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데이파더스클럽 (17)
“아아아악!!!”
삶은 반복이다. 월요일이 되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계단을 올라 회사에 도착한다. 퇴근시간이 되면 흘끗 시계를 보고, 사원증을 찍고 나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도착한다. 출퇴근 루틴을 다섯 번 반복하면 한 주가 지나간다. 그렇게 한 주가 한 달이, 일 년이 십 년이 된다.
육아도 반복이다. 어제 분명히 했던 일 같은데, 오늘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아이들을 깨우고, 양치질을 시키고, 숙제를 봐주고, 공원에 나간다. 엊그제 분명히 둘이 투닥거리는 걸 말렸던 것 같은데, 오늘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어제가 오늘인가 오늘이 어제인가. 눈을 비비고 달력을 다시 본다. 10월. 가을이 훌쩍 다가왔는데 왜 집안은 여름같이 후끈한가.
둘째가 이번에는 좀 더 큰 사고를 쳤다. 아빠로서, 남자로서 봤을 땐 이번 건 지난번보다 더 치명적이다. (지난번 사고가 궁금하다면 66화를 참고.) 첫째가 한눈팔고 있는 사이에 둘째가 오빠 휴대폰 속에 있는 게임 앱을 삭제해 버렸다. (은아 아이고 왜 그랬어… ㅠㅠ)
첫째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린 시절 ‘나 홀로 집에’ 시리즈에서 케빈이 아빠 스킨 잘못 바르고 3옥타브쯤 되는 괴성을 지르는 장면을 볼 때 솔직히 너무 영화적이다… 하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게 현실에서도 가능한 것이구나' 싶을 만큼 첫째의 비명이 온 집안을 울려댔다. 둘째도 이번에는 상황이 좀 심각하다 싶었는지 얼른 제 방으로 슬쩍 몸을 피했다.
“다시 설치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아빠가 다시 깔아줄게.”
우선 최대한 침착한 척했다. 울고불고하느라 얼굴이 엉망진창이 된 아들을 다독이고 휴대폰을 받아서 원래 하던 게임을 다시 앱스토어에서 받아 설치했다. 아아… 그런데 역시 뭔가 싸한 느낌은 틀린 적이 없다. 아들이 하던 게임이 백업이 안되어 있다. ‘처음이시군요! 튜토리얼부터 시작하시겠어요?’라는 멘트가 그렇게 야속하고 얄미울 수가 없다.
아이가 여름방학 내내 공들여했던 게임이다. 게임하는 시간을 자주 허용해주지도 않는 부모를 만난 덕분에 숙제해야 할 것 다 하고 주말에 겨우겨우 자유시간 받아서 키운 캐릭터와 아이템들이 일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게임 좀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게 ‘고작 게임 캐릭터’가 아닌 것을. 그건 이미 과거의 나와 같다.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들어 낸, 시간과 노력의 결정체 같은 것이다.
최고 기록을 깨서 새로운 캐릭터를 얻었을 때 수현이의 얼굴이 얼마나 의기양양했는지 모른다. 아빠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부리나케 달려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성취인지를 전해 들은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인 법. 호시탐탐 오빠의 휴대폰을 노리는 둘째 덕분에 첫째는 마치 차곡차곡 소중하게 모아 놓은 지난 여름방학의 엑기스를 한방에 홀랑 날려먹었다.
며칠 후,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내게 와서 물었다.
“아빠, 친구들한테 들었는데 과거로 휴대폰을 돌리는 법이 있다는데?”
“휴대폰 백업 말하는 거야? 한번 해볼까? 그래도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을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들과 앉아 이것저것 휴대폰 설정을 만져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스마트폰의 백업 설정은 결국 이미 지워진 게임 앱 속의 캐릭터와 아이템들까지 부활시켜주지는 못했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보다 몇 배는 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는 무능력한 아빠를 둔 덕에 결국 자신의 지난 여름방학과 이별을 고했다.
아이 덕에 시간을 내가 원하는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누구나 해 보는 상상이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더 자주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씩 휴대폰 속 AI가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의 모습을 사진첩으로 만들어 띄워주면, 그 시절이 그렇게 예쁘고 그리울 수가 없다. 아니 어제랑 오늘이랑 분명히 다를 게 없고, 오늘과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무한 반복 같은데 사진 속 이 아이가 정녕 내 옆에 있는 이 아이가 맞는 것인가 싶은 것이다. 그리고는 조막만 하던 그 귀여운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나를 본다.
매일매일이 똑같아 보이지만, 똑같지 않다. 오늘은 어제가 아니고 오늘이다. 아이들은 꼭 삼백육십오분의 일만큼 자랐다. 그 미세한 변화를 내가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이 변화 없이 계속되는 것 같은 일상이 힘겹고, 얼른 아이들이 더 커서 손이 덜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그리고 5분 후에는 또 지난 몇 개월 전을, 몇 년 전에 만났던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원래 감정의 동물이라지만, 그래도 마음이 너무나 제멋대로 오락가락이다.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오늘이 가장 젊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나와 아이들을 원할 때마다 슬쩍슬쩍 과거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 생겨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도라에몽 시리즈를 본다.)
첫째는 이제 너무 커버려서 잠들어 있으면 간신히 두 팔로 들어 침대에 눕힐 수 있는 정도다. 아마 내년에는 어려울 것이다. 둘째는 그에 비하면 아직은 들만 하지만 그 역시 곧 들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야말로 정해진 미래다.
아빠로서 정해진 미래를 맞는 마음이 어떠해야 할까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별 일없는 하루,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이 하루동안 나와 아이가 쌓아가는 사소한 추억들이 1년 후, 2년 후에는 또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때 덜 아쉬우려면 오늘, 조금이라도 순간순간을 집중해서 보내야겠지 싶다. 수현이가 게임 캐릭터 키울 때 집중하던 만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반쯤만이라도.
집에 오면 휴대폰 그만 내려놓고 오늘의 아이들 얼굴 한번 더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썬데이파더스클럽
다음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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