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해마가 만드는 기억과 아미그달라(편도체)가 만드는 기억>에 이어서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의 5장 '뇌는 라이벌로 이루어진 팀'에서 밑줄 친 내용을 토대로 쓰는 글입니다.
가장 처음 밑줄 친 부분입니다.
기능의 중복이라는 비밀 덕분에, 예전에는 괴상한 임상적 수수께끼이던 현상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중략> 뇌의 일부(이 경우에는 피질)가 사라지면, 그 부위와 똑같은 기능을 지닌 저변 구조가 드러난다. 다만 성능이 좀 떨어질 뿐이다. <중략> 파충류는 피질이 전혀 없는데도 앞을 보지 않는가. 시각이 우리만큼 뛰어나지는 않아도, 파충류가 앞을 보는 것은 확실하다.
기능 중복이라는 비밀이 임상적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고 합니다. 밑줄 친 내용을 계속 보겠습니다.
라이벌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는 가설은 같은 자극을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뇌 모델을 제시한다. 뇌의 각 부분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던 과거의 희망에 종말을 고하는 모델이다.
첫 문장은 지난 글의 제목인 <해마가 만드는 기억과 아미그달라(편도체)가 만드는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좌뇌-우뇌 신화'를 만든 편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학자와 일반인 모두 뇌의 구체적인 위치에 각각 기능을 하나씩 부여하고 싶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 <중략> 이런 보도는 쉽게 뇌 영역을 구분하고 싶은 대중의 기대와 희망을 부채질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신경회로망이 저마다 독자적으로 발견한 다양한 전략을 이용해서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는 복잡한 세상을 잘 헤쳐 나가지만, 명확한 지도를 그리는 솜씨는 형편없다.
다음 다발말[1]에서는 외계인처럼 낯선 서브 루틴이라는 표현이 멋집니다.
'나'는 누구인가? 손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 아닌 환자 본인의 뇌다. 다만 환자의 의식이 그 프로그램에 접근하지 못할 뿐이다. 외계인 손 증후군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전혀 접근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며, '외계인'처럼 낯선 기계적 서브 루틴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말하기부터 커피 잔을 들어 올리는 동작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행동이 좀비 시스템이라고도 불리는 외계인 서브루틴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조종 당하는 사람들이 좀비처럼 보이는 일도 자연스러운 것이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서브 루틴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아주 명료하게 보여 줍니다.
초록색으로 인쇄된 단어 '파란색'을 제시하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무심코 불쑥 "파란색!"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하려다가 말고 "초록색!"이라고 내뱉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반응시간이 훨씬 느려진다. 막후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를 스트룹 테스트 혹은 스트루프 효과라고 부릅니다.
이어서 뇌 역시 여럿이 모여 하나로 움직인다는 설명입니다.
가자니가와 르두는 닭/삽 실험을 통해, 좌반구가 몸의 행동을 지켜보며 각각의 사건에 이치가 맞는 이야기를 부여하는 '해석자' 역할을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손상이 없는 정상적인 뇌에서도 좌반구는 이렇게 작용한다. 숨은 프로그램들이 행동을 주도하면, 좌반구는 그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현상은, 우리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고 추론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태도와 감정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중략> 이 메커니즘은 질서와 이성이 전혀 없는 곳에서도 항상 질서와 이성을 찾아내려 하기 때문에, 계속 실수를 저지른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설계 원칙이라 할 수 있는 느슨한 결합(loosely-coupled)은 뇌의 구성에도 통용된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저자는 1947년 뇌중풍 발작 증세로 보인 윌리엄 오 더글러스 대법관의 사례를 꺼냅니다.
이런 현실 날조는 뇌가 이치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인용하지 않습니다. 뇌가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쓴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임상 사례가 드러났다는 사실이 주안점입니다.
2장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력을 잃었는데도 여전히 앞이 잘 보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항상 가구에 부딪히는데도. 그들은 균형을 잃었다, 의자 위치가 바뀌었다 등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계속 부정한다. 불각증에서 중요한 점은 환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며 '인과관계' 개념을 떠올렸습니다. 인과관계는 어쩌면 자연현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뇌가 논리적 추론을 통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 하겠습니다.
