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얼굴 습관의 힘>을 보다가 다음 구절[1]에서 다른 책 내용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약 7만 년에서 10만 년 전에 일어난 문화적 진화의 위대한 개화와 복잡한 언어의 발달이다. 미국 작가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이를 위대한 약진(Great Leap Forward)'이라 불렀다. 갑자기 (지질 연대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전자를 변화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자신들의 집단이 소유한 비유전학적 정보, 즉 자신들의 문화를 변화시킴으로써 모든 것을 신속하게 해낼 수 있게 됐다.
중국에 살던 시절 샀지만 열어 보지 않다가 최근에 읽기 시작한 맥스 테그마크의 <Life 3.0>[2]의 내용인데요.
우리 인간은 태어난 뒤 (학습으로) 소프트웨어의 대부분을 얻는다는 사실도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라이프 1.0과 달리 우리의 최종적인 지적 능력은 잉태될 때 DNA를 통해 전해지는 만큼으로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테그마크는 생명을 다음과 같이 삼 단계로 구분합니다.
소프트웨어란 표현이 낯설 수도 있는데요. 다음 구절[3]에 도움을 줍니다.
항생제에 노출되는 박테리아는 여러 세대에 걸쳐 약에 저항성을 갖출 수 있지만, 개별 박테리아는 행동을 바꾸지 못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여자아이는 땅콩을 먹지 않는 쪽으로 바로 행동을 바꿀 것이다. 이런 유연성은 인구 차원에서 라이프 2.0이 지닌 훨씬 큰 강점이 된다.
맥스 테그마크의 <Life 3.0>의 내용을 조금 더 볼까요?
이 유연성은 라이프 2.0이 지구를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유전자의 족쇄에서 벗어나자 인류의 결합된 지식은 한 혁신이 다른 혁신을 낳으면서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해 왔다. 혁신은 언어, 쓰기, 인쇄기, 근대 과학, 컴퓨터, 인터넷 등으로 이어졌다. 문화적인 진화가 더욱 빨리 진행되면서 우리가 공유한 소프트웨어는 우리 인류의 미래를 형성하는 지배적인 힘으로 떠올랐고, 그래서 빙하가 움직이듯 느린 우리의 생물적인 진화는 거의 중요하지 않게 됐다.
이 문단에서 제가 흥미를 느낀 포인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전자의 족쇄에서 벗어난' 행동이 전에 없던 능력을 '창발'했다는 점입니다. 작년에 <인간은 특별한 기계이고, 지능은 창발적 현상이다>를 쓸 때만 해도 <듀얼 브레인>의 다음 구절에 등장한 '창발'의 의미를 지금처럼 느끼지는 못한 듯합니다.
인간과 기계 모두, 원자 수준에서 보면 특별한 게 없다. 다른 원소 조합, 다른 화학적 구조물이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의식, 사고, 지성 같은 것도 단지 복잡한 물질적 조합에서 emergent(창발)되는 현상일 뿐이라는 과학적·철학적 함의를 전달하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Same as Ever>에서 배운 바 더해지며 문화적 진화의 힘이나 시너지 따위를 모두 창발 효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성원이나 구성 요소 하나가 그 역량을 갖고 있지 않는데 결합하여 생기는 힘 말이죠.[4]
해당 구절이 선사한 두 번째 지적 자극은 '빙하가 움직이듯 느린'이란 비유가 알려준 바로 그 소프트웨어의 힘입니다. 저는 한동안 제가 배운 (컴퓨터 공학 수준에서의) 소프트웨어 정의가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대안은 아직 만들지 못했죠. 어디서 그 대안을 얻을 수도 있다는 기대期待가 생겼습니다.
책 43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은 자기 복제를 위한 정보 처리 시스템으로, 정보(소프트웨어)가 해당 개체의 행동과 하드웨어의 청사진을 결정한다.
