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길들이기
이 글은 페벗인 공희준 님께서 댓글로 주신 말씀이 자극이 되어 쓰는 기록입니다.
번역의 과정에서 사고가 깊어집니다.
2023년 겨울 Kent Beck의 <Tidy First?> 번역 이후에 딱히 번역할 일이 없었는데, 올해 7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에서 컨텍스트 엔지니어링으로>를 시작으로 요즘IT에 번역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원고 형태로 요즘IT에 제출한 글이 다섯 개이니 매 달 하나 꼴로 번역하는 중입니다. 퍼플렉시티 도움으로 아끼는 시간을 다시 적절한 용어 선택에 쓰기로 결심하는데 공희준 님 지적[1]이 방아쇠로 작동한 것이죠.
아무튼 서론이 길었는데, 이 글은 번역에 대한 고민을 남긴 기록일 뿐이라 읽을 가치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남길 가치가 있다고 보고 여과 없이 그대로 쓸 생각입니다. 번역 중인 글은 <Advice for New Principal Tech ICs (i.e., Notes to Myself)>인데 글에 등장하는 순서로 즉각적인 번역이 아니라 숙고[2]가 필요한 용어로 선정한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Principal Tech IC, principal engineer or scientist
technical trailblazers
wheelhouse
momentum
grooming
“go-to” person
mandatory
on-the-ground experts
과거라면 제 직관에 따라 순서대로 했을 텐데.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공지능 길들이기> 47편을 작성하는 동안 만들어진 습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브레인스토밍은 항상 AI를 활용한다 응용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아무튼 퍼플렉시티에게 먼저 결과를 요구했습니다.
우선 항목을 쭉 훑어보니 굉장히 훌륭했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이 답을 낼 수 있었을까 확신이 안 섭니다. 반면에 제가 책임을 지기 위한 수준의 결정을 하는 노력은 더 유익하게 쓰일 듯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예측을 앞서 '선택과 집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애초에 '지식 덕후의 탄생' 연재로 분류하려던 이 글의 성격을 인공지능 길들이기로 변경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별 걸 다 따진다'에 해당하는 글이 '지식 덕후의 탄생' 연재입니다. 그런데, 방금 모든 브레인스토밍은 항상 AI를 활용한다 응용해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사고가 깊어진다고 해서 굳이 옛 방식이나 익숙했던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AI와 함께 지식 탐험을 하는 번역 무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죠.
그렇게 마음먹으니 다음 단계도 달라집니다. 앞서 제가 뽑은 항목에 대해서도 퍼플렉시티 의견을 묻는 것이죠.[3]
이 결과를 두고 저는 '그의 방법과 내 직관을 결합하기'라고 이름 붙여 봅니다. 그런 연후에 눈에 띄는, 다시 말해 검토가 필요한 용어를 선별하게 생각을 풀어 봅니다.
Principal Tech IC부터 시작합니다. 난이도를 줄이기 위해 (한편으로는 습관이 되어서) 퍼플렉시티 조언을 구합니다. 여섯 개를 꼽아 달라고 했습니다. (앞선 표와는 결과가 다릅니다.)
그리고 설명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한국 IT 기업 및 산업계에서는 ‘수석 엔지니어’나 ‘수석 개발자’가 가장 흔하고 표준적인 표현입니다. ‘개인 기여자’(Individual Contributor)를 직역해 '기여자'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기여자’라는 단어보다는 ‘엔지니어’나 ‘기술자’를 붙여 더 자연스러운 호칭으로 만듭니다.
한편, 퍼플렉시티가 검색한 페이지를 보니 한국과 미국의 엔지니어 직급 비교가 있었고, 거기서 또 영어로 된 직급 비교 사이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아마존의 직급이 다른 기업들과 함께 나열되어 있어 비교가 가능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아마존을 제외한 외국 기업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개발회사를 선택해 보았습니다.
