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것들 중에는 생텍쥐 페리 <어린 왕자>의 말들이 있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거나, ‘네가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행복할 것’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에 관한 것들이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도 있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이 시구가 나에게는 ‘기다림’에 대해 할 말 다했다고 여겨질 정도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도 떠오른다. 기다림을 사유하게 한다. 기다린다고 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다리지 않을 수도 없다. 기다리지 않고 간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작가가 말하려는 기다림의 대상, ‘고도’가 그 무엇이든, 독자가 받아들이는 그 대상이 그 무엇이든, 기다림의 행위만큼은 중요해 보인다. 아니, 기다린다는 행위야말로 중요해 보인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시구처럼 마냥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림의 대상에게로 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삶은 ‘기다림’, 기다리는 중에 있는 것이 삶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해서, 대상을 찾고, 만나기 위해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나에게 묻는다. 그 물음이 나에게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살고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아래의 글들은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에 대한 저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