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욱 Oct 04. 2022

무인계산의 시대, 혹시 수다계산대는 들어봤어요?

15 - 베겔(네덜란드), 윰보

빨리빨리 계산해도 모자랄 판에 한가롭게 얘기를 한다고?

(출처:Forbes)

이제 어딜 가도 점원이 맞아주는 대신 키오스크를 이용해 고객이 직접 계산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특히 빠른 고객 회전이 중요한 대형마트에서는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셀프 계산대를 적용했다. 최근에는 고객이 일일이 제품을 스캔하지 않고 그냥 물건만 올려놓아도 자동으로 수량과 품목을 스캔하는 '스마트 계산대'도 등장했다. 심지어 2018년 아마존은 '그냥 들고나가면 된다'며 계산대를 아예 없애버린 아마존 고를 선보이기도 했다. 경제성의 문제가 아직 남아있지만, 최소한 기술적으로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빠른 계산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업계의 흐름을 정반대로 거스르는 '수다계산대'가 등장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수다계산대는 말 그대로 뒷사람 눈치볼 필요 없이 고객이 점원과 얘기하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수다를 나눌 수 있는 계산대를 말한다. 오늘의 날씨 같은 가벼운 내용부터 가족과 함께 다녀왔던 여행 이야기 같은 개인적인 내용까지 무엇이든 이 계산대에서는 마음껏 떠들어도 된다.


고객과 점원이 이런저런 수다까지 곁들인다면 당연히 고객 한 명당 계산하는 시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아마존 고가 등장할 정도로 어떻게든 고객들이 최대한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매장을 떠날 수 있게끔 설계하는 유통업계의 최근의 트렌드와는 대척점에 서있는 이 수다계산대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만든 것일까.


여기서는 마음껏 수다를 떨어도 괜찮다!

(출처:Jumbo 공식 홈페이지)

수다계산대는 네덜란드의 윰보(Jumbo)라는 슈퍼마켓 체인에서 클레츠카사(Kletskassa, Chat checkout)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됐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700개 이상의 매장을 둔 슈퍼마켓 체인인 윰보는 2019년 본사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네덜란드의 소도시 블라이멘(Vlijmen)에서 클레츠카사를 첫 시범 운영한 이후 고객들의 긍정적 반응에 힘입어 이를 네덜란드 전역에 200개 넘는 점포로 확장했다.


어떤 고객은 클레츠카사를 위해 하루에도 매장을 세 번이나 찾는다고 말할 정도로 고객들의 반응은 아주 좋다. 그래서 어떤 점포에서는 클레츠카사의 확장판인 'Cozy Chat Corners'도 운영하는데 이곳에서는 아예 자리를 잡고 커피까지 마시며 함께 잡담을 나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수다계산대 때문에 괜히 불필요하게 계산대에서의 기다림이 길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매장에서 모든 계산대가 클레츠카사로 운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화를 원하지 않거나 빠른 계산을 원하는 소비자는 일반 계산대에서 빠르게 계산하고 가면 된다.


시작은 네덜란드의 윰보였지만 지금은 윰보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대형 유통업체 르푸(Carrefour), 오셩(Auchan)에서도 '블라블라 께스(Bla Bla Caisse)'라는 이름으로 수다계산대를 벤치마킹해서 이를 적용하고 있을 정도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의 시선을 사로잡는 수다계산대는 도대체 어떻게 출발하게 된 걸까.


외로움이 진짜 심각하기 때문이다

(출처:Unsplash)

윰보가 클레츠카사를 운영하게 된 이유는 바로 '외로움' 때문이다. 영국의 조 콕스 재단은 외로움이 매일 담배 15개비를 흡연하는 것보다 몸에 해롭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고, 영국 정부는 2018년 외로움을 담당하는 장관까지도 만들었다. 일본 정부 또한 2021년 사회적 고립을 담당하는 고독 장관을 임명했다. 세계 각국의 정부는 외로움을 국가적으로 다뤄야할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하는 중이다.


