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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형 은행원 Dec 08. 2019

동료가 집을 샀다. 배알이 꼴린다.

재테크를 통해 더 나은 내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아침부터 사무실이 시끄럽다. 집을 샀단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냥 집이 아니라 앞으로 집 값이 천정부지로 솟을 일만 남았다는 재건축 아파트 단지다. 사무실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떠벌떠벌 자신이 산 아파트 자랑을 한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신용대출과 주택담보대출 한도와 금리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신용+주담대 한도를 끝까지 땡겨서 집을 한 채 더 산 것이다. 대출을 알아보는 그의 온몸과 목소리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하도 호들갑을 떨어서 나는 그가 벌써 차익을 3억 정도 벌어들인 줄 알았다.


처음에는 그냥 소란스러운 오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와 함께 쏘가리 매운탕을 먹게 되었다. 내가 유일하게 싫어하는 음식이 끓인 민물고기인데 말이다. 매운탕 집까지 가는 길에 그가 내게 앞으로 10년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 전망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딱히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나의 인생 재테크 계획을 수립해주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방금 나를 위해 3억 원짜리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 몇 마디에 3억 원의 빚을 진 것이다. 어찌나 당당하게 이야기하던지 하마터면 내가 매운탕 값을 낼 뻔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나는 평화로운 금요일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매운탕을 먹고 난 다음의 나는 시대에 뒤쳐진 패배자가 되어 있었다. 부동산이 다시 질주하고 있고 지금 그 막차가 내 앞에서 떠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름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유독 오늘은 더 마음이 뒤숭숭했다. 어쩌면 그의 주장이 맞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기세 등등하게 과거의 사례 몇 개와 앞으로 착공될 것이 분명하다는 무슨 무슨 광역권 라인을 언급할 때 나는 아무런 반론도 제기할 수 없었다.


배알이 꼴렸다.




칸트 이전의 세계가 어떠했는지 알지 못하므로 나는 칸트가 나와 세계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이 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종종 칸트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나는 한 SF소설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무한한 우주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의식뿐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칸트의 생각이었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희소하고 가치 있는 것은 당신과 나의 의식뿐이다. 만약 시공간을 가르는 탐험을 하고 있는 외계 문명이 있다면 그들의 목적은 아마도 당신과 나라는 의식을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들은 그 여정에서 무수히 지나칠 목성만한 다이아몬드 덩어리나 태양만한 순금 덩어리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당신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의식의 주체다. 물질 따위가 넘볼 수 없는 지고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칸트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그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 의식이라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 질문에서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한낱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똑같이 목적으로 대하도록 하라.’라는 원칙을 도출해냈다. 이것을 인간성 정식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자녀를 구박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부모가 회식 자리에서 자식 자랑을 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자녀를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남자가 섹스를 위해 여자를 유혹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남자는 섹스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여자를 사용하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주가 직원을 착취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직원을 생산성 증대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기에 잘못이다.


인간성 정식은 또한 거짓말과 폭력, 부정행위 등이 어째서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된 이유는 이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을 수단으로 취급하기 위한 저열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자신의 확장이며 자신을 올바로 대우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대하여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부동산 투자의 근본적인 부분이 잘못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부동산 수익률 극대화를 통한 부의 획득이라는 목적의 수단으로써 활용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의식 전체를 부동산이라는 별 시답지도 않은 것에 종속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투자를 미화했고 합리화했다. 다른 사람의 배알을 꼴리게 하는 특유의 수사법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방식의 투자를 집요하고도 강압적으로 강요했다. 금요일을 심란하게 했다.


나는 이런 방식의 투자가 무분별하게 확산되는 것이 우려된다.




우리 집 앞에는 경희대 석사 태권도 학원이 있다.  샛노란 그 학원 차량의 창문에는 태권도를 통해서 아이의 1. 효심이 자라고 2. 마음 건강해지며 3. 살이 빠지고 4. 키가 자라며 5. 학업 성적을 개선할 수 있다고 적혀있다. 하루 한 시간씩 발차기와 정권지르기를 해서 이 정도로 인간이 개선될 수 있다니! 놀랍고도 신비로웠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게는 글쓰기가 그렇다. 처음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돈을 벌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어서 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는 목적이 좀 더 복잡해지고 세련되었다. 물론 글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도 강렬하다. 그러나 글을 쓰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지금의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싶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서 더 진실되고 강인한 나 자신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의 내게 있어 글쓰기는 더 나은 나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여가 시간에 취미로 긁어보는 무료 복권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재테크를 통해서도 인간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재테크를 하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내가 절제하고 절약하여 통장에 잔고가 늘어갈수록 나의 내면에 절제력과 자신감과 강인함이 쌓여가는 것이다. 이것들이 쌓여갈 수록 나는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재테크란 더 나은 나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당신 또한 무언가에 헌신함으로써 당신의 내면세계가 풍요로워지고 강인해지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달리기, 요리, 그림, 명상, 육아, 결혼, 직장 무엇이든 상관없다. 지금 나는 당신을 성장하게 했을 그 무엇과 동일하게 내게는 재테크가 그러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앞서 나의 배알을 꼴리게 했던 부동산 투자 같은 것을 통해서도 인간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의 투자에 탐욕 이외의 어떠한 가치도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똥으로 커피를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가 목적한 3억 원을 벌어들였다고 할지라도 그 외에 그의 내면에 남은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의 투자 과정에는 어떤 헌신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부동산 세미나에 참가하고, 관련된 서적을 읽고, 블로그를 들락날락하며, 틈틈이 집 주변 부동산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했을 것이다. 이것은 정보수집이다. 그러나 감히 헌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무언가에 헌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폄훼하는 일이다. 그는 무엇도 인내하지 않았다. 무엇도 희생하지 않았다. 그저 대출을 끝까지 땡겼을 뿐이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는 오로지 헌신 위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그가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는 재건축 아파트를 통해 정말 3억을 벌어들일지 혹은 파산해서 회생 법원을 들락날락할지 알 방법이 없다. 미래의 그가 부동산 투자를 통해 100억, 200억의 재산을 벌어들이는 것 또한 충분히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연히 나와 마주친 그는 분명 거들먹거리며 내게 되물을 것이다. 일전에 자신이 해준 3억 원짜리 조언은 콧구멍으로 들은 거냐고. 왜 이리 한심하게 살고 있느냐고. 미래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이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빌어먹을 - 그러면 그때의 나는 또다시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배알이 꼴릴 것이다.


지금의 나는 꽤나 심기가 불편할 미래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나의 방식이 옳다고 확신한다. 물질보다 의식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탐욕과 두려움이 내 온 마음을 지배하며 행위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의 주체로서 차마 부동산 같은 것에 내 삶을 종속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므로 어떤 결과든 상관 없다. 나는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브런치'에

B형 은행원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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