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싸이클 (Cycle)’ 카르마
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인가? 왜 악을 그릇됨이라 하는가? 인간이 선하게 사는것이 왜 필요한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제각각의 믿음이 있다.
자신이 행한 모든것들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로 되돌아 오게되는 우주의 운영 시스템을 ’카르마(Karma)‘ 한자로는 ’업보[業報]‘ 라고 한다.
현상학 적으론 발산한 에너지의 균형과 제자리를 찾기위한 단순한 물리적 파장의 반응법칙 이라고 이해해도 된다. 중력이 존재하듯 카르마 시스템도 그렇다. 안과 밖이 교차하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음양이 서로가 뒤집혀 잡아 끄는 관성의 힘에 의해 끝없이 순환한다. 카르마를 단순히 벌받는것 이라고 바라보는 유아적 관점이 있고 잘못을 수정하기 위한 재기회로 해석할수도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해서 카르마의 작동을 인정하지 않는것은 인터넷 통신이나 전기, 중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것과 같다. 눈으로 보이진 않아도 정해진 법칙대로 시스템이 작동하기에 주체 없이도 우주가 자율적으로 영원히 운행될수 있는것이다.
인간은 바로 ’도(道)‘안에서 카르마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우주의 순리에 맞게 살아 나가는 법을 배워야만 보다 진화된 신인으로써 나아갈수 있다.
영원과 연속성의 싸이클을 이해하느냐 마느냐는 신과 인간의 단편적인 구분선이 된다. 인간이 영성을 공부하고 도를 알아야 함은 카르마의 법칙을 숙지하여 사고를 내지않고 무탈하게 싸이클을 완주하는법을 배워야만 1회성 에고 의식에서 벗어날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기마다 매번 카르마 뒤처리에 매달리는 소모성 삶을 살아갈수 밖에 없다. 죽으면 끝이라는 1회성 의식인 에고가 지닌 기본성질이 그러하다.
음식을 먹었으면 가격을 치뤄야 하듯이 모든 발생된 행위에는 그에따른 계산서가 필히 주인에게 날라든다. 우주는 먹기만 하고 계산은 안 하겠다고 도망치는 행위(먹튀)를 허용하지 않는다. 마음과 그에따른 행동이 전체 에너지장에 물결처럼 무늬를 새기며 진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생각만으로 새겨진 카르마 문양을 바꿀수 없기에 망각을 통해서 반대문양을 그려내야 한다.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업보를 치뤄야만 행위에 대한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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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의 밀고당김에 의해 무한으로 돌고도는 시스템이 카르마의 근본 구조 원리다.
행성들도 돌고 은하계도 싸이클을 그리며 돈다. 싸이클이 돌고 돔에 무한의 ‘영원함’ 이 보장되는 것이다. 카르마 시스템이 멈추면 우주도 존재를 보장받지 못하는 대파국이 일어난다. (‘만유인력’ 과 중력이 사라지게 되면 어찌될까 생각해보라..)
악행은 의식을 점점 조여들어 낮은 존재로 추락시키고 선행은 점점 불어나 큰 원을 그리며 의식이 확장한다. 우주가 먹튀를 허용하지 않고 원심 분리기와 같은 합리적 정리 시스템이 작동하기에 영원이라는 개념으로 자율 운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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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는 지은바에 따라 그 결과물을 수용할때 한 사이클이 지나간다. 잘못 행한 악도 선업도 인과에 따라 돌고돌아 제자리로 찾아 온다. 운을 지혜롭게 운영 한다는 것은 복이 들어오고 나감을 조율함에 있어 가계 살림을 적절히 운영해 나가는것과 같다. 악행엔 처벌이 선행엔 그에따른 복덕이 찾아온다. 말세의 세상이 지옥 같아짐은 그만큼의 악덕이 쌓여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다에 오염수를 버리면서 살기좋은 미래를 만든다는것이 말이 안되는 모순이기에 현 인류의 파멸또한 예정된 수순이 된다.
생활속 소소한 행동들엔 그 인과가 바로 드러난다. 잘못에 대한 카르마가 돌아와 최소한으로 응보를 치루고 나면 숙제를 마친듯 후련한 마음이 들며 선업이 보답으로 돌아오면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더 뻗어나가야 하는 선업이 사이클을 돌아 결산되기 때문이다.
영혼 입장에선 악한 카르마는 치루면 빚을 갚으니 후련하고 선업은 보답 받은만큼 왠지 저축한 복을 내준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빈듯해 또 다시 선업이라는 저축을 계속 하게된다. 그렇게 덕업이 쌓일수록 인간은 보다 신성한 종으로 성장과 진화의 계단을 위로 밟아 나간다. 반면, 악업은 쌓여갈수록 인간을 동물적 존재로 퇴보 추락 시킨다. 깨달은 에고는 선행은 행하면 행할수록 마음이 하늘과 가까워짐에 더욱 부족하게 느껴지고 악행은 티끌만 떨어져도 (담배꽁초 하나 길거리에 버리려 해도) 오염됨이 신경쓰이고 찝집해 포기하게 된다.
