⑰ 베를린 영화제 '죽여주는 여자' 관람기
베를린은 이번 여행의 기착지였다. 뤼겐 섬으로 향하기 전 채비를 정비하기 위해 잠시 머문 도시였다. 독일의 여러 도시 중에서 베를린을 기착지로 정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베를린 영화제도 그중 하나였다. 우연하게도 여행 일정과 베를린 영화제 일정이 겹치는 것을 보고 베를린을 기착지로 정했다.
베를린 영화제 티켓은 구하기 어려웠다. 폐막 전날 오후에 베를린에 도착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인터넷 예매로만 티켓을 구해야 했다.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었지만 경쟁이 치열했고, 아무래도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들보다는 관심이 덜한 한국 영화를 보기로 했다. 베를린 영화제는 다른 국제 영화제에 비해 티켓 구하기가 쉽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비경쟁부문 영화들도 예매 전쟁을 치러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가까스로 베를린 도착 이틀 전에야 예매에 성공했다.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였다.
사실 <죽여주는 여자>에 대한 기대감은 크지 않았다. 이재용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다소 종잡을 수 없었고, 그의 영화에 대한 신뢰도를 낮추는 요인이 됐다. 이재용 감독은 <스캔들>, <다세포 소녀>, <여배우들>, <두근두근 내인생> 같은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죽여주는 여자>에 손이 간 것은 윤여정이라는 배우 덕분이었다.
나는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좋다. 어느 순간부터 조연의 자리로 물러났지만 그럴수록 더 빛이 나는 배우였다. 윤여정은 <죽여주는 영화>에서도 팔색조처럼 빛난다. 어떤 때는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어떤 때는 남자의 마음을 확 휘어잡는 팜므파탈을 연기한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엄마 같다가도 옆집 아줌마처럼 보이기도하고,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할머니들처럼 안쓰러워 보이다가도 갑자기 사람을 죽인다. 1시간 50분 동안 배우 윤여정은 스크린 안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살아온 지난 70여 년의 인생이 이 영화 안에 녹아 있었다.
윤여정이라는 배우만 빛나는 영화였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죽여주는 여자>는 배우 윤여정을 내세워 수많은 문제들을 건드린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Bacchus Lady>다. 탑골공원에서 박카스병을 들고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바로 그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시놉시스
65세의 소영은 서울 도심의 오래된 공원에서 가난한 노인들을 상대로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몸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는 ‘박카스 할머니’다. 소영은 젊은 시절 미군 병사와의 사이에 태어난 흑인 혼혈 아들을 돌도 안되어 입양 보낸 아픔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성병으로 들른 병원 앞에서 엄마를 잃은 코피노 소년을 우연히 만나 집으로 데려 오게 된다. 소영은 트랜스젠더바 마담인 티나(50)의 집에 장애를 가진 가난한 청년 도훈(31), 나이지리아 여자 아딘두 등과 세를 들어 살고 있다. 소영은 애 엄마를 찾기 위해 애를 쓰면서 동시에 매춘 일을 계속해 나간다. 어느 날 소영은 한때 그녀의 고객이었던 재우(75)로부터 또 다른 단골 고객 송노인(81)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병원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간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송노인은 소영에게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하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갈등하던 그녀는 그를 돕기로 마음먹고 그의 죽음을 돕는다. 재우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게 된 소영은 재우로부터 치매로 고생하는 자신의 친구도 죽여줄 수 있는지 부탁을 받게 되고 완강히 거절하지만 결국 그 마저 죽여주게 된다. 마침내 외로움에 지친 재우 마저 소영에게 조력 자살을 부탁하게 되면서 소영은 점점 커다란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이기도 한 '죽여주는'은 중의적인 의미다. 배우 윤여정이 맡은 '소영'은 탑골공원에 모이는 박카스 레이디 중에서도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였다.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던 소영은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단골손님들을 진짜로 죽여주게 된다. 영화 이름 그대로 죽여주는 여자다.
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지점은 한국 사회의 노인 문제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고, 노인 빈곤 문제도 심각하다. 소영이 죽여주는 노인들은 모두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송노인의 손주들은 병실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에게서 냄새가 난다며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재우의 친구는 치매를 앓으며 죽어가지만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재우 역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그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유일한 사람이 매춘부라는 현실은 암담하다. 소영은 한 번에 2만 원을 받고 남자의 성욕을 풀어주는 매춘부지만, 단골손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주면서 천사로 거듭난다. 소영의 단골손님들은 그를 매춘부나 저승사자가 아니라 천사로 본다. 소영을 매춘부로 보는 것은 우리들 뿐이다.
소영이 세 들어 사는 집은 한국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보금자리다. 집주인은 트렌스젠더바 마담이고, 소영과 함께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한쪽 다리가 없는 청년, 마트에서 일하는 나이지리아 여성이다. 그 와중에 소영은 길 잃은 코피노 소년을 데리고 들어왔다. 트랜스젠더, 한쪽 다리가 없는 청년, 나이지리아 출신의 흑인 이주 여성, 코피노 소년. 이들은 모두 한국 사회에서 거부당한 채 어두운 골목길로 내몰렸다. 하지만 그 안에 삶이 있다. 이들은 옥상에 모여 피자 파티를 벌이기도 하고, 밀린 월세를 독촉하지도 않고, 날씨 좋은 주말에 다 함께 드라이브를 나서기도 한다.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수많은 한국인들보다 그들의 삶이 더 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노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정상적인' 한국인들보다 노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해준 매춘부 소영의 선택이 더 '정상적으로' 보인다.
사실 그래서 이 영화는 판타지 혹은 동화처럼 보인다. 소영과 그의 주변인들은 한국 사회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정상적이다. 재우 할아버지에게 받은 돈의 대부분을 호텔 앞 절에 들어가 시주함에 넣는 장면이나 소영이 경찰차를 타고 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판타지다. 이재용 감독이 앞선 영화들에서 시도했던 판타지적 요소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나고 난 다음에는 마음이 무거워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영화가 상영된 베를린의 'KINO INTERNATIONAL' 극장에는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군데군데 한국인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독일인들이었다. 영화제답게 영화는 무대의 커튼이 걷히면서 시작됐다. 사회자가 나와 영화제의 결과를 대략적으로 전달해줬고, 영화에 대해서도 짧게 소개했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많은 관객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관객들은 영화관을 나서면서도 쉴 새 없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적지 않은 관객이 중년 이상의 나이였고, 그들은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에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많은 외신이 <죽여주는 여자>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렸다는 뉴스를 봤다. 영화가 끝나고 현지인들의 표정에서 이미 읽을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한국에는 올여름쯤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개봉하면 다시 볼 생각이다.
프롤로그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⑨ 빈 미술사 박물관
⑩ 프라하에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⑪ 플젠 필스너 우르켈 공장
⑫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카르멘>
⑬ 프라하 <슬라브 서사시>
⑭ 프라하 <무하 미술관>
⑮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⑯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