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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Nov 21. 2022

더 이상 기댈 수 없는 존재

기억 속 내 이야기


2년 동안 살았던 동동에서 반구동으로 이사를 했다.

반 한 칸에서 방 두 칸이 있는 전세방으로 이사였다. 방이 두 칸이 된 것은 좋았지만 이사를 하면서 동천강과 멀어진 게 내심 아쉬웠다.


여름방학이 얼마 안 남은 7월에 이사를 해서 근처 학교로 전학은 2학기부터 하기로 하고 보름 정도 병영 국민학교에 다녔다.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이 꽤 멀었다. 딱 그 보름 동안 해괴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전설의 고향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전 지역에 걸쳐 전해지는 전설, 민간 설화 등을 모티브로 방영된 고전 형식 드라마였다. 전설의 고향은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면서도 챙겨보던 인기 높은 드라마였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학교에 구미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구미호가 진짜로 있다더라, 양반다리를 하고 둥둥 떠서 다니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잡아먹는다더라.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지만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혹시, 설마...?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3반 000가 학교 오는 길에 진짜 마주쳤다더라. 머리 긴 여자였는데 밑을 보니 다리가 바닥에서 떠 있었다 안 하나."

"으악! 무섭다!"

"아무나 잡아먹는 게 아니라 닭띠, 소띠, 개띠 등을 잡아먹는다카던데?."

아이들 사이에 괴소문은 점점 생명력을 얻어 사실로 둔갑했다.

어떤 아이는 가족이 잡아먹힐까 봐 무섭다며 훌쩍훌쩍 울었다.

나도 걱정이 되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소띠, 닭띠인데 엄마, 아빠 잡아먹으면 어떡해!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데 하늘이 시커메지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학교에서는 장맛비가 심상치 않았는지 학생들을  일찍 집에 귀가조치했는데 우중충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길을 뚫고 집에 가는 길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학교를 오갈 때마다 사람이 걸어오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나도 모르게 다리로 눈이 갔다.


얼마 후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야, 용, 호랑이 띠가 가족 중에 있으면 괜찮다더라!"

"진짜가?"

 닭, 소띠처럼 힘없는 사람을 잡아먹는데 용, 호랑이띠가 옆에 있으면 구미호가 왔다가도 무서워서 도망간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나는 용띠, 언니는 호랑이띠다!

"언니야! 그럼 우리가 엄마, 아빠를 지키자!"

"그래!"

언니와 나는 손을 붙잡고 다짐했다.


어리고 순진했지만 엄마, 아빠는 내 세상 전부였기에 구미호를 물리쳐 엄마, 아빠를 지키려는 마음은 비장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어린 자식은 본능적으로 부모를 기둥으로 생각하고 의지한다. 그래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살기 위해 절대적 존재로 느끼는 것이다.



'부모는 나를 지켜줄 거야'라는 믿음. 한결같이 부모를 믿고 의지하던 마음이 클수록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부모가 의지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던 기억 하나.

이사를 와서 동네 또래 아이들과 동네방네 몰려다니며 놀았다. 고무줄 뛰기 놀이를 하고 모양 좋은 돌멩이를 주워 시멘트에 손이 쓸리는 줄 모르고 공기놀이를 했다. 그러다 근처 5층짜리 아파트 놀이터에 그네가 생기면서 놀이터에 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네는 여자아이들한테 인기가 있어서 항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겁이 없던 우리는 그네가 하늘까지 치솟도록 발을 굴렀다. 앞에 앉고 뒤에 서서 아슬아슬하게 타기도 했다.

어느 날 그네를 타러 왔는데 바닥에 피가 묻어있었다. 자주 함께 어울리던 한 친구가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다쳤다고 했다.

걱정이 되면서 한편으로 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쳤다고 말하면 엄마가 조심하지 않았다고 혼냈을 것 같았다.


일이 생겼을 때 감추어야겠다고 생각한 또 다른 기억

어느 날 학교를 갔다가 집에 오니 아무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집에는 심이 닳은 뭉뚝한 연필밖에 없었다. 연필을 깎을 수 있는 칼도 없었다. 나는 바닥에 있던 가위 날 한쪽을 벌려 연필을 깎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손을 베었다. 눈앞에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선명한 붉은 액체가 바닥에 흥건했다. 아프고 무서웠지만 그것보다 엄마가 가위로 연필을 깎으려 했다고 혼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서러운 마음에 조금 울다 가재 손수건으로 손을 꽁꽁 묶고 조금 깎인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심하지 않아서 엄마, 아빠가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프면 걱정부터 하는 게 부모인데 나는 왜 혼날 까 봐 걱정하고 숨기려고 했을까?


강렬하게 두 사건이 내 뇌리에 박힌 건 부모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내게 엄마, 아빠는 더 이상 어릴 때처럼 온전히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겉모습은 멀쩡한 척했지만 나의 내면은 혼돈의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 혼돈이 4학년이 되었을 때 행동으로 표출되어 찐 사춘기를 겪게 되었는데....

<다음에 계속>




<엄마의 이름 앞 이야기>

1. 시작

https://brunch.co.kr/@miyatoon/20

2. 프롤로그-영웅 영숙이

https://brunch.co.kr/@miyatoon/37

3. 우리 영숙이는 선생님 시킬 거라......

https://brunch.co.kr/@miyatoon/38

4.호랭이는 뭐하나 저 간나 안 물어가고!

 https://brunch.co.kr/@miyatoon/41

5. 와야 국민학교

https://brunch.co.kr/@miyatoon/43

6. 뽕 따러 가세

https://brunch.co.kr/@miyatoon/44

7. 남의 집 살이

https://brunch.co.kr/@miyatoon/45

8. 진모 엄마는 키가 시집가서 컸어.

https://brunch.co.kr/@miyatoon/46

9. 내 살림과 아이들

https://brunch.co.kr/@miyatoon/47

10. 도시로 떠나다

https://brunch.co.kr/@miyatoon/48

11. 어두운 터널 속에서

https://brunch.co.kr/@miyatoon/49


<기억 속 내 이야기>

1. 맨드라미는 소환버튼

https://brunch.co.kr/@miyatoon/52

https://brunch.co.kr/@miyatoon/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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