전측 대상회 피질이 주로 담당하고 있다. 증거와 어긋나는 현상을 감시하는 이런 영역들 때문에,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생각 중 한쪽이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이 생각들을 조리 있게 이어주는 이야기나 한쪽을 무시해 버리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중략> 뇌는 우리 일상에 논리적인 패턴을 꿰매 넣으려고 24시간 내내 일한다. 방금 어떤 일이 있었고, 거기서 내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인가?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뇌의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뇌는 민주주의 체제의 다면적인 활동들을 조리 있게 조합하는 목적만 생각할 뿐이다.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된다.
글을 쓰느라 자연스럽게 다시 읽어도 신기하고 멋진 이야기입니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고 나면, 근육의 움직임에 대해 뇌가 이야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진다. <중략>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필요 없다. 우리는 페달을 밟으면서 자유로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뇌의 이야기 능력은 서로 상충하는 현상이나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벌어질 때에만 활동을 개시한다.
뇌가 효율적으로 쓰이려고 자율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정말로 흥미롭습니다. 더불어 주말에 둘째 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며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운동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억이 생기지 않아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원문이 'Patternicity'란 점을 알게 되면 다음 다발말에 등장하는 번역 단어 '패턴화'보다는 '패턴성'이 나아 보입니다.
정신은 패턴을 찾으려 한다. 과학 저술가 마이클 셔머는 '패턴화'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무의미한 데이터에서 구조를 찾으려는 시도를 일컫는 말이다. 진화는 패턴 추구를 선호한다. 수수께끼를 줄여 신경 회로 안에 빠르고 효율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갑게도 마이클 셔머의 Patternicity 페이지가 있습니다.[2]
<시작의 기술>에서 개리 비숍은 무의식이 우리를 통제하는 비중이 95%라고 합니다.
우리 의식이 언제 작동하는지 생각해 보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우리의 기대나 예상과 어긋날 때다. 모든 것이 좀비 시스템의 필요와 솜씨에 따라 진행될 때는 우리 의식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한다.
저자는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의 비대칭적인 인식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직장을 향해 차를 몰고 처음 출근하는 날, 사람들은 도착할 때까지 보이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출근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중략> 마음대로 다른 생각을 해도 되기 때문에, 마치 집에서 나와 눈을 한 번 깜짝했을 뿐인데 직장에 도착한 것처럼 느껴진다. 좀비 시스템이 여느 때처럼 전문적인 솜씨로 알아서 일을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진화의 관점으로도 설명을 해 줍니다.
좀비 시스템이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있는 동물은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인지적으로는 유연성이 없다는 것. 간단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는 경제적인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지만, 한 프로그램에서 다른 프로그램으로 신속하게 옮겨가거나 뜻밖의 새로운 과제에서 전문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신속히 설정하지는 못한다.
의식의 존재는 유연성을 부여하는 일인가요?
유연성이라는 말이 좋게 들리겠지만,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연성의 대가는 바로 장기간의 육아 부담이다. 유연한 성인이 되려면, 무력한 아기로 몇 년을 보내야 한다.
장기간의 설계 업무와 아키텍트 역할로 인해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내용입니다.
나는 상충하는 좀비 시스템들을 성공적으로 중재하는 능력이 의식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용한 지표라고 본다.
아키텍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개념이 Trade-off 즉, 상충 관계죠.
라이벌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는 가설 안에서는 비밀이라는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밀은 뇌에서 정당들이 서로 경쟁하며 투쟁한 결과다.
낯선 이에게 비밀을 털어넣고 싶다는 충동은 술 마실 때 자꾸 튀어나오는 듯도 합니다.
비행기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 자신의 가정불화에 대해 시시콜콜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하고, 세계 최고의 종교 중 하나인 가톨릭에서 고해소가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기도의 매력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신자의 말에 전적으로 귀를 기울이며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몹시 친밀한 신들을 지닌 종교에서 기도의 매력이 크다. 낯선 사람에게 비밀을 말하고 싶다는 이 오랜 욕구의 변형은 온라인 익명 게시판의 형태를 띠고 있다. <중략>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보통 순전히 비밀을 털어놓기 위한 행위이지 조언을 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중략> 정말로 비밀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밀을 말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다음 내용을 포함하는 단락의 제목은 'C3PO는 어디에'입니다.
