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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미하다 Sep 10. 2017

06. 맥주는 문화가 된다 - 트라피스트 맥주

맥주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연재 중

맥주 초보가 맥주 애호가가 되기까지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는지 알아가는 일상 이야기 


제 1부_ 술과 취미

여섯 번째 잔. 맥주는 문화가 된다









‘기도하고 일하라’


중세 수도원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성 베네딕토의 고향인 이탈리아 노르차 (누르시아) 에는 버려진 수도원이 있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세 명의 수도사들은 2000년부터 그곳에 자리를 잡고 수도원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수도사가 되기 전부터 크래프트 맥주를 좋아하던 니바코프 신부는  무너진 수도원을 고치고 수도생활을 유지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맥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자급자족을 중시했던 성 베네딕토의 정신을 그들은 이렇게 이어받았다.




"우리 생활의 중심은 기도입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하루 일곱 번 기도하고 매시간마다 교회에 갑니다.
기도하는 동안 틈틈이 할 수 있는 것은 맥주 양조 말고는 없어요."

만든 맥주를 마시기도 하나요? 얼마나 많이 마십니까?

"적은 양은 아니에요. 품질 기준이 높아서 맛있지 않은 맥주는 모두 마십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속세에서 보자면 기도는 참으로 쓸데없는 일입니다. 굳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맥주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맥주는 삶을 풍요롭게 하고 즐길 수 있게 해줍니다. 마치 신처럼요."




그들의 삶은 신과 맥주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illust by @eummihada - 음미하다




 46일 간 이어지는 사순절의 금식기간 동안 뮌헨의 수도사들은 맥주를 만들어 식사 대신 마셨다. 만드는 과정에서 한번 끓여내어 살균하는 맥주는 중세 흑사병의 두려움을 떨칠 수 있게 해주었던 축복받은 음료였다. 수도원 맥주는 오랜 세월 베네딕토의 규칙을 따랐던 수도사들이 지금의 인류에게 건네는 선물이다.


살면서 수많은 취미를 가졌다. 목공예도 해보고, 퀼트, 인형 만들기, 사진 찍기, 프라모델 만들기까지.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진득하게 하지 못하고 용품들만 한가득 샀다가 치워버리기를 반복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늘 맥주를 마셨다. 하지만 맥주는 선택할 필요도, 선택할 여지도 없는 늘 같은 것이었다.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대상일 뿐 내가 무언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선뜻 좋아한다고 말하기 꺼려지는 존재였다. 마시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맥주는 취미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맥주를 마셨다. 왜일까? 몸과 머리를 유연하게 해주는 적당한 취기가 좋아서? 사람들을 만날 때의 어색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맥주를 마시며 긴장도 풀리고 나에게 더 솔직해지기도 해서? 맥주와 함께 했던 수많은 경험과 인연은 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것이 맥주 덕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맥주는 목이 마르면 마시는 물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illust by @eummihada - 음미하다



“예수님은 물을 와인으로 만드셨습니다. 맥주는 아니지요. 하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는 좋은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입과 영혼을 함께 즐겁게 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만들어진 니바코프 신부의 맥주가 맛없을 수 있을까? 



좋은 맥주는 진짜 맛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한 잔의 수도원 맥주도 아닌, ‘수도원 맥주 스타일’의 맥주로도 충분했다. 


마개를 열어 따르면 골골거리며 쏟아지는 기분 좋은 소리. 둥글게 잔을 쓰담으며 뽀얀 거품과 함께 터지는 향기를 맡고 있으면 여느 하루의 저녁 시간에도 특별함이 생긴다. 함께하는 사람과의 대화에 생기를 더해준다. 정성스레 만들어진 맥주에 담긴 마음은 그렇게 전해진다. 또 다른 맥주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느새 맥주를 찾아가며 마시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늘어가는 맥주잔의 종류만큼 맥주는 내 삶에 조금씩 자리 잡아갔다. 그렇게 맥주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목공예로 만든 식탁에 맥주를 올려놓고 사진을 남긴다. 마치 나를 스쳐간 모든 취미가 맥주를 즐기기 위한 준비였던 것처럼.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나는 맥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졌다. 어딘가에 여행을 가면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맥주가 있는지 찾아본다.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당당하게 맥주를 좋아한다고 말해본다. 




그렇게 맥주는 나의 취미가 되어간다.

그리고 내가 걸었고, 걷고 있는 그 길을 누군가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트라피스트 에일 (Trappist ale)이란?


서로마의 멸망 이후, 맥주를 즐겨 마시던 게르만 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샤를마뉴 대제가 유럽을 통일했다. 하지만 게르만 족을 지배하던 로마의 영향으로 귀족들은 맥주보다는 와인을 더 좋아했다. 당시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알퀸 (Alcuin)은 와인이 없어 할 수 없이 시큼한 맥주를 마셨다며 친구에게 이를 불평하는 편지까지 보냈다.