맥스 테그마크의 표현을 따르면 라이프 1.0 단계에 해당하는 내용인데요. 이 단계에서 소프트웨어는 주로 DNA 중심의 유전 정보 체계를 말합니다. 인상 깊게 읽었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떠오르는데요. 그의 책에 반감을 지닌 사람이 많은 이유가 어쩌면 라이프 1.0 단계의 공통분모에 시선이 갈 때 주는 불편함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흐릅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제 관심에 가까운 소프트웨어 정의가 보이는 듯합니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부류는 곧 나머지 생명을 능가했고 몇몇 방식으로 환경에 대응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컴퓨터 과학자들이 '지능형 에이전트'라고 부르는 존재였다. 이는 감각기관으로 환경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처리해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했다. 이는 고도로 복합적인 정보 처리를 포함하는데, 예컨대 눈과 귀로 얻은 정보를 이용해서 대화에서 무어라고 말할지 결정할 때 그런 정보 처리 작업이 이뤄진다.
인간과 인공지능을 하나의 유형으로 보게 해 줬던 <AI 최강의 수업> 내용이 떠오릅니다.
더 따져 보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이쯤에서 다시 생각이 처음 시작한 <얼굴 습관의 힘>으로 돌아가 한 구절을 더 인용합니다.
이런 변화들은 예를 들어 말, 글, 사진과 TV, 컴퓨터 그리고 휴대폰에 의해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다. 인류에게 일어난 중요한 유전학적 변화는 수천 세대, 수만 년이 걸리지만, 중요한 문화적 진화는 한두 세대 이내 또는 이보다 더 짧은 기간 내에 일어날 수 있다.
무심코 독서를 한다고 하면, '유전학적 변화'와 '문화적 진화'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 척도로만 보고 다른 측면으로 바라보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얼굴 습관의 힘> 88쪽을 읽을 때까지 바로 그랬었죠. 그런데, 앞서 인용한 두 구절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 '아하, 라이프 2.0과 3.0'하며 일종의 발화가 생긴 듯합니다.[5]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는 이를 '인지혁명'이라 불렀던 듯합니다. 그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은 잊히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기억을 보충하려고 책을 다시 찾아봅니다. 첫 번째로 인용할 만한 내용은 다음 구절입니다.
가장 그럴싸한 해답은 바로 이런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언어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다.
최근에 쓴 글에서 '문화적 교류의 기초 단위가 말'이라고 썼던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이 길어져 여기서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데요. <얼굴 습관의 힘> 내용인데, 독자들에게 인식 혁명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주 밖에서 지구를 찍은 최초의 사진을 봤을 때 지구에 대한 인류의 생각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었는지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은 문화적 변화의 영향은 엄청나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수렵•채집 유목민들로 살아가는 역사적• 진화유전학적 경험으로 무장한 채 전혀 다른 현대적이고 산업화된 문화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해 오고 있다.
[1] <얼굴 습관의 힘> 91쪽
[2] 확실치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위챗을 만든 기업인 텐센트의 필독도서 목록에서 눈길을 끌어서 샀던 책입니다. 2019년 이전에 샀을 텐데요. 한 번도 열어 보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가 <월말김어준>에서 인공지능 전문가 둘과 함께 진행한 팟캐스트를 듣고, 급격하게 관심이 생겼는데 거기서 언급된 책도 아니지만 이 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3] 맥스 테그마크의 <Life 3.0> 47쪽
[4] 이는 느슨한 결합(loosely-coupled)에 대해 왜 강하게 끌렸는지 말해주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왜 내가 '창발'이라는 개념에 과도하게 끌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5] 그래서, 결과적으로 막스 테크마크가 말한 소프트웨어에 정의를 더 살펴보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건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합니다.
(197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97. 해마가 만드는 기억과 아미그달라(편도체)가 만드는 기억
198. 전쟁과 진화의 힘에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
199. 뉴-아메리카의 마에스트로가 된 실리콘밸리의 마스터
200. 뇌 속에는 외계인 같은 낯선 기계적 서브 루틴이 있다
201. 2025년 독서 목록과 독후감에서 보이는 행동 분석
202.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은 곤경에 빠지는 원인이다
203. 우리는 접근할 수 없는 현미경적인 역사의 소산이다
204. 남은 반평생을 인터스텔라 시대를 여는데 바치려는 사람
205. 미래지향적이고 뇌와 조화를 이루는 사법 시스템
206. 일론 머스크가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단 하나의 이유
208. 미래지향적이고 뇌와 조화를 이루는 사법 시스템
209. 리더가 관성에 빠지면 통제 불가능한 간접비용을 낳는다
210. X를 거의 쓰지 않는 나는 시대착오를 범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