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Jul 18. 2024

이 길을 통해 내 최고의 열망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틱낫한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을 읽고 쓰는 기록을 이어갑니다.


두려움의 탐구

두려움의 탐구라는 제목 아래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포기말(=문장)입니다.

그냥 흘려보내면 되는 불필요한 고통 중 하나가 바로 두려움입니다.

다시 보는 데 몇 번이나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되는'으로 읽었습니다. 두려움에서 뭘 읽으란 뜻으로 말이죠. 스스로 어리석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은 그냥 내재된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어리석음이란 생각이 듭니다. <시골 농부의 깨달음 수업>에서 배운 내용들이 떠올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검색 결과가 명료하지 않아 다시 한번 <시골 농부의 깨달음 수업>을 읽을 때가 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기록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부작용에 따라 진화한 인지 시스템'을 묘사한 다음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돈과 주관적 가치에서 출발한 의미가 생각을 실제로 인식하여 생물 인지 시스템을 오용하는 사례가 대부분의 '두려움'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칩니다.

책의 정확한 이해는 아니겠으나 지금 당장 소화하려는 욕망이 발현된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매 순간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겪으며 스스로 새롭게 한다

두려움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데요.

당신은 지금도 죽어 가고 있지요. 당신은 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죽어 가는 것도 살아가는 것만큼 똑같이 실제로 상당히 즐거운 것이랍니다.

굉장히 모순적인 설명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일의 내용이 그대로 죽어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희망이나 욕망을 투영하여 보느냐 반대편에서 보느냐에 차이일 뿐이겠죠. 아니, 더 정확하게는 각자가 정의한 삶과 죽음이라는 '의미'의 창으로 보는 것이겠죠. 같은 현상을 두고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하는 허상의 분기점입니다.

실제로는 삶과 죽음이 늘 함께 진행되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 중 어느 하나만 떼어 낼 수 없습니다.

이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지인을 대입해 보니 두 가지 대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에 대한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확신에 찬 태도입니다. <제정신이라는 착각>을 읽은 덕분인지 '과도한 확신은 무지의 표출'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앞서 모호하게 느껴졌던 '깊이 살핌'에 대해 힌트가 되는 다발말(=구절)이 이어집니다.

깊이 살핌으로써 이런 종류의 잘못된 개념들을 해체시킬 수 있습니다. 태어남도 죽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매 순간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겪으며 스스로 새롭게 하지요.

'태어남도 죽음도 없습니다.'라는 포기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태어남은 인간에게 축복이고, 죽음은 분명 고통을 선사하니까요. 다만,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는 점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잊고 제쳐둔 진정한 열망

<제정신이라는 착각>을 읽은 후에는 '예측'이란 낱말이 나오면 자동으로 우리 뇌가 '예측 기계'란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기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고는 하지요.

그리고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 예측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흔적을 찾다가 손떼를 남긴 그림을 발견합니다. 가만히 그림을 다시 보니 인식과 바람 모두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고, 실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다음 포기말은 이렇게 묻게 합니다. 정말 그러할까요?

의식주가 충분하고,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질까 걱정할 필요도 없는 사회에서 살지라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장 깊은 염원을 잊고 제쳐두었기 때문입니다.

10여 년 전에 열망이 식었다고 느낀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과장된 고통을 만들고 스스로 겪었다고 시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염원을 잊고 제쳐두었다는 진단도 받아들이고 싶어 집니다.

많은 이들이 의식적인 주의나 의도가 빠진 채 터덜터덜 걷듯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냥 어떤 경로에 자신을 놓고 방향을 잡고는, 그 길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조차 갖지 않지요.

일부는 저에게도 통용됩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저는 의문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부분적으로 그 원인입니다. <중략> 그렇게 행복하기를 미룬 채, 지금 갖추지 못한 행복의 조건을 얻기 위해 미래를 향해 달립니다.


아직은 공감하기 어려운 마음챙김

최근 저도 행복을 미루는 자신의 행동을 느끼고 개선해야겠다는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내용에는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몸으로 되돌리면, 수많은 행복의 조건들이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즉시 깨닫습니다. 깊이 살펴 자신의 진정한 열망을 목격하고는 '행복해지기 위해 미래로 내달릴 필요는 없었군.'이라는 통찰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챙김에 관심을 두는 것이겠죠.

우리 모두 내달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외가 없지요. 그 습관이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고통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저자는 '자유의지'를 권력, 명성, 부, 감강적 쾌락에 대한 부추김과 대비시키는 듯합니다. 다음 그림에서 제가 의미라고 쓴 것이 '자유의지'라면, 돈으로 축소한 것에 해당합니다. 나의 욕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이 두려움을 통해 나에게 침투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저자가 자유의지를 설명한 다발말을 봅니다.

우리를 추동하는 강력한 동기이지요. 그것이 건전한 것이라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자유의지를 실천하려면 멈춤의 시간이 필수적일까요?

종종 멈춤의 시간을 갖기 않는다면, 자신에게로 돌아와 깊이 살피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깊은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질문을 제안합니다.

이 길을 통해 내 최고의 열망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지난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

(3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31. 문제의 인식과 문제의 정의는 전혀 다른 일이다

32. 필요로 하는 것을 갖기 전에는 뭐가 필요한지 모른다

33. 내가 정말로 해결안을 원하는지 보지 못하고 하는 일들

34. 고통에 먹이 주기를 피하기 위한 직시(直視)

35.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기 위한 가장 작은 실천부터

36. 매혹적인 오락거리라는 난적 상대하기

37. 고통을 감싸 안기 혹은 감정 과학자가 되기

38. 서툴게라도 감정 과학자로 입문하기

39. 정확한 관찰과 조사는 감정 과학자의 기본일 텐데

40. 우리에게는 감정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41. 감정은 정보이다

42. 내 감정을 살피고 태도를 가꾸고 습관을 만들어가는 일

43. 마음챙김의 종으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도록

작가의 이전글 마음챙김의 종으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도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