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을 찾는 방법, 그리고 After...
[지난 줄거리]
UN에서 인턴하다 석유화학회사 입사, 존버하다가 독일 대학원 합격(UN은 석사 학위 필수). 대학원 가려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지만, 정말 공부하고 UN 가고 싶은 게 맞을까? 하고싶은 것이 뭔지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대학원 가지 않고 와인 여행을 결심하는데?
2년간 꾸준히 에세이를 쓰며 얻은 위안과 확신, 그리고 남들 보기 좋은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용기. 덕분에 좋아하는 '와인'에만 온전히 시간과 에너지를 쏟자고 마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와인을 마시며 부단히도 꿈꿨던 포도밭을 실제로 거닐고 포도를 따먹으면 어떨까. 현지에서 현지 음식과 현지 와인을 마시면 얼마나 황홀할까. 이렇게 와인에 빠졌다면, 와인을 업으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돌아올 기약 없이 비행기에 몸을 맡깁니다. 도착지는 4년 전 겨울, UN 근무지였던 독일. 감회가 새롭습니다. 막연한 두려움과 묘한 전율, 그리고 흥분. 몇 개의 나라를 방문할지, 몇 종류의 와인을 맛보게 될지, 그리고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죠. 이러다 와인에 진절머리가 나서 다시 취업을 하거나 대학원을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간 정말 잘 놀고먹고 마시며 와인 공부했습니다. 이동하면서 틈틈이 와인 용어를 번역하여 업로드했고, 여행기도 꾸준히 썼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와인을 맛보았고, 많이 걸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정말 우습게도 귀국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피부 트러블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미용에 큰 관심이 없어, 화장품이 없을 때는 바디로션을 얼굴에 바르는 저였지만 사태가 심각하긴 했죠.
아직 못 가본 곳이 너무 많은데... 상태가 너무 심각해져 화장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고, 때문에 피부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약간의 미련이 있어야 아련하게 다시 돌아올 이유가 생기니까요.
결론적으로, 와인으로는 업을 삼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저는 와인의 맛과 향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둔감한 미각과 후각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마신 와인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멍청이거든요. 와인 수업을 듣고, 관련 단어를 번역하면서 배경 지식은 탄탄히 쌓았지만 정작 마신 와인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부족함이 실망스럽지만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을. 그래서 평생 동반자로 와인을 곁에서 즐기기로 했습니다.
불안했다.
지금은 낭만적인 여행자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백수 신세가 되니까.
여전히 내가 갈망하는 분야를 찾지 못해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귀국을 결정한 2주 전부터는 매일 하나의 회사에 지원서를 넣는 챌린지를 시작했습니다. 딱히 정해진 분야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대기업만 바라봤다면, 생각해보지 못했던 직업군을 알아보고 고민했죠. (아, 이런 일도 할 수 있겠네?!) 그래도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무, 분야는 무엇일지 직업탐색을 할 셈이죠. 원서를 넣은 곳도 정말 각양각색입니다.
(예) UN(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외국계 유니콘 기업, 스포츠 의류 회사, MICE 업체, 국내 스타트업 등...
10일 입사 지원 챌린지가 끝난 그날, 저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뭐라도 되겠지라는 다소 불안한 심정이었어요. 몇 군데서 서류 합격 통보를 받고, 면접을 봤습니다.
면접 때 패스트파이브 김대일 대표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강남역 바로 앞 으리으리한 건물의 패스트파이브 사무실로 들어선 순간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파스텔톤의 핑크와 민트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현대적인 느낌의 카페, 여기가 사무실인가.
