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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Nov 07. 2022

단칸방의 추억

기억 속 내 이야기




철마다 맨드라미가 피었던 울산시 동동 347번지 에서의 2년은 외로웠던 유년 기억 끝에 희미하게 달린 행복한 시절이었다. 수면 밑으로 곪아가는 위태로운 가족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가장 평범한 가족의 모습으로 사랑받은 기억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락이 딸린 단칸방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건 텔레비전이었다. 기다란 다리 기둥을 받치고 선 텔레비전은 양쪽에 문이 달려 있었다. 문을 밀면 화면이 보였는데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다. 주말 오전이 되면 다양한 만화영화가 방영되었기에 나는 주말을 손꼽아 기다렸다. 요술공주 밍키가 변신하는 주문을 따라 하고 명작동화를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요술공주 밍키 밍키 밍키! 너와 나의 밍키 밍키~

신난다 재미난다. 즐거운 명작동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캥거루가 뛰어노는 푸른 목장에~~

언니와 나는 만화영화 주제곡을 떼창으로 따라 불렀다.


어버이날이 다가왔다. 동네 사는 종길이네는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든다고 했다. 나도 엄마, 아빠한테 카네이션을 선물하고 싶었지만 돈을 주지도 않을뿐더러 뭘 만드려고 해도 집에는 색종이도 종이도 없었다. 유일하게 집에 있는 건 커다란 전년도 벽걸이 달력이었다. 언니와 난 달력 그림 중 분홍색이 나온 부분만을 오려 카네이션을 만들어 아빠한테 선물로 드렸다. 아빠는 고맙다며 달력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회사에 갔다.  어린 마음에 무척 뿌듯하고 행복했다.


소유욕이 강해지는 시기가 있다. 자율성을 기르는 자연스러운 성장 단계인데 어릴 때 우리는 내 것을 딱히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방 한 칸에 내 것이라 할만한 물건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개중 소유한 몇 가지가 지금껏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기억에 남는 첫 번째 선물은  한복이었다. 학교에 입학한 기념으로 유일하게 내 한복만 사주셨다. 그동안 명절에 한복 입은 형제는 아무도 없었다. 치마는 바닥에 질질 끌리고 소매는 여러 번 접어 입어야 할 만큼 치수가 큰 한복이었지만 특별히 내 것만 사준 사실이 행복했다.

풍경이 떠오른다. 엄마는 송편을 빚었고 아빠는 무언가 고장 난 가구를 고치고 있었다. 밥상에 가지런히 놓인 송편, 웍더글덕더글 장난치던 우리들. 나는 추석날 입을 한복을  괜히 꺼냈다 넣었다 하다 지저분해진다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었다. 어두운 실내에 오후 햇살이 들어와 오래된 장판 무늬 위로 드리워져 따사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추석 때 한복을 입고 곱게 절을 했다. 엄마는 절 하는 모습을 기념으로 찍어주었다. 그 소박한 명절 풍경은 한 장의 스냅사진으로 가슴에 남아있다.


두 번째 선물은 원피스였다. 주홍빛 예쁜 구두와 세트였다. 엄마는 공원에 데려가 사진까지 찍어 주었다. 겨울까지 입을 수 있는 보들보들한 원피스를 입으니 동화에 나오는 공주 같았다. 만날 운동화만 신다가 구두를 신으니 어색하면서도 행복했다. 그런데 반짝반짝 예쁜 구두는 나와 오래 함께 하지 못했다.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우리는 동천강에서 모래밭에 무언가를 숨기고 찾는 놀이를 했다. 나뭇가지, 독특한 모양의 돌멩이 등을 모래 속에 숨기고 상대방이 찾는 놀이였다. 자연물은 표가 안 나 찾는데 재미가 없었다.

"이번에 뭘 숨기지?"

 나는 노는 동안 구두를 모래밭 가장자리에 벗어놓았는데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내 신발 숨길까?"

언니가 맞장구를 쳤다.

"좋아! 재밌겠다"

나는 신발을 모래밭에 파묻고 흔적을 없애고 의기양양했다.

"찾아봐라! 못 찾을 걸"

언니는 내 신발을 찾아 여기저기 모래를 팠다.

"진짜 못 찾겠다. 어디 숨겼니?"

"히히, 잠시만...."

생각했던 곳을 팠지만 숨긴 나도 신발을 찾을 수 없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여기 근처였는데, 어디 갔지?"

날이 저물도록 신발을 찾아 모래를 팠지만 구두 한 짝은 나타나지 않았다..

"신발 잃어버렸어. 어떡해.... 흐엉...."

결국 신발을 못 찾았다. 처음 사준 구두였는데... 눈물이 나왔다. 엄마에게 혼날까 봐 무서웠다.

예상대로 엄마한테 엄청 혼났다. 그리고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을 던졌다.

"뭘 사줄 필요가 없어. 아낄 줄도 모르고. 앞으로 다시는 사주나 봐라."


세 번째는 산타할아버지 선물이었다.

어느새 날은 추워져 겨울이 되었다. 나도 어렴풋이 크리스마스, 산타할아버지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진짜 있나?"

"있다 아이가. 00이 작년에 선물 받았단다!"

"그거 울 누나야가 그러는데 다 거짓말이래. 엄마, 아빠가 주는 거라드라."

아이들끼리 진지한 설전이 오고 갔다.  우리 집에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산타할아버지가 진짜 있을까 궁금했다.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신기하게도 진짜 머리맡에 선물이 있었다. 언니, 오빠 머리맡에도 있었는데 내 선물은 크고 언니, 오빠 선물은 작았다.

"막내는 말을 잘 들어서 선물을 큰 걸 주셨대. 앞으로 더 잘하라고 적혀있네?" 엄마는 웃음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은 점빵에 갈 때마다 바라만 보았던 바로 그것, 닿을 수 없는 높은 선반 위에서 꼭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던 과자 종합 선물세트였다. 포장되어 있는 선물 안에 산타할아버지가 쓴 카드가 있었다. 진짜다! 진짜로 산타할아버지가 있었어! 그리고 나만 특별히 큰 걸 받았다. 신난다. 기쁘다. 행복하다. 구름을 탄 것처럼 방방 거리며 눈치 없이 자랑을 하고 다니다 언니 오빠의 시샘을 받았다.


동동 347번지 시절은 자연과 함께여서 더 행복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동네 뒤를 받치는 작은 산과 코 앞에 수시로 오르내릴 수 있는 동천강은 유년시절을 풍성하게 해 주었다. 오히려 아빠와 함께 한 기억은 많이 나지 않는다. 분명 매일 아빠와 함께였을 텐데 말이다.

선명하게 기억에 나는 건 엄마, 아빠가 이불을 들고 동천강에서 빨래를 하고 그 주변에서 놀았던 것과 어느 날 아빠가 부엌 뒤꼍에 채송화를 심었던 일이다. 집을 오며 가며 채송화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채송화를 심는 날 표 내지 않았지만 마음에 작은 일렁임이 일었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 가족 소소하지만 행복한 이야기가 쌓이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담은 일렁임이었다.












<엄마의 이름 앞 이야기>

1.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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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롤로그-영웅 영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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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 영숙이는 선생님 시킬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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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랭이는 뭐하나 저 간나 안 물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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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와야 국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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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뽕 따러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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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의 집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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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진모 엄마는 키가 시집가서 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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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 살림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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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시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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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두운 터널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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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내 이야기>

1. 맨드라미는 소환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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