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영양소의 합집합이 아니다.
아이와의 식사 시간은 언제나 크고 작은 '전쟁'이다.
아들은 편식이 심하다.
아주 어릴 적 이유식을 먹을 때부터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절대 입에 넣지 않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도 채소는 철저히 배척했고, 한국인의 소울푸드라는 김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 대가로 녀석은 늘 고질적인 변비를 달고 살아야 했다.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은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함께 피자를 시켜 먹던 날이었다.
녀석은 피자 치즈 속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양파 조각들을 기가 막힌 솜씨로 적발해 내어 접시 한쪽에 쌓아두고 있었다.
마치 외과의사가 핀셋으로 종양을 제거하듯 정교하고 집요한 손놀림이었다.
심지어 그 기술은 해가 갈수록 정교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너 진짜 이것도 못 먹으면 어떻게 해!"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낡은 문장 하나가 튀어나왔다.
"남자가 뭐든 팍팍 잘 먹어야지! 나중에 커서 어쩌려고 그래!"
보통 이쯤 화를 내면 주눅이 들거나 억지로 씹어 삼키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아들의 반응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녀석은 씹던 피자를 꿀꺽 삼키더니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못 먹을 수도 있지. 남자라고 다 잘 먹어야 해?"
순간, 말문이 막혔다.
녀석의 당돌한 대답에 화가 나기보다는, 내 머릿속으로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기 전까지 '회'를 먹지 못했다.
물컹거리는 식감과 비릿한 냄새가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학창 시절, 부모님과 횟집에 갈 때마다 나는 회가 나오기 전에 나오는 밑반찬만 먹었고, 그때마다 부모님은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사내자식이 그것도 못 먹냐? 골고루 많이 먹어야 튼튼해지지."
그 시절의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무언가 잘못된 사람 같았고, 남들 다 먹는 음식을 못 먹는 내 입 맛이 '창피한 결함'처럼 느껴졌다.
겉으로는 웃어넘겼지만, 속으로는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내 앞의 아들은 달랐다.
자신이 못 먹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취향은 취향일 뿐,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린다고 생각하지 않는 당당함.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어떤 음식을 '잘 먹느냐, 못 먹느냐' 또는 '많이 먹느냐, 적게 먹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나는 내가 어릴 적 받았던 그 억울하고 부끄러웠던 감정을, 똑같은 논리로 내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의 식습관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못 먹거나 안 먹는 음식이 있으면, 억지로 다그치는 대신 "그래, 그럴 수 있지"하고 인정해 주기로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가끔, 아니 자주 불편하긴 하다.
아들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햄버거도 먹지 않고, 김치를 먹지 않으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치볶음밥'을 함께 먹을 수도 없다.
주말 점심에 김치볶음밥이 미치도록 먹고 싶어지면, 프라이팬을 두 개 꺼내어 내 몫의 볶음밥과 아이 몫의 다른 요리를 각각 따로 만들어야 한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서로 각자 먹고 싶은 것을 따로 차려 먹는 이 과정이야말로,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부모로서 영양 불균형을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우회로를 찾았다.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기 위해, 고기반찬을 할 때 채소를 눈치채지 못할 크기로 아주 잘게 다져 넣는 일종의 '스텔스(Stealth) 작전'을 쓴다.
그래도 부족할 수 있는 비타민과 미네랄은 영양제를 통해 정확하게 보충해 준다.
영양소의 총량만 맞으면 되는 것 아닌가!
훗날 아들은 그때 아빠가 채소를 잘게 다져 넣었던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알고 보니 녀석은 아빠의 스텔스 작전마저 캐치해 내는 예민한 미각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은 편식 안 하고 골고루 잘 먹기만 했어도, 나중에 요리사를 꿈꿔도 좋았겠다!"
그리고 김치를 안 먹는 아이에게는 혼내는 대신 현실적인 조언을 건넨다.
"네가 김치 맛을 싫어하는 건 인정해. 네가 잘못된 것도 아니야. 하지만 넌 한국에 살고 있고, 단체 생활을 하다 보면 김치를 안 먹는 게 꽤 불편할 때가 올 거야. 그러니까 아주 조금씩, 먹는 도전은 해봐."
자신의 취향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일까?
영양이 중요하다는 아빠의 논리를 납득한 녀석은 매일 아침 내가 챙겨주는 영양제를 불평 없이 꿀꺽꿀꺽 잘도 삼킨다.
최근에는 돼지고기 김치찜의 김치양념이 잔뜩 밴 고기를 건져 먹으며 김치 맛에 조금씩 익숙해지려는 기특한 노력도 보여주고 있다.
식탁 위에서 치러지는 영양소와 편식의 전쟁.
이 전쟁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사랑은 영양소의 합집합이 아니다.
억지로 싫어하는 채소를 밀어 넣는 것보다, 프라이팬 두 개를 돌리더라도 아이가 웃으며 밥을 먹게 해주는 것. 그리고 스스로 한 입 먹어볼 용기를 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서툰 아빠가 차려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식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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