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빈자리를 채운 새로운 기억들

추억의 지층과 시간의 축

by 투박한 정리

아들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아빠, 예전에 우리 거기 갔을 때 진짜 웃겼잖아."

무심코 시작된 아이의 옛날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함께 웃다가, 문득 아주 낯설고도 묵직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최근 들어 아이와 "우리 예전에 이랬지..." 하며 나누는 추억의 시간적 배경이, 온통 '엄마가 떠난 이후의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이 유의미한 기억을 저장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대략 다섯 살 무렵이라고 한다면, 아이의 '의식적인 추억의 앨범'속에 남아 있는 엄마와의 시간은 5년 남짓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 시간보다 엄마 없이 아빠와 단둘이 살아온 시간이 6년으로 더 길어졌다.


아이의 머릿속에 쌓인 '추억의 지층'속에서, 두 남자가 우당탕탕 볶아대며 만들어낸 기억의 두께가 엄마와의 기억을 서서히 덮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변화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곳에서도 느껴졌다.

예전에는 먼저 챙기던 엄마의 추모공원 방문도, 이제는 내가 먼저 "이번 주말에 다녀올까?"하고 묻지 않으면 아이의 입에서 먼저 나오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렇다고 아이가 엄마를 완전히 지워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대화 속에는 여전히 엄마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이거 엄마가 좋아하던 건데.", "엄마도 이거 봤으면 웃었겠다."처럼.


다만, 그 기억이 더 이상 우리 삶을 온통 집어삼키는 무거운 슬픈 메인 테마가 아닐 뿐이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 아주 안전하고 따뜻한 배경음악처럼 깔려있고, 아이의 진짜 관심사는 오직 '현재의 친구들'과 '자신의 미래'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처음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솔직히 아빠로서 아주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이렇게 엄마의 빈자리가 아이의 일상에서 흐려지는구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더 꽉 붙잡아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알 수 없는 미안함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이 변화를 '시간의 축'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이해해 보기로 했다.

사람이 생생하게 인지하고 꺼낼 수 있는 '기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그 '기억을 담는 구간(Interval)'은 시간의 축을 따라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오른쪽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만약 아이가 과거의 상실에 묶여 그 구간이 엄마와 있었던 시절에 멈춰버렸다면 어땠을까?

아이는 몸만 자랐을 뿐, 마음은 평생 과거의 슬픔 속을 헤매는 어른으로 자랐을 것이다.


아이가 엄마 없는 삶의 추억들을 기분 좋게 이야기하고, 자신의 내일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한다는 것.

그것은 지난 6년간의 서툰 아빠가 치러낸 '오차범위 내의 고군분투'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결핍을 상처로 남겨두지 않고, 나와 함께 구워 먹은 고기, 단둘이 떠났던 여행, 접시를 깨 먹은 웃음으로 덧칠하며 아이는 스스로의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해 낸 것이다.


식사를 다하고 빈 그릇을 싱크대에 넣으며 콧노래를 부르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아빠의 키를 훌쩍 따라잡은 저 넓어진 등에는 더 이상 결핍이나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의 시간은 아주 건강하게, 그리고 눈부시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6년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3).jpg 아이의 시간은 아주 건강하게, 그리고 눈부시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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