초안 번역에는 '기술 임원'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원문 전체를 번역한 후에 제목에 붙인 것이라 종합적인 고려가 담긴 선택이었습니다. 실제로 모 인터넷 기업에서 지인이 불렸던 직함에 대한 기억이 작동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적합한 용어의 관점에서 다시 보니 생각이 달라집니다. 일단, Principal Tech IC의 유형으로 principal engineer나 scientist가 묶이는 듯합니다. 그래서, 딱딱한 말이지만, '수석 기술 개인 기여자'라고 원어 그대로 풀어서 번역하는 것이 포괄성을 나타내고 독자들이 나중에 현장에서 실제 직급을 들었을 때 '아, 수석 기술 개인 기여자를 이 회사에서 이렇게 부르는구나'하는 식으로 작동하게 할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직관적으로 전달력이 가장 높아 보이는 '수석 엔지니어'로 통일하기로 합니다. 문장이나 문단이라는 맥락을 벗어나 용어 자체만 보면 다른 생각이 들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자님들이 글 전체를 읽는 맥락에서 결정하기로 합니다. 한편, 어감 상은 대안이 될 수 있는 '기술 임원'은 '기술 기반의 관리자'로 보일 수 있어 선택하지 않습니다.
다음 표현도 어색합니다. 표만 두고 보면 '위임을 통한 확장'이 '타인을 통한 확장'보다는 나은 듯합니다. 다만, 문구가 쓰인 맥락을 보고 판단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위임을 통해 조직을 성장시키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Scaling이라는 단어만 보면 확장이라 할 수 있지만, 타인을 통한 확장이라는 말은 직접 일을 하는 대신에 육성을 통해 조직이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임'과 '조직의 성장'을 넣어 푸는 것이 의미 전달에 더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농구팀 이름으로 익숙한 trailblazer는 그저 단어 뜻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으로 퍼플렉시티에게 물었습니다.
Trailblazer는 "trail"(오솔길, 흔적)과 "blaze"(나무에 표시를 새기다, 흠집 내다)의 합성어로,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에 숲이나 미개척지에서 길을 만들며 나무껍질을 벗겨 흰 자국을 남기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Wheelhouse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퍼플렉시티에게 어원을 묻습니다.
Wheelhouse는 "wheel"(키, 조타륜)과 "house"(집, 방)의 합성어로, 19세기 배에서 조타수를 보호하는 구조물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비유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으로 확장되어, 야구에서 타자의 최적 타격 구역(sweet spot)을 거쳐 현대 슬랭으로 전문성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grooming도 비슷합니다. 맥락 상 한국말로 '육성'이 딱 맞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루밍'이라고 하면 안 좋은 어감으로만 주요 쓰이기 때문에 '그루밍'이라고 번역하면 위험합니다.
모멘텀의 경우는 퍼플렉시티의 제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지 않았더라면 '모멘텀'으로 그대로 번역할 뻔했으니까요. 가속도는 맥락이 맞지 않지만, 추진력은 어감에도 문제가 없는 더 나은 대안으로 보입니다.
또한, 다음 제안을 받기 전에는 'go-to person'을 '꼭 필요한 사람'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연락처 1순위'가 더 정교한 번역인 동시에 직관적이란 생각이 들어 수정했습니다.
일단, 시도해 보니 좋은 느낌이 있습니다. 과정을 메모하듯 기록해 두었는데, 아직 이렇다 저렇다 내릴만한 결론은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러한 지적은 최봉영 선생님의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과 연결됩니다. 번역뿐 아니라 한자어를 구성하는 씨말에 대해서도 살피기 위해 한자사전을 찾아봅니다.
[2]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으로
[3] 어제 아내의 말을 자르고 들어가 핀잔을 들었는데, 이런 습관이 제가 말을 자르지 않고 경청하는 습관을 키우는 데에도 도움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32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32. 프로 기사의 긍지와 자신감 상실 그리고 AI 동반자화
33. 제비와 비둘기의 비유: 피할 수 없는 AI-환경
34. 인력을 유지하면서 AI를 이용해 생산량을 늘리자
37. 인공지능은 언어로 만든 추상적 구조물을 변하게 하는가?
38. AI가 위협하는 정규 교육 후에 진행되는 견습 시스템
39. 인공지능에 대한 풀이가 강력한 신화의 힘을 깨닫게 하다
40. 사라져 버린 신화의 자리에 채워 넣을 무언가가 필요한가
41. 세상이 바뀌면 내가 쓰던 말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42. 스포츠와 예술을 모두 콘텐츠로 담아 버린 웹 기술
43. 팬덤 비즈니스는 화장품뿐 아니라 바둑에서도 필요한가?
44. 인공지능을 주도하는 이들은 마치 신대륙 탐험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