⑱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베를린은 봄을 맞이한 곰처럼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곰의 포효를 듣고 싶다면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을 가면 된다. 베를린 중앙역에 바로 근처에 자리 잡은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은 원래 기차역이었다. 1847년에 지어져 19세기 말까지 함부르크와 베를린을 오가는 기차가 정거했다. 이후 교통박물관으로 잠시 사용됐다가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무너지면서 긴 시간 동안 폐허로 방치됐다. 기차역은 1987년 '베를린으로의 여행'이라는 전시회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이후 스위스의 큐레이터인 헤럴드 제먼이 이 곳에서 현대미술 전시회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다. 베를린의회는 1989년 이곳에 현대미술관을 짓기로 했고, 1996년이 되어서야 개관했다.
기차역에서 박물관으로, 박물관에서 폐허로, 다시 폐허에서 미술관이 되기까지 15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어찌보면 베를린의 역사와도 닮아 있다. 독일의 중심이었던 베를린은 두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됐다. 전후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같은 다른 도시들이 발전할 때도 베를린은 과거에 머물렀고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각인됐다. 하지만 이제 베를린은 완전히 달라졌다. 베를린은 독일의 중심으로 거듭났을 뿐 아니라, 유럽의 중심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정치, 경제뿐 아니라 미술과 예술에서도 베를린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최신 흐름을 확인하고 싶다면 베를린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이 있다.
현대미술관은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나눠져 있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중앙전시실이 첫 번째다. 현대미술관은 기차역의 골조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중앙전시실에 들어서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3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공간에 단 두 개의 설치미술만이 전시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폴 맥카시의 <SALOON THEATER>가 인상적이었다. 어디가 입구고 어디가 출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나무로 된 극장이었다. 간신히 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도 어두운 공간에서 손을 더듬으며 다시 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극장 안에 들어가면 충격적인 영상과 소리가 끊임없이 반복 재생된다.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여성의 모습이 계속해서 반복 재생되고 있고, 여성의 신음소리와 욕설이 극장을 가득 메운다. 현대미술계에서도 극단에 서 있다고 평가되는 폴 맥카시의 작품다웠다. 극장 안으로 다른 관람객이 들어올 때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민망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금기라고 생각되는 것, 터부시 해왔던 것을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것은 쉬운 경험이 아니었다. 관람객들은 고매한 예술적 공간이라고 여겼던 미술관에서 자신의 가장 본능적인 내면을 확인하게 된다. 성적인 판타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이 작품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중앙전시실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정말 거대한 현대미술 전시 공간이 나온다. 특이한 점은 중앙전시실과 또 다른 전시 공간을 이어주는 통로 곳곳에 통유리가 설치돼 있다는 점이다. 현대미술관 밖에서는 실제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관람객들은 통로의 통유리를 통해 공사 현장마저 예술 작품의 하나로 관람하게 된다. 공사 현장을 하나의 설치미술로 바꾼 미술관의 재치에 탄복했다.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에는 정말 많은 수의 현대 미술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몇몇 작품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번 동유럽 여행에서 가장 감명 깊게 봤던 제체시온의 <베토벤 프리즈>를 변용한 작품도 있었다. 이 작품은 전시 공간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중앙에 베토벤 프리즈를 패러디한 설치미술이 있었고, 그 옆에는 축소본이 함께 전시 중이었다. 철제 빔으로 얼기설기 세워놓은 공간에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프리즈가 빨래처럼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오락실 게임기를 줄지어 설치해 놨다. 관람객들은 게임기 앞에서 각자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빈의 제체시온에서 베토벤 프리즈를 넋을 놓고 보던 사람들과 이곳에서 게임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작가의 의도가 어렴풋이 짐작이 됐다.
