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대디의 부엌 철학
아내를 떠나보내고 며칠 뒤, 아이는 남겨진 상실감을 치유하기 위해 심리 상담 센터를 다녔다.
아이의 상담을 마치고 나면 선생님은 내게 아이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조심스레 전해주었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물었다고 한다.
"우리 OO 이는 엄마가 해준 음식 중에서 제일 먹고 싶은 게 있니?"
"된장찌개요."
"그래? 엄마표 된장찌개에는 뭐가 들어갔었는데?"
그러자 아이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소고기, 애호박, 팽이버섯, 두부, 양파, 감자요."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이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 10살짜리 남자아이였다.
평소에 편식도 심하고 채소라면 질색을 하던 녀석이,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 속 재료들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어른뿐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도 음식이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영양소의 결합이 아닌 누군가를 깊이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가장 본능적이고 강렬한 매개체라는 것을.
아내가 차려주는 된장찌개를 그저 "맛있다"며 받아먹기만 했던 나에게, 지상 최대의 숙제가 떨어졌다.
"엄마의 맛을 아들에게 돌려주자."
당장 마트로 달려갔다. 들어가는 재료는 아들이 읊어준 명세서(?) 덕분에 완벽했다.
된장도 아내가 쓰던 브랜드로 구입했고, 고기는 국거리라고 쓰여있는 소고기 한 팩을 집어 들었다.
어깨너머로 보았던 아내의 뒷모습을 더듬거리며 엉성하게 재료를 손질하고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요리의 세계에서 '물 조절', '간 조절'은 고등 수학보다 어려운 영역이었다.
물이 너무 많아 된장찌개가 아닌 '싱거운 된장국'이 되어 버렸다.
간을 맞추기 위해 된장을 더 풀었더니 이번엔 너무 짰다.
짠맛을 중화시키려고 다시 물을 붓고, 싱거워져서 다시 된장을 풀고......
분명 2인분을 끓이려던 나의 된장찌개는, 냄비 위로 찰랑거리는 4인분의 거대한 된장 육수가 되어 버렸다.
주방에서 끓어오르는 정체불명의 갈색 탕을 보며,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이 쉬운 찌개 하나 끓여내지 못하는 서툰 내 모습이 원망스러웠고, 주방을 채우던 아내의 능숙한 뒷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어찌어찌 겨우 간을 맞추고 식탁에 찌개를 올렸다.
아이가 국물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 그 짧은 순간,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어때? 엄마가 해준 거랑 맛이 같아?"
아이는 오물오물 씹으며 나를 쳐다보더니 살짝 웃었다.
"음... 조금 비슷한 거 같아."
객관적인 미각으로 절대 엄마의 맛일 리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빠가 땀 뻘뻘 흘리며 끓여낸 그 눈물 젖은 찌개를 군말 없이 맛있게 비워주었다.
빈 그릇을 보며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아빠가 처음이라 그래. 다음엔, 다다음엔 꼭 네가 기억하는 그 맛을 찾아줄게.'
수학을 가르쳤던 나에게 '손맛'이나 '눈대중' 같은 직관적인 요리 감각은 없었다. 대신 나에게는 분석과 기록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나는 재료의 정확한 무게(g), 물의 양(ml), 불의 세기, 재료를 넣는 순서와 끓이는 시간까지 모두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변수(Variable)를 통제하여 완벽한 상수(Constant)의 맛을 도출하기 위한 처절한 알고리즘이었다.
몇 번의 뼈아픈 실패와 수정 끝에, 마침내 아이의 입에서
"아빠! 엄마 거랑 맛이 똑같아!"
라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아내가 해주었던 음식들의 레시피를 하나하나 수학공식처럼 정립해 나갔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아이 엄마가 해주었던 웬만한 음식은 모두 마스터했다. 이제는 유튜브를 보며 나만의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기도 한다.
때로는 짜고, 때로는 싱거워 맛이 없을 때도 있지만, 아이는 투정 없이 잘 먹어준다. 그리고 입맛에 딱 맞을 때면 어김없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한다.
"역시 우리 아빠 요리가 최고야!"
그 칭찬이, 서툰 아빠의 기를 살려주려는 녀석만의 속 깊은 배려라는 것을 안다.
알면서도 씩 웃음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부엌에서 우당탕탕 요리하며 깨달은 나의 '부엌 철학'은 이렇다.
누군가를 위해 정성을 다해 재료를 썰고, 끓이고, 간을 맞추는 그 치열한 시간과 그 시간 속에 담긴 사랑은 혀끝을 넘어 먹는 이의 마음으로 정확히 전달된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비율로 만들어진 미슐랭 3 스타의 고급요리라 할지라도, 투박하지만 온 마음이 담긴 아빠의 된장찌개가 주는 울림은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언제가 아이가 훌쩍 자라 성인이 되어 독립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문득, 아들이 어릴 적 아빠가 끓여주던 그 된장찌개가 생각나 집으로 찾아오는 날이 있다면 나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내 공식(Recipe)을 꺼내어, 그때와 완전히 똑같은 맛으로 녀석의 밥상을 채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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