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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30. 2020

'마음'으로 읽는 개벽의 징후

-지구학으로서의 <개벽의 징후 2020> 읽기 - 1

* 이 글은 ≪개벽신문≫ 제94호(2020년 5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이 지난 4월부터 시작하고 있는 <지구학읽기> 모임의 6번째 텍스트는 개벽의 징후 2020≫(모시는사람들, 2019)이었다. 발제는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황명희, 송지용, 최규상이 책의 구성에 따라 각각 1부-2부-3부/4부를 각각 나누어서 하였는데, 이하는 그때의 발제문을 수정한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3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제1부 ‘마음’으로 읽는 개벽의 징후


황 명 희 | 원광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



시작하며


이 책에는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위해 ‘다시 개벽’하는 이들의 개벽이야기가 실려 있다. 대전환으로 가는 첫 걸음은 ‘마음’ 개벽이다. ≪해월신사법설≫ <영부주문>의 첫 구절은 “마음이란 내게 있는 본연의 한울이니 천지만물이 본래 한울마음”이라고 시작한다. 이처럼 “한반도 최초의 자생적 학문”(조성환)이라 할 수 있는 동학에서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평등한 ‘마음’ 자리를 밝혔다. 동학은 내 ‘마음’이 있어야 내가 있고(존재론), 내 ‘마음’이 열려야 우주와 만유가 열리며(우주론),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수양론)에 대해 사유하였다.


이 책의 제1부 "天(하늘)"은 지금 시대의 키워드인 ‘마음’을 개벽하여 종교의 본래적 가르침을 회복하고, 어떻게 하면 ‘마음’을 놓지 않고 수양으로 이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보았다. 그리고 동학에서는 이 모든 것을 하늘 天에 담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는 天은 ‘마음’을 일컫고, 오늘날 종교는 ‘마음’을 밝히고 밝혀서 훤히 드러나도록 수양해야 한다는 의미로 제1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마음 시대


주요섭은 <한살림 마음살림과 질문의 전환>에서 지금은 ‘마음의 시대’라고 말한다. 마음살림의 목표는 깨달음이고 마음을 깨닫게 되면 자유자재하는 관자재보살이 된다는 것이다. 한살림의 마음살림은 이와 같은 관재재보살의 경지를 꿈꾼다. 이를 위해 저자는 질문을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답을 추구하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생각의 뿌리를 묻는 ‘어떻게?’로 질문을 바꾸자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의 전환은 질문하는 자를 관찰해 가는 방식으로, 질문하는 자가 어떤 구별에 의존해서 관념을 구성하는지를 관찰하게 된다. 그래서 질문의 전환은 이념과 개념, 이상과 실재에서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얻는 관자재보살이 되는 방법이 된다. “일체 생령이 관자재보살이 아닌 것이 없다”(오광익)는 관점에서, 저자는 ‘만인성인시대’에 질문의 전환으로 우리 모두가 관자재보살이 되자고 제안한다. 누가 누구를 구원해주고, 누구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사고에서, 내가 나를 구원하고, 나에 의해 내가 구원되는 ‘ 자기구원시대’를 열자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마음’은 동양에서 도(道), 천(天), 심(心), 불(佛)로 상징된다. 도를 구하고, 천과 합하고, 심을 중시하고, 불을 추구하는 것도 ‘마음’ 하나로 관통된다. 마음을 구하고, 마음과 합하고, 마음을 중시하고, 마음을 깨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 하나를 알게 되면 우주만물에도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래서 나와 우주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차원을 ‘영성’이라고 하였다. 영성은 이성의 반대편에 있는 신비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통시대에 동아시아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

지고 있는 ‘마음’ 다스리는 것을 ‘도덕’이라고 하였다. 전통시대의 ‘도덕’이 지금의 ‘영성’인 것이다.


이원진의 <퇴계의 성학십도, 가상현실 VR과 만나다>는 이와 같은 영성과 도덕, 전통과 가상, 천인합일과 마음챙김, 기술과 구도(求道)를 역동적으로 융합·창조하는 작업을 소개하고 있다. 비슷하게 송지용은 <몸짓으로 풀어낸 ‘여성성’에 대한 고민>에서 개벽세상을 찾아 떠난 여행인데 뜻밖에도 자기의 ‘마음’을 만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후에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는다. 송지용의 ‘마음을 만난 이야기’도 매우 영성적이고 도덕적인 글이 라고 생각된다.


2. 마음 종교


소수의 영적 천재들에 의해 깨달음을 얻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모든 이가 집단적인 의식의 진화를 이룰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는 김용휘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명상 수행>에서 진화를 위해, 종교와 전통 그리고 서구의 실용적이고 심리학적인 명상 기술들을 모두 통합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명상의 핵심은 ‘자기 비움’이라고 하면서, 자기 비움은 내맡김, 열망, 참나의 주인이 되는 수행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나는 자기 비움, 내맡김, 열망, 참나의 주인의 바탕에는 모두 ‘마음’이 있다고 본다. 자기 비움을 하고, 내맡기고, 열망을 가지고, 참나의 주인이 되는 것도 ‘마음’이라는 바탕에서 일어나는 같은 ‘마음’ 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바탕에는 ‘마음’이 있어서 항상 그 바탕을 찾으며 바탕에 근원하는 생활을 새 시대의 종교적 삶이라 생각한다. 나는 특정 종교와 장소에 상관없이 일상에서 바탕으로서의 ‘마음’ 챙기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명상 수행으로 보는 것이다.


