는데 어딘지 짐작이 안 간다.
데쓰밸리 = 죽음의 계곡, 정말 여기에 초장부터 뼈를 묻으러 온 건 아닐까? 세상에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낀 고속도로를 달린 적은 있어도, 이렇게 휘날리는 모래 속에 도로면도 고르지 않은 길을 덜컹거리며 가자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오는 차라도 마주치면 위안이 되련만 어디 의지할 데 없으니 외롭기 짝이 없다.
겨우 모래 바람이 잠잠해지고 시야가 트이고 나서도 심기가 불안하여 가속페달을 열심히 밟으니, 사막의 한가운데 빈 동네가 나온다. 이렇게 외진 곳이 스토브파이프웰스 마을이야? 파는 물건이 고작 비스킷과 음료수 정도인 가게 하나뿐인 게 마을이냐고? 아무튼 여기에 예약해 둔 호텔이 있으니 따질 게 없다. 일 년 전에나 예약해야 겨우 방을 얻을 수 있는 대다수의 국립공원 로지(lodge: 국립공원 안의 숙박 시설)보다는 쉽게 예약할 수 있었고, 게다가 이제 저녁까지 먹을 수 있다니 무슨 불만인가?
여장을 풀고 바로 저녁을 먹고 나오니, 주위가 금세 어두워져 하늘에 은빛 총총 별이 빛난다. 그럼 이제는 별을 헤야 한다. '별 하나 나 하나'가 아니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서시(序詩)처럼...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계곡에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지 말고 차로 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따가운 모래 바람에 스치운다.
'서부 국립공원 헤매기' 첫날부터 기운이 쭉 빠져서, 그냥 하늘 한 번 더 쳐다보고 얼굴에 톡톡 모래를 쏘아대는 밤바람을 탓하며 사막의 빈 동네 적막한 방으로 돌아가 별난 꿈을 꾸었다. '별'의 '*' 꿈을 ***
아득한 수평선 멀리 뭉게구름 떠 가는 하늘 아래 모래 바람이 연상 먼지를 뿌리며 지나가, 드넓은 사막의 전경이 지우고 이내 또 그리는 변덕쟁이 화가의 풍경화 같다.
숙소를 떠나 다시 공원안내소 쪽으로 조금 돌아가니 저만치 모래산이 보인다. 데쓰밸리에서는 유일한 이 사구는 바람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모래를 내려놓고 가서 생긴 모래 언덕인데, 풍경에 낙타 한 마리 없는 것이 좀 아쉽다.
아쉬운 마음이야 많지만 한 곳에 너무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없어서, 공장 폐허 옆의 겨자골(Mustard Canyon)을 지나, 옛날에 금 찾으러 다니던 사람들이 거닐던 거친 황금골(Golden Canyon)을 산책하고, 다시 남으로 달리는데, 불과 몇 분도 안 돼 하늘이 흐려지더니 바람 불고 비가 내린다.
바람에 자꾸 뒤집히는 우산을 받쳐 들고 언덕에 올라가 허리에 줄을 두른 산색을 구경하고 내려와, 화가의 길(Artist's Drive)을 따라 골짜기를 돌아가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화가의 팔레트(Artist's Palette)라는 색깔 있는 구릉들이 햇볕에 환한 모습을 드러낸다. 잘 보니 태고적에 파도가 쉬어 갔음직한 쑥색의 골짜기와 분칠한 듯 하얀 언덕이 구릿빛 산등성이를 쳐다보고 있다.
남으로 내려가는 길은 부드러운 갈색과 연황색의 산색을 배경으로 옅은 얼음판처럼 보이는 배드워터배이슨(Bad Water Basin - 약수가 아니라 악수터)으로 이어지는데, 해수면 아래 86미터 깊이에 있는 이곳이 미국에서 제일 낮은 지대라 한다. 돌아가는 길이 멀어서 가 보지는 않았지만, 동편 절벽 너머에 솟은 1669미터 고봉에 위치한 단테스뷰(Dante's View)에서 보인다는 '지옥의 풍경'도 바로 여기를 본 것이란다.
