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튄 셔츠 대신 '작업복'을 샀다

무너진 자존감을 세우는 나만의 의식(Ritual)

by 투박한 정리

집안일은 정직하다. 닦으면 깨끗해지고, 쌓아두면 냄새가 난다.


하지만 집안일은 잔인하기도 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가 잘 나지 않는데, 잠깐만 소홀해도 집안은 금세 엉망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망가뜨린다.


설거지를 하다가 튄 거품자국, 고등어를 굽다 튄 기름얼룩, 빨래를 하다가 묻은 먼지들...


어느 날 저녁, 분주하게 밥상을 차리다 우연히 현관 거울 앞을 지나갔다. 거울 속에는 웬 중년 남자가 헐렁한 티셔츠에 정체 모를 얼룩들을 잔뜩 묻힌 채 서 있었다.


순간, 멍하니 멈춰 섰다. '초라하다.'


아이를 위해 밥을 짓고 옷을 빠는 건 숭고한 일이다.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서글픔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학 공식을 증명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깔끔한 셔츠는 어디 가고, 김치 국물 튄 티셔츠를 입은 아저씨만 남았는가.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거울 속의 나는 이렇게 보잘것없어 보일까.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앞치마를 사자."


옷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너진 자존감을 보호하고 싶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인터넷 쇼핑몰을 켰다. 검색창에 '앞치마'를 쳤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변수인가.


화면에 뜬 상품의 90%는 '꽃무늬', '레이스', '파스텔 핑크'였다. "신혼의 달콤함", "러블리 키친" 같은 문구들 사이에서 나는 또 한 번 길을 잃었다.


나는 신혼도 아니고, 러블리하지도 않은, 40대 싱글대디란 말이다!


스크롤을 한참 내리다 눈에 번쩍 뜨이는 물건을 발견했다. '바리스타용 앞치마'.


두툼한 캔버스 천, 깔끔한 베이지색. 튼튼하고 실용적이며 무엇보다... 좀 멋있어 보였다. 마치 공방에서 나무를 깎는 목수나, 커피를 내리는 전문가처럼 보일 것 같았다.


나는 주저 없이 '결제'버튼을 눌렀다.

며칠 뒤, 택배가 도착했다. 나는 티셔츠 위에 그 묵직한 앞치마를 둘렀다. 허리끈을 질끈 묶었다. 다시 거울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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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탓일 까. 더 이상 초라한 아저씨는 없었다. 대신 비장한 표정으로 '가사 노동'이라는 현장에 투입될 준비를 마친 '전문가'가 서 있었다.


그날부터 나의 부엌은 달라졌다. 기름이 튀어도, 물이 튀어도 겁나지 않았다. 오히려 앞치마에 묻은 얼룩은 치열한 노동의 훈장처럼 느껴졌다.


이 앞치마는 나에게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작업복(Workwear)'이다.


직장인이 차려입고 회사에 가듯, 학자가 가운을 입고 연구실에 들어가듯, 나는 오늘도 바리스타 앞치마를 입고 싱크대 앞으로 출근한다.


허리끈을 조이며 마음을 다잡는다.


"자, 오늘도 프로답게 밥을 지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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