May you, oh beer,
be absent from here!

맥주여,
제발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맥주가 중세의 음료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샤를마뉴의 후계자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의 공이 컸다. 그의 명을 받아 당시 유럽 수도원의 운영 규칙을 만들었던 ‘아니안의 베네딕트’ 수도사는 로마시대 최초의 수도원을 세운 ‘노르차의 성 베네딕트’의 규칙서를 유럽의 실정에 맞게 손본다. 노르차의 성 베네딕트는 본디 로마의 귀족이었던 탓에 와인에 대해서는 ‘하루 반 잔 정도는 마셔도 괜찮다’는 규율을 정했지만 게르만의 음료였던 맥주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니안의 베네딕트는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여 의견을 모았고, 그 결과 ‘와인은 하루 반 잔, 맥주는 한 잔 정도’ 마셔도 좋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런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9세기 초 장크트 갈렌 수도원의 설계도에서 최초의 수도원 맥주 양조장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설계도에는 각각 귀족, 수도원의 수도사, 순례자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맥주를 만드는 세 개의 양조장이 묘사되어 있다. 귀족에게는 보리와 밀로 만든 고급 맥주를 대접했는데, 이것이 벨지안 스트롱 에일 (Belgian strong ale), 벨지안 스트롱 다크 에일 (Belgian strong dark ale) 혹은 트리펠 (Tripel) 맥주로 발전한다. 훗날 트라피스트 회의 뿌리가 되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맥주 양조 전통은 이렇게 생겨났다.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프랑스의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은 1800년대 프랑스혁명을 피해 벨기에로 이동했다. 그들은 원래 와인을 주로 만들어 왔지만, 와인 제조를 위한 포도를 구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와인보다는 맥주를 즐겨 마시던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풍토에 맞게 맥주를 빚기 시작했다.


트라피스트 에일 (Trappist ale)의 정의는 간단하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원 안에서 수도사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며, 수도원 운영이나 기부가 아닌 이윤을 목적으로 양조해서는 안 된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이렇게 ‘누가’,  ‘어디서’, ‘왜’ 맥주를 만드는지에 대한 정의이기 때문에 사실 한 가지 스타일의 맥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황금빛에서 검은빛에 가까운 고동색까지, 한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라거 맥주와 비슷한 4도의 맥주부터 마치 와인처럼 12도가 넘는 고도수의 맥주까지 다양한 빛깔과 맛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Authentic trappist product’의 육각형 로고는 맥주에 담겨있는 그들의 삶의 한 조각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래서 모양이 다르고, 맛이 다르더라도 그 모든 맥주를 ‘트라피스트 에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나 보다.

illust by @eummihada - 음미하다




참고문헌

Inés San Martín, Benedictine brewer-monks say beer, like God, just makes life better. Crux, 2016.

Erika Bolden, New beer made by monks arrives in the U.S. Los Angeles Times, 2016.

Claudio Lavanga, Birra Nursia Brewed by American Monks in Italy Hits U.S. Shelves, NBC News, 2016.

Beer culture in Belgium. Inscription 11.COM 10.b.5. 2016.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Francis Groff and Marcel Leroy, Journey to the source of Chimay Trappist Beer. Acacia, 2011.

Richard W. Unger. Beer in the middle ages and the Renaissance. U. of Pennsylvania Press, 2013.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일주일에 2회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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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 맥주 자체도 우리의 삶에서 음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제 1 부

1-1. 술을 도대체 왜 마시는 걸까요? 上 - 지금 마시는 술은 내가 선택한 한 잔인 가요?

1-2. 술을 도대체 왜 마시는 걸까요? 下 -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건배해야 할까요?

2-1.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上 - 다 함께 술 마시며 회식하면 하나가 되나요?

2-2.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下 - 숙취를 방지하려면 적게 마시는 방법뿐일까?

3. 즐기는 사람도 잠재적 중독자 - 쥐들은 외로움에 적응하기 위해 마약을 했다?

4. 취향은 나 자신의 거울이다 -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5. 한국인의 커피, 한국인의 맥주? -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입맛은 존재하는 것일까?

6. 맥주는 취미가 된다 - 트라피스트 맥주


제 2 부

1. 맥주의 의미의 의미 - 낯선 의미의 맥주, 벨지안 스타일 트리펠

2. 맥주의 이름 - 맥주 알코올 도수가 와인이랑 비슷해?

3. 자꾸만 이름은 늘어간다 - 세상에 존재하는 100가지가 넘는 맥주

4. 맥주와 치즈의 나라 벨기에


그라폴리오에서는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습니다. 
http://www.grafolio.com/story/19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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