나쁜 운이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 그것을 호연지기로 이겨낼만큼 선업으로 체력을 비축해 놓을수도 있다. 선업은 내세의 보험들듯 꾸준히 쟁겨 놓는것이 좋다.
카르마의 이해와 처리없이 영적 진보는 기존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멀리 나갔다 한들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어김없이 되돌아 와서 벌려논 일에 대한 댓가를 치뤄야만 마무리가 된다. 카르마를 무시한채 멀리 나갈수록 추락함의 절망과 공포만 이자가 불어나듯 더욱 커지게 된다. 잘못도 선행도 감출수록 싸이클이 불어나 새끼를 치며 더 크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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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깨닫고 나면 이미 육체는 쇠하였기에 카르마의 흐름을 타고 다시 새로운 육체로 순환하는 방식이 환생제도다. 잘못을 깨닫는 과정이 없으면 재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잘못을 수정할수 있는기회가 주어지게 되는데 최적의 환경과 조건을 스스로가 정한다. 잘못에 대해 벌을 받는다는 개념이 아닌 자신이 맺은 매듭을 스스로 풀고 정정할 재기회를 제공받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장애 질병의 많은 부분이 카르마로 인해 발생되는데 다스칼로스 같은 신유 성자들은 타인의 카르마를 대속해 주려고 자신의 신체까지 썩게 내주는 행위도 한다. 병자들을 살림에 있어 조금이라도 더 이승에서 남겨진 카르마를 처리하고 가라는 시간 연장의 의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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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의 개념을 모르면 마치 신이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또는 수렁으로 빠뜨리기 위해 인간을 갖고논다고 오해하기 쉽다. 전혀 그렇지 않다. 무슨짓을 하건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가 내린 결정이고 카르마의 시스템을 이해하기까지 행위를 통한 돌고도는 실험을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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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종교론 에서는 사후 천국과 지옥이 생전 예수를 믿는가 아닌가로 갈린다고 종교회의를 통해 자기들끼리 합의한 내용들을 가르치며 한번의 생에서 결판난다고 가르친다. 다른 믿음은 이단이라 칭하고 사탄이라 명칭해 적대시 한다. (물론 예수가 그런말을 한것이 아니다. ) 목사들 말 듣자면 천국과 지옥엔 태초부터 누적된 인간 영혼이 기수별로 끝도없이 쌓여있다는 말이 된다. 반면 동양 종교론은 윤회라는 시스템을 가르치며 생과사를 반복해 돌고 돈다고 가르친다.
모순을 가려내지 못함을 무지라고 한다. 수천년 내려온 성인들의 말을 따르냐 무시냐 하는것은 공짜로 제공되는 검증된 진실들을 두들겨 맞아야만 깨닫는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냐 미련과 현명함의 차이다. 어떤 사기도 백년은 넘기기 힘들기에 ‘불신 지옥’ 이라는 묻지마 교리가 만들어 지게 된다. 자신들 논리의 모순들을 따지지 말라는 입틀막 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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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를 일컫어 ‘해탈[解脫]’이라 한다. 카르마 시스템을 완벽히 이해함으로 인해 싸이클을 흘려보내고 그릇됨에 걸려들지 않게 되는것이다.
카르마를 이해함은 그릇됨을 아는것이다. 카르마의 무게를 알게되면 가장 두려운것이 죄악을 저지르는것이고 도리의 어긋남에 대해 욕망이 하라고 떠밀어도 스스로 적극 사양하게 된다. 현자들의 눈에는 깨달았다 떠벌리는 자들이 행하는 짓만 봐도 카르마의 기본구조 조차 이해하지 못함을 단박에 간파할수 있다.
카르마의 해결방법 3가지
인간이 카르마의 덫에 걸리면 상황이 끈끈이에 달라붙은 파리처럼 꼼짝 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빠져 나오려 할수록 더 조여올 뿐인지라 운좋게 저절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노력으로 풀어야 한다. 오로지 인내와 쌓아온 선업에 의지한 현명한 대처만이 고난의 시간을 최소한으로 무난히 넘길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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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인 매듭을 풀고 카르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나눌수 있다.
1). 받은만큼 돌려준다.
원한의 경우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만큼 갚아준다는 방식인데 90%의 에고들이 행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가해자로 피해자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쌍방 잘못을 깨닫기 전까지 카르마의 쳇바퀴는 끊임없이 돌고 돈다. 사회적 집단 카르마의 ‘한‘ 풀이로는 과거 남사당패 딴따라라 천시받던 예인들이 연예인으로서 우상이되고 여성들의 인권신장 운동등 역전으로 소원풀이 하는것을 ‘해원’ 이라고 한다.
2) 다시한번 상황을 재연한다.
카르마를 망각했을때 같은 상황이 반복되며 재기회를 제공한다. 빠른 시간내 카르마 해소가 가능하다. 카르마가 발생된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반대의 결과를 도출하는 방식을 사용해 정화한다.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고 2번을 선택한 현재 이 나라의 국운이 그러하다.