윰보가 사업을 전개하는 네덜란드에서도 외로움은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 네덜란드 국립보건환경 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네덜란드 성인의 47%는 외롭다고 응답했으며, 특히 75세 이상의 고령층에서는 56%가 주기적으로 외로움을 느낀다고 응답해 고령층일수록 외로움이 더욱더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외로움에 대항하는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회사, 사회 조직, 국가 기관 등이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네덜란드 전역에 매장을 가지고 있는 윰보가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외로움을 줄이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나온 것이 바로 클레츠카사다.


슈퍼마켓은 그 성격상 누구든 편하게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 수 있는 일상적인 공간이다. 게다가 윰보는 네덜란드 곳곳마다 매장이 있다. 그렇기때문에 윰보가 매장에 클레츠카사를 설치함으로써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네덜란드인들의 외로움을 줄일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 냈다.


당시 네덜란드 보건복지체육부 장관 휴고 드 존지는 클레츠카사를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누구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라고 긍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클레츠카사 카운터에 앉는 직원들 또한 스스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즐겁게 일한다고 한다. 


윰보는 클레츠카사를 통해서 고객의 잦은 방문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자기효능감도 고취시키고, 외로움이라는 사회적인 문제까지 해결해냈다.


외로움이 질병이 된 시대, 다정함이 우리를 구한다

(출처:Unspalsh)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네덜란드어 중에 '헤젤리흐(Gezellig)'라는 단어가 있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이라는 책을 통해 더욱 유명해진 이 단어는 '평범한 편안함이나 단순한 육체적 아늑함 이상의 따스한 느낌'을 의미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끔찍이도 사랑한다는 이 헤젤리흐라는 단어는 어쩌면 클레츠카사가 네덜란드에서 가장 먼저 태동할 수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따스한 느낌을 가진 헤젤리흐를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다정함' 정도가 좋을지 모르겠다.


다정함 혹은 헤젤리흐가 실제로 우리를 구한다는 것은 실험으로도 증명됐다. 컬럼비아대 정신의학 교수 켈리 하딩은 '다정함의 과학'이라는 책에서 '토끼 효과'를 소개한 적이 있다. 1978년 '사이언스'에 실린 로버트 네렘 박사 연구팀의 실험이다. 비슷한 토끼들을 몇 개 그룹으로 나누고 몇 달간 고지방 사료를 먹인 뒤 콜레스테롤 수치, 심장박동수, 혈압 등을 측정했다. 그중에서 한 그룹만이 다른 그룹 대비 혈관에 쌓인 지방 성분이 60%나 낮게 측정되었다. 지방 성분이 낮게 측정된 그룹과 다른 그룹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식단이나 유전자의 차이가 아니라 사료를 줄 때마다 연구원이 다정하게 따뜻한 말을 걸거나 쓰다듬어 줬는지 여부였다.


켈리 하딩 교수는 이에 착안해서 다정함이 우리 신체에 미치는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건강 문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켈리 하딩 교수가 증명한 것처럼 다정함은 우리를 외로움으로부터 구원하고, 실제로 우리들 각각이 의학적으로도 더 살만하게 만든다.


무인계산대의 시대, 수다 계산대가 로컬에 전하는 의미

(출처:Unsplash)

로컬은 단순히 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 하고만 연결되지 않는다. 로컬 브랜드는 그 지역의 매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지역에서만 나는 특산물들과 연결되기가 쉽다. 하지만 로컬의 진짜 의미는 단순히 그 지역의 자원뿐만 아니라 사람도, 관계도 모두 그 지역 자체로 깊숙이 녹아들어 가는 것에 있다. 그 지역의 특산물뿐만 아니라 대도시에서 주지 못하는 다정한 관계를 만드는 것 또한 로컬에서만 전할 수 있는 매력이다.


무인계산대로 대표되는 효율적인 대도시의 삶 속에서는 다정한 관계가 만들어지기가 너무도 어렵다. 대도시에서는 아무리 주변에 물리적으로 사람이 쏟아지게 많아도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매일같이 만원 버스와 만원 지하철에 실려 가지만, 내 옆에 누가 있는지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라고 느낄 때 외로움을 느낀다. 대도시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고 나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어딘가에는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들과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익명성으로 가득한 대도시에서 다정함을 느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로컬에서는 클레츠카사같은 다정한 관계가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그 어떤 관계도 비집고 들어오기 힘들지만 구조적으로 로컬에서는 효율성보다는 다정함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로컬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클레츠카사가 발현되고 이를 통해 다정한 관계가 형성된다.


