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이 상처가 되는 순간들에 대하여
1월 1일.
새로운 달력의 첫 장을 보며 사람들은 새해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이 들뜬 분위기 속에서 홀로 묘한 긴장감을 느낀다.
아이의 학년은 끝났다.
그 말은 곧, 익숙해진 담임 선생님, 아이를 이해해 주던 친구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다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하는 ‘3월의 리셋(Reset)’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새 학년, 새 반, 새 친구. 남들에게는 설렘일 이 단어들이 내게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Variable)로 다가온다.
특히, 내가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변수는 다름 아닌 ‘새 담임 선생님’이다.
나는 3월이 되면 또다시 고해성사를 하듯 아이의 상황을 브리핑해야 할 것이다.
"아이가 엄마와 일찍 헤어졌습니다."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명확하다. 아이에게 필요한 ‘관심’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관심이 도를 지나쳐 ‘동정’이나 ‘애잔함’이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가장 두려운 건 인과관계의 오류다.
아이가 친구와 다투거나 숙제를 안 해 갔을 때, 그 원인이 행여나 ‘엄마의 부재’로 귀결될까 봐.
"역시 엄마가 없어서..."
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게 하려고, 나는 다가올 3월의 살얼음판을 미리 걱정한다.
벌써 아이가 들고 올 가정통신문 뭉치가 그려진다.
그중 나를 가장 멈칫하게 만들 서류... <가정환경조사서>
아직 새 학년의 통신문을 받은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는 그 양식이 사진처럼 박혀있다.
식탁에 앉아 아이와 함께 인적 사항을 적어 내려가는 상상을 한다.
펜 끝이 어디에서 멈출지, 그 순간 우리 부자(父子)만 느낄 수 있는 잠깐의 정적과 어색한 공기의 흐름까지...
나는 시나리오를 읽는 배우처럼 이미 알고 있다.
주소, 전화번호, 비상연락망...
펜 끝은 거침없이 움직이다가 딱 한 곳에서 멈출 것이다.
‘가족 관계’ 란.
친절하게도, 너무나 친절하게도.
그 칸에는 [ 아버지 : ], [ 어머니 : ]라고 미리 인쇄가 되어 있을 테니까.
빈 칸이라면 그냥 내 이름만 적으면 될 텐데. 이미 ‘어머니’라고 박혀있는 저 글자는, 내 펜으로 채울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는 ‘부재의 증명’처럼 느껴진다.
교사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나도 3월이면 습관처럼 이 종이를 걷었다.
그때의 나는 저 칸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던가?
그저 빈 칸이 없나 검토하기 바쁜 행정 서류일 뿐이었다.
보내는 입장에서 받는 입장이 되어보니, 비로소 그 종이의 무게가 다름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빠, 여기 엄마 칸은 어떻게 해?"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는 아이의 목소리가 벌써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때가 오면 나는 또다시 덤덤한 척 연기를 해야겠지.
"응, 거기는 그냥 비워두면 되지. 우리 가족은 아빠랑 너, 이렇게 둘이니까."
우리는 아빠 칸에 내 이름을 꾹꾹 눌러쓰고, 엄마 칸은 하얀 공란으로 남겨둘 것이다.
그 하얀 여백이 유난히 시리게 보이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여전히 ‘부모의 존재’, ‘엄마의 케어’를 기본값(Default Value)으로 설정해 두고 시스템을 돌린다.
수학에서 정의되지 않은 값은 ‘오류’가 되지만, 우리 삶은 오류가 아니다. 다만 그 형태가 조금 다를 뿐이다.
새해의 첫날.
남들은 마음을 새해의 희망으로 채우지만, 나는 조용히 다가올 봄을 대비해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
언젠가는 저 서류의 양식이 [ 보호자 1 ], [ 보호자 2 ]처럼 조금 더 유연해져서, 아이들이 빈칸 앞에서 멈칫거리지 않고, 자신의 가족을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적어낼 수 있는 3월이 오기를.
나는 새해에도 변함없이, 이름 없는 빈 칸 하나를 제출할 것이다.
그것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더 꽉 채워 사랑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증명서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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