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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May 03. 2024

온인 나로 또는 쪽인 나로 마주하기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서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책의 '03. 나와 남' 내용을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온인 나 혹은 쪽인 나로 마주하기

'온인 나와 쪽인 나'를 다시 만납니다.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내가 남을 단순히 대상으로서 마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대상을 임자로서 마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 삶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읽게 됩니다. 2015년까지 저는 적어도 직업 공간에서는 '내가 남을 단순히 대상으로서 마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은 이제는 '내가 대상을 임자로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특하게 저는 이를 XP 책을 통해서 깨우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거기에 더하여 <당신이 옳다>에서 배운 사람에게 공감하는 법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묻따풀 활동 따위가 점점 '쪽인 나'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돕는 듯합니다.


내가 남을 임자로서 마주하는 일

<당신이 옳다>를 통해 충조평판을 참는 법을 배우고 나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않고, 제 말을 준비하는 일은 상대를 무시(無視)하는 일이었구나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미처 몰랐네요.)

<당신이 옳다>에 따르면 정서적으로 '내 편 인증'을 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런 행동이 상대를 임자로 보게 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인 나로 대상을 마주하기

온인 나로 상대를 대하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나는 오로지 나의 뜻에 따라서 남을 단순히 대상으로서 마주한다. 예컨대 내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낙지를 먹을 때, 나는 오로지 나의 뜻에 따라서 낙지를 단순히 대상으로서 마주한다. 내가 죽어가는 낙지의 아픔을 알아주게 되면 차마 그것을 먹을 수가 없다. <중략> 이때 나와 남이 뿌리를 함께하는 것은 그저 세상에 함께 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 포기말은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한국인은 남을 단순히 대상으로서 마주하고 싶을 때, 그것을 '~ 것'이라고 말하는 일이 많다.

사물을 '것'으로 부르는 것이야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고했듯이 저도 과거에는 프로젝트를 할 때면 그의 욕망이나 욕구 따위는 뒤로 미루고 공적으로 합의한 일에 대한 책임과 의무만 앞세우면 살았습니다. 그런 일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2015년 멈추고 '지속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는데, 드디어 목적을 달성한 듯합니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네요.


지난 주말에 올렸던 <이 사건이 창작자들과 자본가들의 갈등이었을까?>에 소개한 기자들의 행태를 보면 여전히 사람은 대상으로만 대하는 '온인 나'가 팽배한 현장이 있습니다. 일단, 개선을 위해서는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온인 나에 대한 부연[2]에 해당하는 포기말을 추가합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상대하는 사람을 마구 다루고 싶을 때는 사람조차 '~ 것'으로 끌어내려서 '상것', '잡것', '아랫것'과 같은 말로써 일컫고자 한다.


쪽인 나로 대상을 마주하기

이번에는 제가 지향하는 '쪽인 나'입니다.

나는 남을 나와 같은 임자로서 뜻을 같이하여 마주한다.

'뜻을 같이하다'가 무슨 말일까요? 다행스럽게 바로 예시가 부연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할 때, 나는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은 임자로서 뜻을 같이하여 마주한다.

얼마 전 책 나눔으로 하던 경험을 떠오르게 합니다. 나눔을 하는데, '거래'라는 표현이 나와서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공교롭게 직전에 <시간과 시장이 알려 준 거래와 일상의 의미>를 쓰며 '거래'가 去(갈 거)와 來(올 래)를 씨말로 하는 말로 꼭 금전 거래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이를 다시 상기시키는 장면입니다.

'쪽인 나'는 반려견을 임자로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집안에 귀여운 개를 키울 때, 나는 그 개를 나와 같은 임자로서 뜻을 같이하여 마주한다.

그리고 다음 포기말은 저에게 XP와 함께 '점수(漸修)'를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남을 나와 같은 임자로서 알아주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남이 나와 같은 임자임을 깨닫고 그렇게 여기는 데까지만 남을 임자로서 알아줄 수 있다. 나와 남이 임자로서 마주하게 되면, 나는 뜻을 오로지 할 수 없고, 일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관계에 놓인다.


주석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을 실천하기 위해 사전을 찾습니다. 敷(펼 부(와 衍(넘칠 연)을 씨말로 하며 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덧붙여 자세히 말함.
「2」 늘려서 널리 폄.

씨말의 바탕을 이해하려고 한자 사전도 찾아봅니다.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5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51. '되다'와 삼국시대의 풍류(風流)를 알게 하는 실마리

52. 바람, 덕분 그리고 되는 일의 바탕

53. 내가 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인식될 수 있다

54. 나를 나답게 만드는 삶의 차림판

55. 과연 사람의 말이 서로 엮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56. 한국말 '나이'의 바탕에 있는 엄청난 비밀

57. 나의 갈래 그리고 내다, 나답게, 사람답게

58. 나와 남은 모두 난 것으로서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

59.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60. 내가 보는 사실과 다른 사람이 보는 사실을 함께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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