물론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클레츠카사, 헤젤리흐 그리고 다정함을 내세우는 것은 어찌 보면 아름답긴 하지만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윰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클레츠카사뿐만 아니라 본원적 경쟁력을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프라인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편안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2016년부터 식료품 가정 배달을 시작했으며, 윰보 푸드코치라는 앱을 개발해 고객과의 커뮤니티를 조성하기도 하고,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인도네시아 양식장에서 네덜란드의 윰보까지 어떤 과정을 통해 유통됐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무인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동네 편의점도 아마존 고같이 계산원이 한명도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한쪽면에서 속도와 효율을 찾아 극한을 향해 달려갈수록 클레츠카사와 헤젤리흐 그리고 다정함의 중요성은 더욱더 두드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속도와 효율이라는 가치 아래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져 가는 세계적인 트렌드 속에 로컬 브랜드의 다정함이 나름의 대안이 되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뉴 로컬 시리즈

여는 말

로컬(=시골)에는 미래가 있을까?


로컬 헤리티지 (전통 로컬 브랜드)

군산 토박이들이 바라본 이성당이 잘 나가는 진짜 이유 (군산, 이성당) (Editor's Pick)

세상에, 700억을 투자받은 카페가 있다고?! (강릉, 테라로사) (Editor's Pick)

성심광역시에 오세요, 대전이 있어요 (대전, 성심당)

  성심당을 튀소로만 알고 있으면 반도 모르는 거라구요? (성심당 Deep dive) (Writer's Pick)

이제는 부산어묵보다 더 유명해져 버린 어떤 부산어묵 (부산, 삼진어묵)

아마존에 K-호미 팔 생각은 도대체 누가 했을까? (영주, 영주대장간)


뉴 로컬 (신생 로컬 브랜드)

부산을 커피의 도시로 만들고 있는 그 카페(부산, 모모스커피) (Editor's Pick)

롤스로이스만큼 완성도도 높고 비싸다던 막걸리의 다음은? (해남, 해창막걸리) (Editor's Pick)

도대체 무슨 유튜버가 유키 구라모토를 김제에 오게 해? (김제, 오느른)

제주도에서 가장 제주스러운 곳이 어디냐 물으신다면 (제주, 해녀의부엌)

지금 가장 서울스러운 브랜드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서울, 젠틀몬스터)

카페진정성은 과연 어떤 진정성이 있었을까 (김포, 카페진정성)


글로벌 로컬 (해외 로컬 브랜드)

지역의 매력을 제일 잘 전달하는 세계 유일 로컬 편집숍 (일본 도쿄, 디앤디파트먼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서점 이야기 (프랑스 파리, 셰익스피어앤컴퍼니)

무인계산의 시대, 혹시 수다계산대는 들어봤어요? (네덜란드 베겔, 윰보)

졸라 겁대가리 없는 오트우유, 오틀리가 성공한 이유 (스웨덴 말뫼, 오틀리)

샌들에 양말 신는 나라에서 럭셔리 아이웨어가 나온다고?(독일 베를린, 마이키타)

로컬이 된 럭셔리 브랜드, 브루넬로 쿠치넬리 (이탈리아 솔로메오, 브루넬로 쿠치넬리)

커피보다 총 얘기를 더 많이하는데 상장까지 한 커피회사 (미국 유타, 블랙 라이플 커피 컴퍼니)


참고자료


https://news.ebs.co.kr/ebsnews/allView/60169211/N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europe/2021/11/13/VWXHJZR56ZFXTD2VGMUXONEEPM/

https://www.dutchnews.nl/news/2021/09/jumbo-opens-chat-checkouts-to-combat-loneliness-among-the-elderly/


https://nieuws.jumbo.com/jumbo-geeft-startschot-voor-opening-200-kletskassas/


https://www.vzinfo.nl/eenzaamheid/leeftijd-en-geslacht


https://dream.kotra.or.kr/kotranews/cms/news/actionKotraBoardDetail.do?SITE_NO=3&MENU_ID=180&CONTENTS_NO=1&bbsGbn=243&bbsSn=243&pNttSn=18736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