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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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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에 관심 없는데 어느새 돌 색깔이 왜 다른지 궁금하다. 단층이 켜켜히 쌓인 저 바위는 얼마나 됐을까. 물길의 흔적이 보이는데 왜 못은 작을까. 저 들꽃은 어떻게 바위 틈에서 자랄까. 알고 싶은게 점점 많아진다. 아침의 빛이 저런 그림자를 만들다니 해가 질 때는 어떨까? 왜 저기에만 운무가 있지? 상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니. 이건 사랑이다. 나도 모르게 돌로미티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역시 오늘은 drei zinnen 트레킹에 도전하는 게 아닐 지 추측. (너무 부러워서 턱이 안 다물어져요)"

내게 돌로미티라는 이름을 처음 각인시켜줬던 ㅇㅎㅇ님이 최근 내 포스팅에 댓글을 달아주셨다. 설마 했더니 역시나 오늘 가는 tre cime 를 독일어로 하면 drei zinnen 이다. 세개의 top. 와, 짐작할 수 있는 빤한 코스구나. 그러나 여행자는 알고 있다. 다들 아는 빤한 곳이 역시 좋다는 걸.
주차장에 자리 없으면 곤란하다고 해서 아침부터 서둘렀다. 숙소에서 20~30분 거리. 주차장에 30유로를 내고 입장하고 보니 오전 7시30분이다. 첫인상은 이랬다. 순간 숨이 멎을만큼 멋지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주차장 입구는 해발 2300m 즈음이라 추정한다. 지리산 능선도 절경이겠지만, 나처럼 산을 겁내는 이는 어렵다. 이런 풍경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 사진 정리하면서 알았지만 오늘 만끽한 자연은 도저히 사진으로 담을 수 없다. 저 풍경의 100배 정도 좋았다.


트레 치메, 세 개의 봉우리라더니 이런 절경이? 오른쪽에 저런 절경이 펼쳐진다면 왼쪽은 이렇다. 미리 강조하지만.. 트레 치메, 드라이 찐넨에 온다면.. 반드시 101번 길을 먼저 도전하시라. 이게 그 길이다. 101번 먼저, 돌아오는 길은 105번.. 기억해두시는 편이 좋다.


아직 세 개의 봉우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왼쪽에 거대한 석벽이 있는데, 알고보니 그게 트레 치메의 일부였다. 대신 오른쪽 절경의 색깔이 달라진다. 어느새 초록이 가득하고, 들꽃이 한창이다. 이 찐한 사진은 연의 것을 빌려왔다. (갤럭시가 아이폰보다 색감은 좋다)


초록을 뭉개고 넓게 보면 이런 풍경이다. 사진으론 아쉽다. 숙연해지는 순간을 표현할 능력이 안된다.


길을 따라 가다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이거였구나 싶은 모습이 보인다.


왼쪽에 벽처럼 보이던 돌산은 어느새 세 개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다. 트레치메를 눈높이에서 보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


우리는 101번에 이어 돌아가는 길로 105번을 택했다. 맞은편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나는 아래로 내려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기껏 확보한 고도를 낮추면 올라가는게 힘드니까. 가는 길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오르락내리락 했다. 괜찮았다. 하지만 2400m 트레 치메 고지를 찍고 난 뒤가 문제였다. 설마 했는데 내리막길이다.


까마득하게 보였던 협곡 바닥까지, 끝까지 내려가는 길인줄 알았으면 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온 길 그대로 돌아가도 괜찮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 이어지는지 몰랐다.

내 인생 모토가 모퉁이 너머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르는게 재미있지 않냐는 거다. 원대한 목표를 정한게 아니라 열심히 살다보면 그 다음에 어떤 도전이 기다려도 할 수 있겠거니,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모퉁이 너머 뭐가 나올지 모르는 설레임이, 때로 복병을 만난다는 걸 알았다. 그 깊은 협곡을 다 내려오다니..아래 사진에 보면 트레치메 봉우리가 저 위에 빼꼼 모습을 보인다. 원래 옆에서 보던 거다. 길은 바닥으로 이어진다.


협곡의 아래쪽은 이렇게 녹색 평원이다. 사방이 바위다.


우리는 101 길을 따라 트레치메 포스트까지 가서 실컷  봉우리를 감상했다. 막판에 오르막이 있지만 아주 힘들지 않다. 돌아가는 105 길은 일단 협곡 바닥까지 간다. 오르막도 힘들지만 내리막길이 엄청 가파르다. 105번부터  경우, 고생길이란 얘기다. 105 올라가는 길은  저질엔진으로는 헉헉... 그런데 나만 그런게 아니란게 위안이 된다.  강아지는 지친 눈빛으로 주인 품에 안겨 오르고 있더라. 정말 많은 개들을 만났는데 침을 흘리며 힘들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나마 쟤는 덩치가 작아서 주인 덕을 봤고.. 능선에서 주인과 쉬고 있더라. 몹시 귀엽긴 했다. 혼자 걷기도 슴차는데 저 주인도 상대를 사랑하는구나.


오전 7시30분부터 올랐는데.. 12시쯤 세번째 산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첫 산장은 출발점에 있고, 두번째는 문을 닫아 커피 한 잔 기대가 무산됐다. 세번째 산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덤플링이라는데 약간 동그랑땡 맛. 사우어크래프트, 양배추 절임이 훌륭했다. 연은 맥주를,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살 것 같더라. 파스타와 덤플링, 햄치즈 플레이트에 네 명의 마실것 까지 55유로. 사람 구경, 그들이 데리고 온 개 구경, 풍경 구경.. 무엇보다 잠시 쉬었다.


