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따져서 풀어보는 한국말
함께 <한국사람에게 oo은 무엇인가>를 읽은 '학문의 벗' 호성 님의 페북 글에서 다음 포기말[1]은 마치 제가 한 말 같았습니다. 이 글을 쓰며 왜 그렇게 느꼈는지 돌아보고 말을 차려 쓰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차린다는 것은 Arrangement이다
사실 최봉영 선생님을 알기 전에는 '차리다'라는 말은 '정신 차려', '밥을 차리다' 따위의 몇 가지 관용 표현에서 아주 드물게 쓰는 말이었고, 돌아보면 뜻을 또렷이 차리지(?) 않고 쓰던 말이었습니다. 아마 최봉영 선생님과 첫 통화로 기억하는데 '차리다'의 풍부한 쓰임을 듣고 깜짝 놀랐던 느낌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차리다'를 두고 묻고 따져 본 기록을 찾아봅니다. 가깝게는 작년 기록이 있습니다. 제목이 <차리다에서 알고리듬으로 나아간 나의 기록>입니다. 제가 쓰는 연재 중에 <내 일상을 차릴 알고리듬>이 있습니다. 일상을 차리고 싶은데, 차리기 위한 수단을 알고리듬이라고 불러온 것이겠죠?[2]
당시 제가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가 이름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는데요. 바로 '임자가 되기 위한 축적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억 속에 있던 21년 최봉영 선생님과 통화 흔적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23년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제목은 <한국사람이 임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21년부터 2년 년 동안 인용해 온 바로 아래 그림이 달리 보이는 순간입니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양상과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이 모두 나에게 펼쳐진 것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실제로 감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환경과 상황 그리고 기억과 느낌으로 인해 실제와 다른 편향된 혹은 주관적인 인식이 될 수 있음을 그림이 나타낸다 하겠습니다.
22년에도 <차려서 사는 임자의 사는 얘기>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 차린다'라는 생각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과 사는 이야기의 연관성을 따져 물으며 지인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쭉 훑어보다가 문득 '이때, 이곳'에서 부딪히는 어떤 문제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나서 묻고 따진 과정이 생각과 행동에 반영하는 일이 '차리다'의 입체적 양상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한 가지 고려할 축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이죠. 작년에 쓴 글에 '상대를 헤아리는 대화 기술'이라는 다발말[3]이 있습니다. 나와 마주한 상대를 인식하는 일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는 종류가 다른 일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박문호 박사님은 내 인식이 사실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감정에 해당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의미를 부여한 것인지 꼬리표를 붙여 보라고 조언합니다.
상대를 헤아리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상대 이전에 '나도 알 수 없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23년에 쓴 <살림살이와 나도 알 수 없는 마음>을 보면 최봉영 선생님이 그린 마음과 인식의 관계가 있습니다.
간단한 포기말로 이뤄진 다음 말의 의미를 따져 보다가 어느새 지난 3년 여 시간 동안 '차리다'를 가운데 두고 펼친 제 생각의 기록을 돌아보았습니다.
차린다는 것은 Arrangement이다
이를 바탕에 두고 차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따져 보는 글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제가 지은 표현이지만,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이 부족했음을 여기서 확인합니다.
[3]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단락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1. 차려진 바람과 막연한 바람 그리고 바람의 시각화
12. 한국말 차림의 뼈대는 S+O+V, 영어는 S+V+O
13. 섬을 보며 서다를 말하고, 감을 보며 가다를 말하다
14. 함께 써야 말이 되는 이치 그리고 씨말을 따져 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