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은 영-프 전쟁 후 퇴역 군인, 산업 혁명으로 인한 실업자, 스페인 식민지를 뺏으려는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공공연하게 운영한 사략선 privateer, 종교 탄압을 받은 이교도, 도시 부랑자, 가정 파탄자 등 사회 밑바닥을 전전긍긍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의 특별한 탈출구가 없는 이들에게 해적선은 말 그대로 해방구였던 것입니다.
한데 놀라운 일은 시쳇말로 빌어먹을 놈인 이들이 선내에서는 권한을 분산하고, 해적선은 공동으로 소유하는 민주주의를 발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수의 딜레마 모형의 [배신 - 배신]으로 서로 반목할 것 같았는데, [협력 - 협력]의 가치를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해적의 모습에 대해서 본국에서 겪은 수모와 멸시에 대한 반동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제2의 인생만큼은 기갈나게 살아보자는 의욕과 희망이 솟구쳤다는 것입니다.
특히 선장의 권한을 제한하고, 선장이 제대로 그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선거를 통해 새로운 선장을 선출했다고 합니다. 마치 왕정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대응하는 심정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선장은 전투에서만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선내 일상생활은 모두가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본 해적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가 영화에서 본 해적은 모습은 당시 영국 해군과 상선의 모습이었습니다.
해적에게 평등이라니 의아해 하겠지만 당시 해적은 분명 '평등'했습니다. 그래서 바솔로뮤의 허풍 속에 담긴 '자유'라는 한 마디가 역사적 기록으로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약탈한 물건의 분배는 투표로 뽑은 조타수가 결정했고, 해적선 내 평화 유지를 위한 규칙은 선원들의 동의를 모두 구해야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 8시에는 불과 초를 꺼야 한다' '선상에서 주먹질을 주고받으면 안 되며 모든 싸움은 육지에서 칼과 권총으로 끝내야 한다' 등의 규칙은 해적 사회를 지키기 위한 그들만의 [협력 - 협력]의 가치였고, 매우 소중하게 다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이 대목을 발견했을 때 믿기지 않았지만 점차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 놀랄만한 점은 이들 해적이 자신들의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많은 공을 들인 부분은 '분배'였다는 점입니다.
이 '분배'를 결정하는 조타수는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쓴 사람 또는 크게 다친 선원에게 더 많은 몫을 배당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또 놀랄만한 일은 이러한 '분배'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고 모두 공감하고 따른 점입니다.
조타수의 권력에 머리를 숙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출한 힘을 존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집단 내 사회 협력을 끌어내는 핵심 키워드 '평판'과 '공정'의 가치를 '민주주의' '권력 분할' '규칙의 체계화' 세 기둥으로 만들어 쓴 것입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 아닌 해적이 말입니다. 바운티 호에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출처: https://naver.me/5MUWv1g3
해적 민주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든 이들은 18세기에 들어서 모두 사라졌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해상 패권을 잡으면서 소탕전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최신 무기를 장착한 군함을 이길 수 있는 캐러비안 해적은 없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협력의 업적은 눈이 부십니다. 그것이 왕정 시대였기 때문에 대비되어 더 부각된 점도 있을 겝니다. 돌아갈 곳 없는 이들이 망망대해 바다에서 제2의 고향을 만들기 위한 그들만의 협력 방식을 찾은 것은 '어떻게 하면 갈등을 예방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결과물로서 '해적 민주주의'였습니다.
요컨대, 왕정을 반대하고 꿈꾸는 새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들의 노략질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한 점은 아이러니로 남을 수 밖에 없지만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민주주의' 기틀을 '해적 민주주의'에서 찾는 연구자가 꽤 많은 점 역시 또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