<개벽의 시대, 종교의 미래를 생각하다>에서 유정길은 종교의 영역은 줄어들고 종교인들은 사라지지만, 내면적 성찰과 초월성이라는 종교심과 종교성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아울러 종교는 본래의 가르침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전환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종교 본래의 가르침은 지금과 같이 종교화된 모습에 있지 않고 깨달은 성자들의 언행에 있다. 삶은 결국 각자가 살고, 부모는 은혜와 감사로 있듯이, 깨달음도 각자가 이루고 성자는 진리의 스승으로 우리 곁에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채워지지 않는 종교심과 종교성을 충족할 수 있을까?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가 할 수 밖에 없다. 어찌 보면 종교성과 종교심도 다 ‘마음’으로 관통한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자유자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어느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종교적으로 사느냐가 문제다.


동학·천도교는 수운 최제우의 한울님 체험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동학·천도교의 개벽>에서 심국보는 한편으로는 심학(心學), 즉 마음공부가 기본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이나 신선 관념이 한울님(신)인 절대적 유일자로 직접 등장한 것은 수운 최제우의 신비체험이 최초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동안 신격화 또는 인격화해온 한울님을 역력히 존재하는 ‘마음’의 관점으로 보면 어떨까? 그러면 심학, 마음공부와도 부합된다. ‘하늘’ 즉 객관적 대상의 존재나, 신선과 같은 미신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 즉 절대적 유일자

로서의 ‘마음’이 수운에게 드러난 한울님이지 않을까? 영부주문도 ‘마음’의 관점으로 보면 쉽게 해석이 된다. 영부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고, 주문은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잡아서 ‘마음’과 합일되기 위한 방법이다. 그래야 저자의 바람대로,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세상을 개벽해서 동학·천도교의 이상대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와 개벽 : 하늘신학을 향하여>에서 손원영은 초기 한국기독교는 동학 실패 후에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기독교를 서양의 개벽사상으로 수용하여, 그쪽으로 전향하였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고, 3·1 운동과 같은 개벽운동도 가능했다고 본다. 개벽사상의 원류를 “포함삼교(包含三敎)”의 풍류도로 보고, 우리 고유의 풍류도 정신으로 동학과 기독교를 모두 아우르는 ‘하늘풍류도’를 주창한다. ‘개벽’이란 공통의 목표 아래 하나님(天) 신앙 위에서 서로 협력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신격화, 인격화 되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마음’ 자리에서 밝혀지는 하나님으로 전향되어야 한다고 본다. 원불교의 대산 김대거는 “대원경지(大圓鏡智)는 부처님께서 깨치신 불생불멸의 자리, 공자님께서 깨치신 무극 자리, 노자님께서 깨치신 도의 자리, 예수님께서 깨치신 하나님 자리를 말한다”고 하였다(≪대산종사법어≫ 제9 동원편 14장). 그 자리를 ‘두님’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언어도단으로 보면 결국 진리의 세계를 언어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나는 언어의 표현들을 넘어 존재하는 진리를 ‘마음’으로 보았다.


3. 마음 수양


우리 모두가 이미 갖고 있는 이 한 ‘마음’을 밝혀,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은 수양 없이는 쉽지 않다. 마음은 끊임없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 잡념과 망상, 욕망과 집착을 일으키고 그에 따른 행위의 세계를 만들어가느라 바쁘기만 하다. 마음 수양은 ‘마음’이 경계에 끌려다니는 마음과 행동을 멈추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끌려 돌아다니는 마음을 잡아 그 마음의 주인이 되자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깨달은 소수의 성자들은 이 ‘마음’을 발견하였고, 이 ‘마음’이 바로 한울이자 天이다. 여기에서 ‘마음’은 사(私)가 없는 청정한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을 다스리고자 했던 전통의 도덕에서 현대의 마음챙김에 이르기까지 ‘마음’은 중요한 화두가 되어 왔다. 정산 송규는 “우주 만유는 허공에 근본해 있고, 모든 유정(有情)은 각기 ‘마음’에 근본해 있다”고 했다. ≪불조요경≫<수심결>에는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이 ‘마음’을 밝힌 사람이며, 현재의 모든 현성들도 또한 이 ‘마음’을 닦은 사람이며 미래에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땅히 이 법에 의지하여 수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팬데믹에도 우리 각자가 먼저 ‘마음’의 주인이 되어 이 위기를 잘 극복해나갔으면 좋겠다.


≪개벽의 징후 2020≫ <제1부 : 마음, 종교, 수양> 편 

한살림 마음살림과 질문의 전환 _주요섭 15

개벽의 시대, 종교의 미래를 생각하다 _유정길 23

새로운 시대의 명상 수행 _김용휘 33

퇴계의 성학십도, 가상현실VR과 만나다 _이원진 45

동학, 천도교의 개벽 _심국보 66

몸짓으로 풀어낸 ‘여성성’에 대한 고민, 마음 개벽으로부터 문명 개벽까지 _송지용 74

기독교와 개벽: 하늘신학을 향하여 _손원영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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