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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미하다 Sep 29. 2017

2부 04. 맥주와 치즈의 나라 벨기에

벨기에의 맥주는 그 자체가 문화이다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연재 중

- 맥주 초보가 맥주 애호가가 되기까지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는지 알아가는 일상 이야기


제 2부_ 나만의 취향 탄생

네 번째 잔. 맥주와 치즈의 나라 벨기에




illust by @eummihada - 음미하다



서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일찍부터 산업과 무역이 발달했다. 14세기 벨기에의 헨트 (Ghent)는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였고, 헨트의 시민들이 프랑스의 귀족보다 옷을 더 잘 입는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다. 발달한 경제와 산업을 기반으로 시민들은 귀족에 대항할 힘을 갖추기 시작했다. 1302년 콜트레이크 전투에서는 시민 민병대가 말과 갑옷으로 무장한 프랑스의 기사들을 물리치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와 같은 자치권을 누리기도 했다. 그후로도 강대국의 간섭은 끊이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끈질기게 영주의 권위에 도전했고 끝내 독립을 얻어냈다.

운하가 발달해 ‘북해의 베니스’로 불렸던 헨트를 비롯해 하수도가 잘 정비되어 있고 교통이 편리한 벨기에의 여러 도시에는 이때부터 양조 산업이 번성한다. 많은 고객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도시의 양조자들은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프랑스 혁명을 피해 벨기에에 둥지를 튼 수도사들은 트라피스트 에일을, 겨울 농한기에 생산해서 여름철 농번기 막걸리처럼 맥주를 마셨던 농촌에서는 세종 (Saison) 맥주를...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독일 등 수많은 주변 열강들의 지배를 받으며 다양한 문화를 흡수,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낸 벨기에의 역사처럼 그들의 맥주 또한 다채롭다.


두 번의 세계대전 내내 독일의 지배를 받으며 벨기에에서도 서서히 라거 맥주의 시대가 열린다. 대량 생산을 통해 싼 값에도 한결같은 맛을 내는 대기업 맥주에 맞서 지역 양조장들도 라거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은 규모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어 점점 저품질의 원료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이들은 하나 둘 씩 문을 닫았다. 대형 빵집 체인점이 들어서며 하나 둘씩 동네 빵집이 망해가는 것처럼, 20세기 초 3,223개였던 벨기에의 양조장은 1980년 123개로 급속히 줄어든다.

1872년에 설립된 벨기에의 구덴 카룰로스 (Gouden Carolus) 양조장도 같은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3대째 양조장을 물려받은 찰스는 1962년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라거 맥주의 생산을 중단하고 짙은색과 높은 도수의 벨지안 트리펠 맥주 생산에 양조장의 운명을 걸었다. 어차피 값싸고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맥주를 원하는 시장에서 대기업과 경쟁할 수 없으니 맥주 자체의 맛과 풍미를 중시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특별한 맥주에 집중했다.


       

맥주 맛이 달라질까봐 양조장 지붕의 거미줄도 치우지 않는 칸티용 (Cantillon)의 람빅 (Lambic),
1975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양조장을 인수해 손수 물과 비누로 오크통을 청소해가며 맥주를 만들었던 프랑크 본의 본 괴즈 (Boon Geuze)




맥주의 맛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신맛, 달콤함, 향기, 화끈거리는 술기운을 앞세운 '벨기에 맥주’만의 개성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맛과 취향을 지켜온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전세계 맥주 두 잔 중 한 잔은 인베브 (In-Bev)에서 만들어진다. 인베브의 모체인 인터브루는 벨기에에서 라거를 생산하던 스텔라 아르뚜아 (Stella Artois)와 주필러 (Jupiler)가 합병하면서 탄생했다. 밀맥주인 호가든 (Hoegaarden) 과 수도원 스타일 맥주 레페 (Leffe)를 인수한 그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스텔라, 호가든, 레페’로 상징되는 ‘벨기에 맥주’의 이미지를 전 세계에 퍼뜨린다. 게다가 미국인들에게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맥주가 있는지'를 알리는데 평생을 바친 ‘비어 헌터’ 마이클 잭슨의 벨기에 맥주에 대한 화려한 묘사와 찬사는 최고의 품질과 개성, 전통을 이어온 '벨기에 맥주’만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



"이제는 중국, 파라과이, 콜롬비아에서까지 구덴 카를로스 맥주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우리 브루어리를 알겠어요?"

현재 구덴 카를로스 맥주를 만들고 있는 루벤스의 말이다.



벨기에 국내의 양조장과 경쟁하는 대신 전 세계에 ‘벨기에 맥주’의 명성을 퍼뜨린 인베브의 수출전략은 결과적으로 스스로는 해외 유통망을 확보하기 어려운 소규모 브루어리들이 쉽게 그들의 맥주를 수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현재 벨기에에서 생산되는 맥주의 절반 이상이 수출된다.



맥주에 대한 집념과 사랑으로 가족 양조장을 지켜낸 장인정신과 전 세계에 ‘벨기에 맥주’ 브랜드를 구축한 자본가의 비즈니스 마인드.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힘에 의해 벨기에는 다국적 맥주 기업의 시초인 인베브의 본산이면서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다양한 맥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있는 역설이 공존하는 국가이다. 한 번도 제국을 건설하지 못했지만 한 번도 마음 깊숙히 굴복한 적 없었던 벨기에인의 뚝심과 개성.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벨기에의 맥주이다.




그래서 벨기에의 맥주는 문화이다.

  






참고문헌
Johan Swinnen, Devin Briski. Beeronomics, How beer explains the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Richard W. Unger. Beer in the middle ages and the Renaissanc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3.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일주일에 2회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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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 맥주 자체도 우리의 삶에서 음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제 1 부

1-1. 술을 도대체 왜 마시는 걸까요? 上 - 지금 마시는 술은 내가 선택한 한 잔인 가요?

1-2. 술을 도대체 왜 마시는 걸까요? 下 -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건배해야 할까요?

2-1.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上 - 다 함께 술 마시며 회식하면 하나가 되나요?

2-2.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下 - 숙취를 방지하려면 적게 마시는 방법뿐일까?

3. 즐기는 사람도 잠재적 중독자 - 쥐들은 외로움에 적응하기 위해 마약을 했다?

4. 취향은 나 자신의 거울이다 -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5. 한국인의 커피, 한국인의 맥주? -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입맛은 존재하는 것일까?

6. 맥주는 취미가 된다 - 트라피스트 맥주


제 2 부

1. 맥주의 의미의 의미 - 낯선 의미의 맥주, 벨지안 스타일 트리펠

2. 맥주의 이름 - 맥주 알코올 도수가 와인이랑 비슷해?

3. 자꾸만 이름은 늘어간다 - 세상에 존재하는 100가지가 넘는 맥주

4. 맥주와 치즈의 나라 벨기에



그라폴리오에서는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습니다.
http://www.grafolio.com/story/19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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