카르마에 의한 강박증 (폐쇄공포증,대인 기피증. 특정 공포증)은 이 방식이 가장 효과적 이기도 하다. 무의식중 물을 무서워 하는 사람에게 직접 대면하게 하고 수영을 가르쳐 극복하게 해주는 방식이다. 재도전에선 실수라는 핑계가 통하지 않으며 역량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못이룬 사랑의 집착으로 생긴 비극 같은것은 그저 사랑을 받아 들이고 이루게 하면 끝이지만 대부분 카르마들은 원한인 경우가 많아 처절 하다는 감정의 극한대를 소환하고 감당해야 한다.
3) 자력(고행)으로 카르마의 무게를 녹인다.
밀라레빠 처럼 자력수련과 반성을 통한 원점으로의 귀환 이다. 모든 카르마의 쳇바퀴에서 내려와 근원으로 복귀, 나머지 채무를 탕감받는 방법이다. 스스로 반성하고 카르마의 방식과 무게를 깨닫는 깨달음을 얻은 에고들에게만 해당되는 방식이다. 신성으로 복귀해서 남은 카르마 게임 자체를 놓아 버리는것으로 말세에만 허용된 하늘의 '탕감정책' 이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가해의식
피해의식 (트라우마)에서 자력으로 풀려나기는 비교적 쉬워도 가해 입장에서 카르마는 상대가 외부에 존재함으로 인해 자력으로만 되는것이 아닌지라 더 쉽지가 않다. 밀라레파 같이 우주만물을 장난감처럼 갖고놀던 대 마법사도 6년간을 ( 돌로 집짓고 바로 허물고를 반복하며 스승에게 죽고 싶을만큼 험난한 노예 노동과 멸시를 당하며 ) 고행을 하고 참회하고 나서야 흑마술로 사람들을 해친 카르마에서 벗어 났다고 한다.
그 이후에 행하는 오로지 쐐기풀만 먹으며 하는 고행 역시 인간모습의 테두리를 벗어나 초록색 해골 귀신형상으로 참상이 너무도 비참해 '원수마저도 보면 눈물 흘린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무덤가에서 시체 파먹으며 살았다는 파드마 삼바바 저리가라다.) 하물며 일반인들이 가해의식의 죄값에서 댓가없이 벗어 나는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도적들이 아무리 예수님 관세음 발목 붙잡고 매달려 봤자 모두가 공유하는 낮과밤을 개개인 사정에 따라 바꿔줄수는 없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하늘을 상대로 난동을 부린 댓가로 돌산에 오백년간 갖혀 지내다 불경을 전달하는 임무를 통해 그 죄값을 탕감한다.
카르마의 크기
거대한 카르마가 큰 주기로 움직일때 그 구성원 개개인의 카르마들은 집단 카르마에 휩쓸리게 된다. 지역 카르마 보다 큰것이 국가의 카르마이며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카르마가 더 우선적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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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가 돼면 개개인 카르마들을 일일히 들여다볼 여력이 되지 않는다. 집단 카르마가 우선이며 나라별, 민족별, 지역별 카르마에 작은 카르마들은 같이 쓸려 다니게 된다. 아무리 운이좋고 재벌사주라 해도 아프리카 오지 빈국에서 태어나면 기아에 허덕이게 된다. 핵폭탄 떨어지는 와중에 개개인 사주팔자 따지며 언제 돈버나 매달리고 있어 봤자다.
국운 역시 역사의 카르마를 탄다. 가장 큰 죄악이 나라 팔아먹는 죄가 되는것도 이 때문이다. 수천만 국민과 역사의 카르마를 좌지우지 해서 떠안기 때문이다. 역사가 반복되는것은 망각에 의한 작용 때문이다. 민주주의 하에선 민중의 선택이 미래의 스스로가 설 자리를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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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성의 1차적 상승 과제는 중생들끼리 치고받는 저차원 카르마의 굴레에서 벗어나 의식성장을 이루어 보다 큰 본체 싸이클에 합류하는 것이다. 에고 입장에선 닭장속 날지 못하는 닭이 다시 날개를 펼수 있음이다. 반대로 이기심에 사로 잡힐수록 유아적 싸이클에 갖히게 되며 동물적 존재로 추락하는 싸이클에 올라타게 된다.
스스로가 있을곳을 찾아 끌려가는 그것이 영원의 굴레가 운영되는 카르마의 방식이다. 개체별 생존방식과 각자의 천국 취향에 대해 우주는 아무런 상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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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고유의 주파수대를 따라 차원이 갈린다. 짐승들에게 국가에 대한 개념과 정의나 충의를 요구할수 없듯이 사람도 사람의 싸이클 궤도를 벗어나면 더이상 사람이 아닌것이다.
말세기가 바로 그런 각자 종의 갈림길이 일어나는 시간대 이다. 모두가 자신에게 맞는 제자리를 찾아가야만 우주의 혼란이 재정립된다. 카르마 없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고 고래들도 다음 세대를 준비하러 스스로 떠나는 마당이다. 인류 역시 다음 세대 진보된 지성 인류로 진화를 준비해야 할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