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슈퍼맨이 (아니)야

무너지고 싶지만, 무너질 수 없는...

by 투박한 정리
"아빠는 슈퍼맨이야 얘들아 걱정 마.
위에서 짓눌러도 티 낼 수도 없고.
무섭네 세상, 도망가고 싶네.
젠장, 그래도 참고 있네 맨날."

- 싸이(PSY), <아버지> 가사 중 -


20대 시절, 노래방에서 목청껏 불렀던 이 노래가 내 삶의 BGM이 될 줄은 몰랐다.

그때의 나는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세상아 덤벼라!" 객기를 부리던 시절이었고,

영화 속 슈퍼맨처럼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30대를 지나 아들이 태어나고, 아내가 세상을 먼저 떠난 뒤.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진짜 '슈퍼맨'이 되어야 했다.


우리 집에서 아빠라는 함수(Function)를 통해 '슈퍼맨'이라는 결괏값을 얻어내려면, 내가 감당하고 대입해야 할 변수(Variable)들은 끝이 없었다.

- 가사 노동 : 아침 식사, 등교 준비, 빨래, 청소, 저녁 준비, 설거지...

- 경제 활동 : 아이 하교 전까지 끝내야 하는 업무, 생활비 마련...

- 교육 지도 : 학원 스케줄 관리, 학습 계획, 수학 문제 풀이...

- 정서적 돌봄 : 엄마의 부재가 상처가 되지 않도록, 아이를 살피는 상담가 역할...


특히 마지막 변수, '정서적 돌봄'은 나를 가장 긴장하게 했다.

가만히 돌아보니, 앞서 나열한 세 가지 변수(가사, 경제, 교육)는 결국 이 '정서적 돌봄'을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삼각대였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 주려고 요리를 했고, 기죽지 않고 배우고 싶은 걸 배우게 하려고 돈을 벌었으니까.

이 모든 것은 결국 엄마 없는 아이가 혹시라도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아이의 감정을 24시간 스캔하는 레이더가 되어야 했던 나의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밤이 되면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면서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웃으며 아이를 깨웠다.

그렇게 치열하게 몇 년을 보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너무 아이를 과잉 보호한 건 아닐까?

나의 이 조급함이 아이를 숨 막히게 한 건 아닐까?

나는 아내와 사별 직후 상담을 받았던 센터를 다시 찾아갔다.


"선생님, 우리 아이... 잘 크고 있는 걸까요?"


상담 결과는 뜻밖이었다.

아들은 애도 과정을 잘 마쳤고, 정서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인 선생님의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쿵 치고 지나갔다.


"아버님, 아들 눈에는 아빠가 '슈퍼맨'이에요. 못 하는 게 없고, 자기를 완벽하게 지켜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감보다는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먼저 밀려왔다.

아들에게 나는 슈퍼맨이구나.

나의 나약함, 도망가고 싶은 마음, 방구석에 숨어 울고 싶었던 밤들을...

나는 아이에게 들키지 않았구나.


성공이다. 그리고, 실패다.


아빠가 너무 거대한 슈퍼맨이면, 아이는 그 그늘에 가려 자립심을 잃을 수도 있다는데.

내가 짊어진 이 무거운 망토가, 어쩌면 아이가 스스로 날아오를 기회를 뺏고 있는 건 아닐까.

나름대로 아이를 케어한다고 했던 모든 노력이, 사실은 나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이제 아들은 키가 나만큼 자랐다.

녀석도 머리가 굵어졌으니, 어렴풋이 눈치챘을 것이다.

우리 아빠가 진짜로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아니라는 걸.

돈 버는 게 힘들고, 집안일에 지치고, 가끔은 소주 한 잔에 기대어 한숨 쉬는 평범한 중년 남자라는 걸.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욕심을 부린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그저 '힘든 홀아비'로 보일지라도,

최소한 내 아들에게만큼은, 영원히 슈퍼맨이고 싶다.


오늘 밤도 곤히 잠든 아이의 방문을 살며시 연다.

이불을 고쳐 덮어주며,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아주 작게 속삭여본다.


"사실 아빠는... 슈퍼맨이 아니야."


하지만 내일 아침이 오면, 나는 또다시 무거운 망토를 고쳐 매고 부엌으로 나갈 것이다.

무너지고 싶지만 무너질 수 없는, 나는 아빠니까.

KakaoTalk_20251225_013943704.jpg "슈퍼맨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래도 너에게 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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