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따져서 풀어보는 한국말
새해를 시작하는 날 최봉영 선생님께서 페북에 올리신 《말과 말소리》를 계기로 게을리했던 한국말 묻따풀을 재개[1]합니다.
최봉영 선생님이 순번과 함께 이름을 붙였습니다.
1. 사람이 말을 만들어 씀
01부터 14까지 그 아래 쓰신 내용들을 묶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아직 페북 글에는 2.번이 없어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간 묻따풀해 온 탄력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하라리 덕분에 '사피엔스'를 그저 교과서에서 외웠던 단어가 아닌 나와 연결되는 인류의 총체로 인식하게 된 것의 연장이기도 하죠. 특히, 다음에 인용한 최봉영 선생님의 말씀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의 인문학은 100년 넘게 이어져온 범범한 계몽의 시대를 넘어서, 무엇이든 야무지게 파고들어 끝을 맺어가는 탐구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관적 느낌일 뿐이지만, 그저 외국의 지식을 '선진'이라 부르며 따라가는 데에만 급급했던 한국 100년의 인문학 규정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제 하라리처럼 우리도 '야무지게' 파고들자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사람이 말을 만들어 쓴다는 것'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가장 먼저 박문호 박사님께 배운 지식이 떠오릅니다. 바로 3년 전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기>를 쓰며 인지한 현상(現象)에서 시작합니다.
박문호 박사님 강의를 듣기 전까지는 현상이 현실 자체를 '그대로' 인식한다고 믿었다고 하겠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가 현상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하겠습니다. 다행히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기>를 쓸 즈음에 지인들을 거울삼아 과거의 제 상태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각자 고유의 현상적 세계가 존재하고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멘털 모델'의 놓이는 위치에 대해 생각이 미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전제로 하면 각자가 보는 그 현상을 담는 도구가 말과 말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해 두고 다시 최봉영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갑니다.
01.
사람은 말을 만들어 쓰게 되자, 무엇이든 불러내어 온갖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이든 불러내어' 앞에 '현상적 세계에서'가 생략된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프로그래머 출신인 저는 (저도 모르게) 컴퓨터가 메모리 상에 자료나 프로그램을 올리는 행위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자료나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단위와 이들이 관계 맺는 규칙들을 아우르는 총체를 '말'이라 하겠습니다. 처음 해보는 생소한 주제를 두고 나름대로 '야무지게' 따져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현상적 세계에서 꺼낸다고 하여 반드시 '현재 존재하는' 대상이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상상하며 현상적 세계에서 꺼내는 수많은 기억은 과거 모습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팩트풀니스> 저자 덕분에 거의 모든 인간은 지독한 편향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무엇이든 불러내어 펼치는 온갖 생각'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강화시켜 준 두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인용한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기>에 있는 박문호 박사님의 강조 이미지이고요. 두 번째는 재작년에 쓴 <같은 현상도 서로 다른 일로 인식할 수 있으니 차리기> 묻따풀에 인용했던 이미지입니다.
당시 박문호 박상님은 현상적 세계는 물리적 세계가 아니니 모든 것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각자의 생각은 과학과 같이 엄밀하지 않으니 해석의 여지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소모적인 논쟁의 이유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저 말을 들을 때 그간 경험했던 수많은 소모적 논쟁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 결혼한 부부라면 대부분 경험적으로 잘 알 텐데, 일상 대화에서는 그렇게 아는 바를 바탕으로 실천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
다음 구절은 5년이 넘는 묻따풀 기간 덕분에 익숙한 내용입니다.
02.
사람은 무엇을 말로 불러내어 온갖 생각을 펼치게 되자, 몸으로 겪어볼 수 없는 것까지 아는 일의 대상으로 삼아서 앎의 세계를 끝없이 넓히고자 했다. 사람은 무엇을 알아보고, 알아듣고, 알아채고, 알아먹고, 알아차리고, 알아내고, 알아두고, 알아주고, 알아하는 일에서 크게 뛰어나게 되었다. 사람은 말로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됨으로써 ‘똑똑한 사람(Homo sapiens)’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앞서 현상에 대해 따져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펼쳐 보려 합니다. 근래에 <고백의 언어들>에서 다음 구절을 읽을 때 최봉영 선생님이 '앎'을 따지셨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을 거치면서 '나'라고 하는 정체성을 만들어 갑니다. 그것을 알에 비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과 입장, 이데올로기, 세계관이 바로 설 때 주체적 삶이 가능합니다. 알은 나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입니다. 알은 냉혹한 세상살이에 지칠 때 돌아가 쉴 수 있는 둥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알 속에만 머무르면 안 됩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알'의 비유의 대상을 썼지만, '알'이라는 말소리가 어쩐지 최봉영 선생님이 '아는 일'과 '앎'을 따지던 일과 직접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찾아보니 '낱으로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알'이 있었습니다.
한국말에서 '알다'는 '알'과 뿌리를 같이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알은 낱알, 씨알, 알짜, 알맹이 따위에서 볼 수 있듯이 낱으로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알다'는 임자가 낱으로 있는 어떤 것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것의 겉이나 속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자연스럽게 재작년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에서 학습한 내용을 복습합니다.
첫째, 사람은 어떤 것이 겉과 속을 가진 하나의 알로서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알은 겉과 속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사람은 알을 보고, 듣고, 만지는 따위의 대상으로 마주하게 된다.
위 문장에 따르면 겉과 속이 같은지 다른 지도 파악해야 하는군요.
한국인은 어떤 겉과 속을 가진 하나의 알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아름이라고 불렀다.
자주 듣지만 뜻은 여전히 낯선 '아름'입니다.
둘째, 사람은 대상으로 마주하고 있는 알이 알맹이를 가지고 있는 알짜임을 안다. 사람은 알짜가 가지고 있는 알맹이를 알아감으로써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앎을 갖게 된다.
여기에 우리의 느낌까지 더하여 앎을 형성합니다.
사람이 느낌이 비롯하는 바탕에 대한 앎을 만들어가는 것은 무엇이,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앎으로 드러난다.
[1]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으로 한자사전을 찾습니다.
(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1. 차려진 바람과 막연한 바람 그리고 바람의 시각화
12. 한국말 차림의 뼈대는 S+O+V, 영어는 S+V+O
13. 섬을 보며 서다를 말하고, 감을 보며 가다를 말하다
14. 함께 써야 말이 되는 이치 그리고 씨말을 따져 보는 일
16. 지식과 정보의 바탕에 놓인 줏대, 감정, 지식, 성향
18. 차림의 의미를 따지기 위해 지난 기록을 추려 보다
19. 내가 가진 역량과 욕망과 여건이 결합하는 성취(成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