당시 평창 동계 올림픽으로 유행했던 롱 패딩을 입은 키 큰 남자와, 베이비핑크빛 후드를 입은 남자가 저를 맞았습니다. 베이비핑크 후드가 김대일 대표님이었습니다. (대표가 이런 복장이라니?!) 전 회사에서 입듯 정장을 입고 가서인지 당황스러움에 땀이 엄청 났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패스트파이브가 어떤 회사인지도 잘 모르고 면접에 임했고 (당시는 어디든 취직하자는 생각이 컸기에)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면접이 진행될수록 뭔가 마음에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열기는 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었지만 얼마나 뜨거운지 저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신. 잘되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나 큰 소리가 아닌, 앞으로의 변화를 무수히 시뮬레이션하였기에 자신할 수 있는 확신. 여기에 입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틀 후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2017년 12월 18일 첫 출근 했습니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변에서 일하기 어떻냐고 물어보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습니다.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직업을 다 나열해도 지금 일보다 행복한 일은 없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가능한가?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라는 끝없는 질문에 답을 준 회사. 일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회사. 동료에게 영감을 받고 함께 성장해나간다는 희열을 선물해준 회사. 벌리고 싶은 기획을 실제로 실행하게 전폭적으로 믿어준 회사.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넓혀준 회사. 주말보다 평일이 기대되는 회사. 평생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회사. 내가 정말 사랑한 회사..
그게 저에게는 패스트파이브였습니다. (패스트파이브에서 한 일들) 얼마 전 아빠랑 술을 마셨는데, 그가 그러더군요. '살아 평생 대부분의 사람은 좋아하는 업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다. 네가 일하며 행복했다면 그건 정말 큰 복이다.' 대학교 합격, 대기업 입사, 그리고 유럽 와인 여행... 그 어떤 것보다 큰 성취감을 매일 안겨줬던 패스트파이브의 2년 8개월의 매 순간에 감사합니다.
▶ 패스트파이브에서 한 인터뷰 (그때는 퇴근 후의 삶만 기다렸지만 지금은 반대예요)
3년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10일 입사지원 챌린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미 합격한 곳도, 면접 보러 갈 회사도 있긴 하지만 다시 시야를 조금 더 넓혀보려고요. 그러면 언젠가 또 일이 너무나 행복한 회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글은 이번 매거진 마지막 연재입니다. 'UN에서 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해놓고 결국 UN 인턴, 대기업을 거쳐, 패스트파이브로, 그리고 그 다음... 네, 저는 UN에서 결국 정식 직원으로는 일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제게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큰 자산이자, '일하는 행복'을 선물해줬죠. 당신도 일하면서 행복한 사람이길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혹은 언젠가 저처럼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이야.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직업을 다 나열해도
지금 일보다 행복한 일은 없어.
덧. 와인은 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했지만, 조만간 와인바를 창업하게 될 듯 합니다. ^^; (본업은 아니고 사이드프로젝트로요) 조만간 좌충우돌 와인바 창업기 연재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나 자신 하고 싶은거 다해~"
운전도 못 하는 바보가 퇴직금을 밑천 삼아 떠난 ‘뚜벅뚜벅 와인 여행’. 60일간 10개국에서 마신 211종의 와인 여행 이야기. 포도밭에서 해본 인생 최초이자 최고의 도둑질과 독일 와인 포차, 이탈리아 광장에서의 노상 음주, 그리고 프랑스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받은 프로포즈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에피소드는 여기서▼
윤누리
운동과 술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석유화학회사를 때려치우고 와인 공부하다 스타트업에 정착했다. 2019년 한 해동안 1,200개 가 넘는 커뮤니티 이벤트를 개최했다. (자칭 이벤트 전문가) 창의성과 영감이 샘솟는 삶을 위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과 문장들을 수집 중이다.
(현) 백수
(전) 패스트파이브 커뮤니티 크리에이터팀
독일 UNCCD(유엔사막화 방지기구) FCMI 팀
석유화학회사 환경안전경영팀
서울대학교 과학교육, 글로벌환경경영 전공
산림청 주관, 유네스코 - DMZ 지역 산림 생태 연구 인턴
한국장학재단 홍보 대사
4-H 동시통역사, 캐나다 파견 대표
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 1기 인턴 팀장
서울대학교 국제 협력본부 학생대사 이벤트 팀장
와인 21 객원 기자, 레뱅드매일, 파이니스트 와인 수입사 홍보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