베를린이 왜 현대미술의 중심지 소리를 듣는지 이해가 됐다. 클림트와 베토벤이라는 유럽 예술의 큰 유산을 이렇게 재치 있게 비틀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베를린에서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재치 있는 변주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미술관에는 백남준의 작품도 있었다. 백남준의 <I AM FLUXUS> 작품 두 점이 전시돼 있었다. 플럭서스는 백남준이 참여했던 전위예술운동이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는 플럭서스 참여를 통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이런 배경을 모르고 본다면 백남준의 <I AM FLUXUS>는 그저 장난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대로 이런 배경을 인지하고 작품을 관람하면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플럭서스, 백남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가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들도 많았다. 요제프 보이스는 펠트나 기름덩어리를 주로 활용해 전위예술을 한 작가였다. 2차 세계대전 도중 전투기를 몰다 추락한 경험을 살려 이후 예술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현대미술관에 전시 중인 작품들은 그가 말년에 한 작업의 결과물들이었다. 사실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은 눈으로 보아야지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대신 그가 남긴 말을 통해 그만의 예술관을 짐작할 수 있다.
"완고한 이성주의로 무장한 인간보다 토끼가 더 잘 이해한다. 그림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저 훑어봐야 한다고 토끼에게 말해주고 있다."
"미술 작품의 조형 과정은 사회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은유이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은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미술관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들어가면 앤디 워홀의 작품들이 나온다. 앤디 워홀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마오>가 전시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그 양 옆으로 앤디 워홀의 작품들이 제법 많이 전시돼 있었다. 하지만 앤디 워홀의 작품들은 앞서 관람한 현대미술에 비해 낡고 진부한 것처럼 느껴졌다. 앤디 워홀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그의 작품들을 꼼꼼히 봤지만,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그의 작품을 곳곳에서 너무 많이 접한 탓일까. 원작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미래에는 누구든 15분만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앤디 워홀이 말했었나. 그에게 주어진 15분이 이미 지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사이 툼블리의 작품도 있었다. 두 작가는 앤디 워홀에 비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작가들인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둘의 작품에 더 눈길이 갔다. 사이 툼블리의 <Thyrsis>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하얀 벽에 누군가가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지하철 벽에 휘갈겨 써놓은 낙서 같기도 했다. 미술작품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머리를 관통하는 첫인상이 그의 작품에서는 없었다. 그만큼 사이 툼블리의 작품은 자유롭고 경쾌했다. 거대한 마오의 그림 앞에서처럼 속으로 그림의 가격을 가늠해볼 필요도 없었다. 툼블리의 작품도 만만치 않게 비싸겠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있을 때는 그런 것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2층 전시실에는 일련의 회화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나치 미술(Nazi Art)에 속하는 작품들이었다. 아마 베를린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나치 미술은 2차 세계대전 즈음 히틀러의 파시즘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일 나치에 협력한 미술가들의 작품이 많고 그에 저항한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있다. 전시실에는 몇 개의 조각상들, 그리고 그림들이 전시 중이었다. 조각상들은 독일인의 신체적 우수성을 표현하는데 집중해 있었다. 그림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몇몇 그림을 제외하면 독일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 전쟁을 미화하는 그림들이었다. 전날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을 갔다 와서 인지 이런 그림들을 보는 마음이 더 착잡했다. 예술의 역할, 존재의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게 됐다.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보이지 않게 저항을 시도한 작품도 있었다. 한 그림은 겉으로 보기에는 독일군의 우수성을 그린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엑스레이로 투사해보면 밑그림에는 히틀러를 학살자로 묘사해 놓았다.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은 하루에 다 돌아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작품 하나하나가 꼼꼼한 관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충 훑어보며 넘어갈 수도 없었다. 대신 투자한 시간에 비례해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는 미술관이기도 했다. 미술관에는 평일 오전 시간인데도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많았다. 10대 청소년들이 부모에게 작품의 배경이나 의미를 설명해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베를린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미술관을 나왔다.
프롤로그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⑨ 빈 미술사 박물관
⑩ 프라하에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⑪ 플젠 필스너 우르켈 공장
⑫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카르멘>
⑬ 프라하 <슬라브 서사시>
⑭ 프라하 <무하 미술관>
⑮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⑯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공원
⑰ 베를린 영화제 '죽여주는 여자' 관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