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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Dec 05. 2022

전해줄 수 없는 편지

기억 속 내 이야기



'은미 다섯 살만 넘으면 엄만 아빠랑 안 살 거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

4학년 어느 날 오후에 엄마는 진짜로 집을 나갔다.


평범한 날이었다.

"엄마, 잠깐 나갔다 올게. 늦으면 밥 해놓은 거 먼저 챙겨 먹어."

직감적으로 느낌이 이상해 문이 조금 열려있는 작은방 창문을 슬쩍 보았다. 밖에서 가방을 내릴 수 있도록 창문이 열려있고 창문 틈에 큰 가방이 놓여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회사 갔다 오면 전해주라며 잘 봉해진 편지 몇 장을 주었다. 낯설지 않은 편지였다.


나와 언니는 엄마가 집을 나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엄마가 편지를 적기 시작했는데 서랍 옆에 봉하지 않은 편지가 궁금해 엄마가 없는 틈을 타 몰래 읽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편지 내용은 엄마가 미안하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엄마를 이해할 날이 올 거다, 엄마가 없어도 잘 커야 한다, 다시 꼭 보자는  그런 내용이었다.  우리 각자에게 보내는 편지와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아직 완성하지 않은 편지들이었다.

아, 엄마가 진짜 집을 나갈 생각인가? 설마. 우리를 두고? 아닐 거야. 편지를 읽었지만 애써 부정했다.


그 몇 달간 엄마는 무언가 생각이 많은 듯했고 반찬을 양껏 많이 하고 집안을 깨끗이 치우기도 했다. 

"엄마가 언니한테만 긴히 할 얘기가 있어."

몇 주전 엄마는 다락방으로 언니만 불렀다. 엄마는 다락문을 닫고 언니와 조용히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평소답지 않은 엄마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무슨 이야기 했어?"

방으로 내려온 언니에게  냉큼 붙어서 물었다. 언니는 멋쩍은 듯 별 것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내가 계속  캐묻자 엄마가 그만 물어보라는 듯 말을 잘랐다

"그냥, 언니랑 엄마만 아는 이야기야. 너는 한 참 뒤 이야기라 몰라도 돼."

나중에 언니가 말을 해 주었다. 좀 더 크면 생리를 할 텐데... 깨끗하게 잘 처리하라는 그런 얘기였다고 했다.

그 뒤로도 조금씩 편지를 쓰는 것을 알았지만

아니길 바래서였을까. 우린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대로 엄마를 대했다. 



그날, 집에는 내 친구 두 명이 놀러 와 있었다.

"엄마 언제 와?"

"... 금방 갔다 올게."

"엄마 100원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엄마 100원만 하고 손을 내밀었다.

엄마는 평소에는 돈을 잘 주지 않았는데 백원이 아니라 천 원을 주었다. 

돈을 쥐어주고는 엄마는 나와 언니를 한 번씩 꼭 안았다.  그리고는 신발을 신고 가버렸다.

엄마가 가버리는 걸 알면서도 엄말 잡지 못했다. 친구들이 아는 것이 부끄러웠다. 엄마가 간 후 언니랑 슈퍼에 달려가 오이를 사고 과자도 사 먹었다.  

저녁이 되자 언니와 난 걱정이 되었다.  이걸 어떻게 아빠에게 전해주지? 엄마는 왜 이런 무시무시한 편지를 우리에게 주라고 했을까. 부담감과 압박감이 커졌다.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아빠가 퇴근하고 오셨다. 모르면 모를까, 내용을 알면서 차마 아빠에게 전해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는 당연히 엄마가 잠깐 외출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빠는 근처에 사는 친척집에 잠깐 다녀 오겠다며 나가셨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우리는 아빠가 오기 전에 잠든 척하고 편지를 방바닥에다 놓았다.

그러다 진짜로 잠들어버렸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아빠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냐.. 엄마가 집을 나갔다.  흐흑 이제 어떻게 사냐..."

나도 이불을 쓰고 소리 죽여 울었다.

내가 엄마를 잡았어야 했는데 친구들한테 부끄러워 제대로 온 힘을 다해 말려보지도 못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날 그 돈으로 산 오이가 떠올라 한동안 오이를 먹지 못했다. 오이를 볼 때마다 바보 같았던 그때의 내가 집을 나가는 엄마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끔 그날을 재구성해본다.  나는 앞뒤 생각 없이 울고불고 매달린다. 

엄마, 가지 마! 어떻게 우리를 두고 갈 수 있어? 사실 우리 엄마 편지 다 알고 있었어. 그렇게 아무 데나 놔두는데 우리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엄마, 지금 가면 안 올 거잖아. 우리는 눈치가 없는 줄 알아? 창문에 짐가방 가지고 가려고 하는 것도 다 알아! 우리가 중요해? 그 아저씨가 중요해? 

어떻게 우리를 두고 갈 수 있냐며 악다구니를 쓴다. 친구들은 벙쩌서 어색하게 주춤거리다 집으로 돌아간다. 엄마는 당황하다 눈물을 흘리고 나를 안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고 한다.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까? 엄마가 가지 않았을까? 그건 아니었을 거다. 나는 힘없는 아이에 불과하니 어른들 문제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을 거다. 이미 결정한  큰 흐름이 작은 사건 하나로 바뀌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두고두고 후회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건 대면하고 저항하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불편한 문제를 아닌 척 외면하면서 마음속으로 숨겼다. 점점 나는 내 감정을 느끼는 데 의심이 들었다. 이게 지금 화가 나는 건지 분노인지 슬픈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갈등 상황이 닥치면 참을 수 없이 불편했다. 마땅히 화가 나야 할 것 같은데 나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눈치를 보며 그냥 수긍하고 따랐다. 그렇게 웬만해선 이해하고 넘어가며 살다 보니 순한 아이, 착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지 않도록 가리고 숨겼던 것은 수면 위에 드러난 결과이고 수면 아래 거대하게 쌓인 실체는 내 다양한 감정, 특히 부정적인 내 감정을 덮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른이 되어 수많은 심리서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엄마의 이름 앞 이야기>

1. 시작

https://brunch.co.kr/@miyatoon/20

2. 프롤로그-영웅 영숙이

https://brunch.co.kr/@miyatoon/37

3. 우리 영숙이는 선생님 시킬 거라......

https://brunch.co.kr/@miyatoon/38

4.호랭이는 뭐하나 저 간나 안 물어가고!

 https://brunch.co.kr/@miyatoon/41

5. 와야 국민학교

https://brunch.co.kr/@miyatoon/43

6. 뽕 따러 가세

https://brunch.co.kr/@miyatoon/44

7. 남의 집 살이

https://brunch.co.kr/@miyatoon/45

8. 진모 엄마는 키가 시집가서 컸어.

https://brunch.co.kr/@miyatoon/46

9. 내 살림과 아이들

https://brunch.co.kr/@miyatoon/47

10. 도시로 떠나다

https://brunch.co.kr/@miyatoon/48

11. 어두운 터널 속에서

https://brunch.co.kr/@miyatoon/49


<기억 속 내 이야기>

1. 맨드라미는 소환 버튼

https://brunch.co.kr/@miyatoon/52

2. 단칸방의 추억

https://brunch.co.kr/@miyatoon/53

3. 더 이상 기댈 수 없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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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학년에 겪은 찐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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