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말을 걸어 글로 쓰는 이야기
서울의 봄이 1,200만 명을 돌파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배우나 감독을 모두 좋아했고, 감독의 변신도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떠한 역사책보다 현대사를 제대로 조망했고, 어떠한 언론사보다 지금의 정치 구도의 저변을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시민들의 영화 관람이 반가웠습니다.
이런 생각은 저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정치성향을 조금 더 분명히 하면, 저는 국힘당을 보수로 분류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책 중심의 당이었던 적이 없고, 권력 장악을 위해서는 변화무쌍하게 색깔을 바꿨습니다. 현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향수 내지는 정체가 강하게 묻어납니다. 그러한 점에서 국힘당은 쿠데타로 시작한 정당을 이어가는 권위주의 세력이라고 봅니다.
여하튼 국힘이 집권하면 너무나도 성실하게 자신들이나 자신들이 보호하는 특권층을 위한 정책 아닌 정책을 성실하게 이행합니다. <나는 꼼수다>를 들을 때 비로소 이를 알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MB 개인의 욕망이나 특징으로 오해했습니다. 지금 보면 권위주의 세력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을 바탕에 두고 있으니 인스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1]
지난 2021년 별세하실 때 이르러서야 '시대의 어른'이라는 칭호와 함께 그분의 이름과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의 메시지가 2024년 벽두에 저에게 전달된 것은 우연 치고는 너무 묘했습니다.
아무튼 편집된 채현국 님의 말씀이 총체적으로 나에게 말하는 바는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는가?
불황과 함께 경영 미숙으로 맞이한 작년의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담담한 질문은 아니었고, 쪼그라드는 마음과 걱정을 가까스로 다스리면 어떤 질문 같은 것이 나왔는데 대략 다음과 비슷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가?
다행한 일은 피하지 않고, 직면(直面) 아니 마주했더니[2] 내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저의 직업사도 조금 바뀌어 갈 것입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채현국 어른의 말씀을 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 경험과 연결할 수 있는 포기말[3]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이해관계자의 욕망은 모른 채로 혁신 프로젝트를 리드하던 때, 만 4년을 채운 다음에야 멈추고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상식'이니까 그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당시의 시각을 극복하고 욕망이 작동하는 혁신의 맥락을 이해하고 쓴 글이 <디지털전환기의 오너와 리더>입니다.
하지만, 깨닫고 나서도 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미련인지 어리석음인지.
차세대 프로젝트라는 관행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에 글을 쓰는 행위
기업들의 자기 인식을 높일 것을 기대했던 기술 부채 관련 발표
그러나 인스타 추천으로 만난 '실수가 내 인생을 최선의 순간으로 이끌었다'는 말은 꾸역꾸역 사는 일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인생의 길이란 용기를 줍니다.
타고난 성격이 경쟁을 좋아하지 않고, 욕심이 없어 채현국 어르신 말 대로 저는 '보편적인 삶'을 살 팔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4]
거의 2년 전에 썼던 <꾸역꾸역과 아기발걸음과 게으름 극복에 대한 이야기>에서 어렴풋하게 깨달은 교훈을 이제는 저의 말로 풀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부지런해지기 위한 방법들을 그간 익혔습니다. 이를 활용하여 올해는 자신만의 신념 그러니까 줏대를 지켜나가겠습니다.
<야신이 말해 주는 자신만의 길>을 쓸 때 981개였는데, 어느덧 1,000개가 되었습니다.
아들이 1,000개가 되어 가는 숫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뜻을 알 리가 없을 텐데. 아무튼 그래서 999개가 되었을 때 보여주었더니 '지금 1,000개 올려요'라고 해서, 그 말을 따라 이 글을 1,000번째로 올립니다.
[1] 테크 자이언트들의 추천 알고리즘은 정말 놀랍습니다.
[2] 굳이 뜻이 같은 두 가지 표현을 병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주해야 보인다, 본 것에 마음이 가면 녀긴다>를 쓰기 전까지는 아직 '마주한다'의 바탕을 또렷하게 알지 못했는데, 이제 조금 깨달았다는 점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3]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사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그래머의 미래는 어둡다는 주의의 만류에 한 10년 동안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가슴속에 '분노'가 집힌 강한 열망이 있었죠. 하지만, 막상 프로그래머가 되고 해당 분야 전문가가 된 이후에는 그때 같은 열망은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