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30
마침 <생각이 아닌 마음을 믿는 훈련> 편을 올린 날 공교롭게 시골 농부 김영식 님의 글을 읽었다. 그냥 넘길 수가 없어 글을 쓴다.
'살림살이'라는 표현은 나에게 최봉영 선생님께 배운 '차리다' 개념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차리다'로 내 글을 검색해 찾은 <차려서 사는 임자의 사는 얘기>편에서 '임자로 살기'란 표현과 함께 최봉영 선생님의 글을 다시 발견했다.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 풀어서 알게 되면, 그것을 꿰어서 차리는 일로 나아가게 된다.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것을 꿰어서 차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는 '살림살이'가 최봉영 선생님의 문장과 의미가 서로 통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다음 문단을 읽는 순간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을 겪은 사람이 이후의 시간을 겪으면서 전과 후가 [저절로] 변화되는 것은 그의 바뀐 가치체계 때문이다. 가치체계는 의미기억이 아니라 절차기억이다. 가치체계는 닥쳐온 자극에 대하여 의식적인 노력으로 비교하며 계산하거나, 정의된 개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과 무관하게 자동 대응한다. 그러므로 가치체계는 운동 능력이나 악기의 연주 기술처럼 신경망에 새겨지는 자동화 알고리즘이다.
과연 내가 깨달음을 겪은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전 글을 다시 읽으며 다른 가치 체계를 따르기 시작한 시기를 깨달음을 겪은 것으로 가정했다. 그리고, 다시 시골 농부님의 글을 읽는다.
올해 초에 최봉영 선생님께 받은 도식이 있었는데 단박에 읽히지가 않아 묻어 두고 있다가 선생님을 뵙게 된 날 말씀을 하셔서 다시 꺼내 보았다. 우선 아래 글을 읽고 도식을 보면 와닿는 부분이 분명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가치체계를 살림살이 또는 이해자량이라고 한다. 그것은 개념들 간의 연관 구조를 새롭게 형성하고 흔들리지 않게 결속시킨 것이다. 이런 과정을 신념화 또는 세뇌라고도 한다. 물론, 이런 과정은 체득된 경험에 기반하는 것이지 정보의 추가 또는 변화나 논리의 발전으로 가능하지 않다.
아래 그림의 제목이 불분명하게 느껴졌는데, 살림살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물론, 그림은 나를 둘러싼 네 개의 서로 다른 영역과 상호작용을 표현하고 있지만, '살림살이'라는 가치 체계의 바탕으로 보아도 좋을 듯해 보였다.
특히, 인용한 표현 중에 마지막 문장은 살림살이의 원천이 마음에 있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이런 과정은 체득된 경험에 기반하는 것이지 정보의 추가 또는 변화나 논리의 발전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최봉영 선생님이 이 그림을 거론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나도 알 수 없는 마음'을 드러내어 살아내는 것이 나다운 살림살이인 듯 하단 생각이 번쩍 스쳤다.
시골 농부님의 글을 계속 읽어 보자.
이 가치체계는 깨달은 후에 많은 시간을 겪으며 저절로 생성되기는 하지만, 현대처럼 급변하며, 폭포수 같이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는 환경에서는 의도적인 노력을 통하여 구축할 필요가 있다. 깨닫고 나서 퇴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깨닫고 난 뒤에도 이전의 자기 가치체계를 대충 그대로 사용하거나, 남의 말(경전이나 스승들에게 들은 말)을 자기의 경계로 검증하지 않고 자신의 절차기억으로 새겨 쓰기 때문이다.
시골 농부님의 표현을 빌면 신념화 혹은 세뇌가 살림살이에 의해서 되지 않으면, 외부의 가치체계로 세뇌되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욕쟁이 예수>의 박총 님 표현도 활용할 수 있는데 '내 경험 속에 내가 현존'해야 살림살이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에 휩쓸려 다른 이들의 의도를 따라갈 가능성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뒤이은 문단은 살림살이의 필요성으로 읽힌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경계와 그것을 표현하는 자기의 말 사이에 엉키는 부분이 발생하고 그런 상태로 일상을 살아가면서 혼란이 고착화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을 날카롭게 들여다보며 인과를 해석하는 능력이 뭉뚱그려지게 되므로 경험의 깊이를 견인하는 힘이 약하여 깨달음의 광채가 사라진다.
그리고 근거는 아직 미약하지만, '내 경험 속에 내가 현존'하면 '나도 알 수 없는 마음'을 드려다 보는 일에 더 시간을 쏟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데 마음을 쓸 시간에 마음에 시간을 쏟는다면 당연한 이치 아닌가? '기회비용'이란 개념을 적용한 이치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1) 몸으로 드러내거나 (2) 말로 혹은 (3) 몸과 말로 드러내다 보면 나도 알 수 없는 마음을 조금씩 더 알아가고 그 과정 자체가 삶이 될 수도 있겠다.
4.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
10. 주체와 객체 그리고 아기발걸음
11. 홀로서기와 따로 또 같이
13. 생각의 노예가 아닌 주인 되기
14. 사고지능의 한계와 자연의 특징
15. 쪽인 나와 무아론
17. '나'와 무아無我의 공존
24. 생각 걷어차기와 과학적 태도
27. 고통스러움과 두려움 없는 삶
29. 생각이 아닌 마음을 믿는 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