사해를 연상케 하는 이곳에는 소금의 결정이 수면 위에 굳어서 두꺼운 소금판을 이루고 있는데, 그 위를 걸으며 군데군데 파인 구덩이를 보니, 아래에 물이 고여있다.
한나절을 돌아다니며 데쓰밸리를 둘러본 느낌은 한 마디로 소금밖에 '먹을 게 없다'. 남한의 1/7이나 되는 넓은 땅에 도시락도 없이 소풍 와서 불현듯 목마르고 배고픔을 느낀 순간, 사막에서 밤을 맞으며 옛날의 포티나이너들처럼 고생하기 전에 어서 탈출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느껴진다.
주위의 돌산들도 태양열에 달달 볶여 대기에 지친 숨도 내뱉지를 못 하니 더 이상 머물 용기가 안 난다. 후다닥 차 안으로 들어가 내비게이터에 '라스베가스'를 쳐 넣고 가장 빠른 남쪽 길 따라 공원을 빠져나갔다. 잘 있거라 죽음의 계곡아! - Good bye Death Valley!
라스베가스에 들아와서는 스트립으로 가지 않고 바로 다운타운(Downtown: 중심가)으로 갔다. 다행히 고급 호텔이라도 라스베가스의 호텔들은 평일 숙박비가 주말가의 절반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쉽게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스트립가의 신식 호텔들과는 달리 라스베가스의 향수가 배어 있는 다운타운의 오래된 호텔들을 돌아다니는 재미는 별다른 맛이 있었기에, 우선 저녁을 먹고 나서 하루 종일 사막을 돌아다닌 신체의 고단함을 모두 잊고 소음과 광채의 밤거리를 쏘다녔다.
다운타운의 프레몬트가(Fremont Street)에서는 밤이 오면 매시간마다, 거리 천정을 다 차지하는 초대형 전광판에 뮤직 비디오를 보여주는데, 그 전광판의 크기가 세계 최대라 저녁에는 대단한 인파로 붐빈다. 물론 이틈에 각종 쇼를 선전하기 위해 야한 복장을 한 쇼맨과 쇼걸들도 나와서 깜짝쇼를 하고, 라이브 뮤직을 공연하는 예술가들도 카지노에서 돈놀이하기보다는 공짜 쇼에 관심 많은 선남선녀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우리도 인파에 출렁이며 1250만 개의 전구들이 깜박이며 천장에 그려내는 이미지가 바뀌고 효과음이 방방 울릴 때마다 환성을 질러댔다.
카지노로 손님을 끌기 위해 라스베가스의 호텔들은 호화 장식에 쇼핑몰, 저렴한 뷔페식당, 무료 쇼와 이색적인 놀이시설, 게다가 아담한 웨딩채플(결혼식장) 등 호텔마다 특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라스베가스 관광의 기본은 이런 호텔들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금속탐지기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큰 황금 덩어리(Golden Nugget - 약 27kg)를 로비에 전시하고, 수영장에서 상어가 헤엄치는 골든너겟호텔은 다운타운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다음 날 아침잠을 아끼는 도인처럼 일찍 일어나, 금 덩어리 구경하고 상어 노는 데서 같이 수영도 한 후에 슬로트머신을 조작하여 금을 땄다. 슬로트머신은 초보자를 위해 1센트부터 받아 주는데 이게 우습게 보이지만, 이렇게 시작해서 모든 사람이 지갑에서 먼지까지 다 털리고 나간다.
겨우 하룻밤 묵었지만 다운타운의 하이라이트만은 제대로 보았으니, 비록 기계조작의 미숙으로 금은 많이 못 땄지만, 오후에 아무런 미련 없이 스트립을 따라 이어지는 고가도로를 질주하여 시내를 빠져나와 북동으로 달렸다. 자이언 국립공원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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