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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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대학 교수의 길
안녕하세요. 거의 반년 만에 새 글을 쓰네요. (제 지난 연재 시리즈 : 포닥 자리찾기, 포닥 탈출기)
통계를 한번 살펴보았는데요. 코로나 때문인지 작년에 비해 부쩍 방문자가 줄었습니다. 작년까지는 월평균 4천 회 정도의 조회수가 뜨는데 올해는 반토막이 났어요. 많은 분들의 계획이 코로나로 인해 좌절된 것은 아닐까 싶어 저도 마음이 아프네요.
그래도 언젠가 백신과 치료제가 다 나오면 다시 예전처럼 해외로 나가셔서 멋지게 실력들을 발휘하시게 될테니 그때가서 읽어보시고 생각할 부분이 있었으면 하여 글을 시작합니다.
우리나라는 과묵함이 하나의 미덕처럼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있어도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천한 지식을 자랑한다는 취급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잘난 체 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럿이 모인 자리, 특히 공식적인 회의 자리 등에서는 사소한 의견은 그냥 이야기 안하고 넘어기기도 합니다. 수업 시간에도 궁금한게 있어도 손 들고 질문하기보단 수업 끝나고 따로 문의하거나 혼자 독학을 합니다.
그에 반해 미국(다른 나라는 안 살아봐서 미국 기준으로 말씀드릴게요)은 말 하는 것이 중요한 사회입니다. 토론 문화가 잘 자리잡혀있고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의견을 말로 표현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대학 수업에서도 수시로 학생들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랩미팅에서도 교수님 뿐만 아니라 학생들 모두 열심히 자기 생각을 피력합니다.
대학의 연구실의 포닥으로 가면 교수님 뿐만 아니라 대학원생들이 있습니다. 포닥 포지션을 잡을 때까지 늘 교수님과의 커뮤니케이션만을 중요시하고 신경 써왔는데 막상 연구실에 오니 다양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필요해집니다.
랩미팅을 하거나 여러 회의를 할 때에 누군가 말하겠지, 나까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다들 말 안해도 알겠지 하면서 가만히 계시면 안됩니다. 아무말도 안하고 가만히 계시면 의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의견이 없다는 것은 "능력없는 사람", "똑똑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논문을 펑펑 써내면야 알아서 그 능력을 알아보겠죠. 그렇지만 초기에 아직 이렇다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때에 말까지 안하고 계시면 점점 대화에서 밀려나시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투명인간 취급을 받게 됩니다.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깁니다. 포닥 때는 아니고 대학원 생활 할 때 학과 대학원 학생회 일을 했었습니다. 제가 그 학생회 역사상 최초의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냥 나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 활동을 해보고 싶어서 참여했습니다. 미국에 간 첫 해에 그 일을 하다보니 여러가지로 회의에서 대화에 참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1. 미국인들끼리만 모여서 하던 회의에 참석하다보니 대화 자체가 저 같은 외국인에게 쉽지 않았습니다. 말이 빠르기도 하고 slang..이라기 보단 편하게 쓰는 말들도 많이 쓰고 회의 외에 사적으로 나누는 대화의 주제들도 익숙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영어에 자신이 없을 때라 나서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2. 한국에서 회의 때 말 별로 안하고 찬반 의결 같은 것에만 참여하던 버릇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는 마음속으로 다듬고 다듬은 말 한마디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회의가 진행될 때 할 말이 생기더라도 다른 이들의 시선이 제 쪽으로는 오지 않으니 (당연히 말을 안할거라 생각하니) 그들의 주목을 끌고 말을 꺼내는게 더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말을 하려고 머릿속으로 말을 다듬다가 어느새 해당 주제는 넘어가 버리기도 하구요. 어느 순간부턴 저는 회의에 없어도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게 되었는데 참으로 자존심이 상했던 기억입니다.
이 때의 경험 이후로 여러 모임이나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영어를 몰라서 말을 못한다기 보다는 자신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 입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박사과정 내내 그 자신감을 완전히 갖지는 못했습니다. 박사 3-4년차는 되고 랩에서 조금 고참이 되고 논문 실적도 나오기 시작하면서 자존감도 회복되고 나서야 "영어로 말할 때는 수줍지만 한국어 할때는 외향적인" 이중 생활을 끝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극적인 대화참여를 완전히 끝낼 수 있던 계기는 포닥을 시작하고부터입니다. 일단 교수님이 저와 굉장히 많은 것을 상의하셨고 의견을 원하셨습니다. 매일 두세시간씩 1:1로 토의를 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 기대에 부응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재계약 안될까봐짤릴까봐 열심히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랩미팅이나 랩 생활에서도 학생들이 제게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교수님과 중간에서 의견을 정리하는 부분 말이죠. 그런 과정에서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들이 상당히 많아졌고 자연스레 영어 실력은 급상승하였으며 자신감도 갖게 되었지요.
제가 다시 미국에서 박사 생활부터 시작한다고 하면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 관계없이 말을 많이 하며 지낼 것 입니다. 할 수록 늘더라구요. 내 말이 틀리면 어떨지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여러분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 입니다. 아예 못 알아들을 말을 하면 모르겠지만 (그 정도였으면 박사과정이나 포닥으로 뽑아 주지도 않습니다) 적당히 단어들 나열하면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다 알아듣습니다. 우리가 외국인들이 더듬더듬 하는 한국말들 다 알아 듣는 것 처럼요. 같은 유학생끼리는 잘 못 알아 들을 수 있으나 그들끼리는 묘한 "유대감"이 있어 broken English가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ㅎㅎ
영양가가 있는 포스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어려운 상황에서 해외에 계신 분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국내에서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계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