나는 라이벌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는 가설이 인공지능 연구의 발목을 풀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갑자기 왠 C3PO일까요?
생각할 줄 아는 로봇을 만들고 싶다면, 단순히 각각의 문제를 영리하게 해결하는 하위 에이전트를 고안할 것이 아니라 서로 겹치는 해결책을 지닌 하위 에이전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서 서로 경쟁시켜야 한다. <중략> 생물학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서로 조금씩 겹치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공략하는 존재들을 한 팀으로 길러내는 방법이 더 낫다는 점이다.
'생각의 사슬CoT, chain-of-though'의 등장과 Agentic AI로 나아가는 빅테크의 흐름을 보면 저자의 전망이 딱 들어맞은 듯합니다.
기술은 지금까지 민주적인 구조, 즉 라이벌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는 가설을 이용하지 않았다. 컴퓨터는 전문화된 부품 수천 개로 만들어졌지만, 그 부품들이 협동하거나 언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나는 갈등을 기반으로 한 민주적인 조직(라이벌들로 이루어진 팀 구조라고 요약할 수 있다)이 생물학에서 영감을 얻은 기계의 풍요로운 새 시대를 열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물학에서 영감을 얻은'이라는 말은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강조되는 '유기적인'이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3]
누구도 반유대주의적인 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때로 외계인 시스템을 감염시키는 외국인 혐오증이라는 병을 우리가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인지적 제어라는 수면보다 한참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1]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편, TED 강연에서 패턴화와 함께 "에이전트성(agenticity)"을 말하는데 인상 깊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영상을 보고 직관적으로 느낀 바는 AI 기술이 agent 기반으로 발전하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생각이었습니다.
[3] 책의 주제에서는 벗어나서 여기서 다루지는 않지만, 제가 <묻고 따져서 개념을 만들고 실행하는 디지털 전환> 연재를 하며 최근 주목하는 내용이라 흥미롭습니다.
1. 우리는 이 행성에서 가장 분주하고 밝게 빛나는 존재다
2. 자동으로 움직이는 뇌에서 선택의 주체는 누구인가?
4. 정신세계의 일들은 대부분 의식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
5.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생명현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7. 시각이 세상을 충실하게 표현한다는 널리 퍼진 착각
8. 우리는 실제 세상이 아니라 뇌가 보여주는 것을 인식한다
9. 뇌가 추측을 최대한 동원해서 정보를 더 크게 키운다
10. 눈이 아니라 뇌(머리)로 보는 것이라 해야 할까?
11. 뇌는 두개골 안에서 절대적인 어둠 속에 갇혀 있다
12. 뇌는 자신의 실수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13. 의식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다양한 형태의 암묵 기억
15. 움벨트 밖으로 나아가는 모험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16. 우리 행동의 엔진 역할인 본능을 우리는 볼 수 없다
17. 인종차별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공존하는 뇌
19. 율리시스의 계약이 알려주는 타인의 말에 경청할 이유
20. 해마가 만드는 기억과 아미그달라(편도체)가 만드는 기억
(184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84. 우리 뇌에 프로그래밍된 정신의 양당제 민주주의
185. 데이터의 폭발적인 성장이 지구의 진로에 영향을 끼친다
186. 미국의 작동 방식을 팔란티어 소프트웨어가 대체한다
188. 스토리는 언제나 통계보다 힘이 세다
191. 율리시스의 계약이 알려주는 타인의 말에 경청할 이유
192. 소프트웨어의 꿈은 인공적인 자연 상태가 되는 것이다
193. 어디에나 통하는 건강한 성장의 비밀
196. 성장과 발전은 그것을 막는 힘과 싸워야 한다, 언제나
197. 해마가 만드는 기억과 아미그달라(편도체)가 만드는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