우리 일행은  명이지만 속도가 각자 달랐다. 나는 곧잘 걷지만 오르막에 몹시 약하다. 등반 욕구 전혀 없는 인간이다. 빈은 몽블랑을 걸었던 산악인이다. 우리는 오늘 2만보 정도 걸었고 85층을 올랐다고 앱이 알려줬다. 피렌체에서 탑을  개나 올랐을 때가 63층인데...트레치메는 평지 트래킹이라더니. 무튼 쉬는게 오히려 힘들어서 계속 걷는 이도 있고, 쉬엄쉬엄 걸어야만 하는 이도 있다. 속도가 다른 이와 발맞춰 걷는게 무엇인지 오늘 배웠다. 나는 그동안 미친듯이 열심히 달리는 인생을 살았구나. 천천히 걸으면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온다. 속도가 다른 이와 걸으면 호흡을 맞추려는 마음이 들고, 그건 또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이런걸 예전엔 몰랐구나.


협곡 바닥까지 가는 길이  안보여서 도전했듯, 길이 보이면 마음은 준비를 한다. ,  오르막 버텨야겠구나, 내리막이라 다행이구나,  그런 준비. 나의 저질 엔진이 터질  같은 무렵, 트레치메를 에둘러 가는 길이 평탄했다.  멀리 보이는 길에 안심했다. 어차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다시 올라가게 마련이다. 아주 작은 일부가 평탄해 보인다고 안심하는 내가 간사하게 느껴졌다. 모퉁이 너머 뭐가 나올지 모르는 설레임 대신 당장  앞의 길이 쉽다는 것에 좋아했구나.  너머 길이 힘든지 쉬운지 모르는게 불안하고 막막하다니, 몰라서 설레인다, 흥미진진하다, 인생 재미다, 떠들던  뭐란 말이냐. 어차피 힘든 길이라도  다음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있는 길로 이어지거늘.. 바닥으로만 가는 길은 없거늘. 길은 그낭 가면 된다. 호흡 가다듬으며, 천천히.


오르막을 또 한 고비 넘었더니 갑자기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가 트레치메란 이름이 붙어서 그렇지, 사실 가장 아름다웠다. 주인공은 여기였단 말인가? 왼쪽의 바위는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며 모여있었다. 저 멀리 능선은 미지의 아스라함을 보여줬고, 오른쪽의 돌산.. 앞쪽의 평원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맘 같아서는 저 평원을 달려가보고도 싶지만.. 이때쯤은 거의 말미. 체력 소진... 그래도 걷는 길은 가슴이 쿵쾅댈 정도로 멋졌다.


윗 사진 왼쪽 돌산은 이렇다..


정말 허탈하게도.. 아름다운 절경에 취해서 걷다보면 갑자기 주차장이 나온다. 길 떠난지 6시간. 중간에 쉬엄쉬엄 밥도 먹고 했어도 꽤 괜찮고 빡센 길.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누워버렸다. 꽃들에게 미안. 하지만 이쯤에선 뻗어줘야지. 와중에 포즈를 취하는 빈, 멀쩡하구나.

얇은 가디건, 바람막이, 후드자켓까지 옷 세벌을 다 챙겨입고 시작해서 중간에 하나씩 다 벗고 민소매 차림으로 걸었다. 돌길이라 밑창 두꺼운 등산화가 부러웠지만 운동화로 가지 못할 길은 아니다. 운동화가 작은 자갈길에 미끄러워 한 번 엉덩방아를 찧긴 했지만 괜찮다.


빈은 매번 뛴다. 멋지다. 이것도 평소 트레이닝이 필요한...


돌아가는 길, 마지막에 점처럼 보이던 호수에 잠시 들렸다. 지쳐서 그냥 보는 걸로 만족. 까맣게 빛나는 털의 오리가 유유히 지나갔다. 미친듯이 발놀림을 하며, 목을 으쓱으쓱 흔들며 온 힘을 다하고 있더라.

 

숙소에 돌아와 빨래를 하고 뻗었다. 일정에 더 쫓기지. 않는 여행자의 낮잠은 달콤하다.

저녁은 와인 세 병에 온갖 음식까지 43유로에 장을 봤다. 9유로 와인 평점이 4.3 이라 괜히 신났고.. 간만에 계란 요리도 해보고..파프리카 절임과 정어리 절임, 올리브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장 봐서 이런 #마냐밥상 차리는데 요즘 5분인데 오늘은 10분? 독일 분위기의 동네라 살라미 대신 소세지도 샀다. 뭔들.


대화가 깊었다.. 깊었다.. 덕분에 오늘 여행 기록을 남기지 못할 . 그래도 다들 잠든 밤에 마감을 한다. 사진 고르는게 힘들지, 글쓰는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이다. 남기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할까봐  부실한 메모리를 위해 쓴다. 여행에서 얻은건  자체로 충만하지만, 그래도 나는 기록한다. 오늘 깊고 깊은 대화는 기록 대신 그냥 마음에 담을테다. 우리는 모두  살았다. 애썼다. 괜찮다. 사랑한다. #취중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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