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여자(이제 젊고 예쁜, 이라는 수식어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화면에 나오는 좀비의 행동과 특성을 분석했다. 좀비의 행동 패턴은 언제나 내 예측에서 한치의 틈도 벗어나지 않는다. 늘 길모퉁이 끝에 식인 본능을 감추고 있다가, '기다려봐, 놀라게 할 거야, 그럴 거야, 이제 화들짝 놀라가 될 거야',라고 숨을 몰아쉬다가 결국 불쑥 튀어나오거나, 혹은 자동차 뒷자리에 몰래 누워있다가 보조석 쪽으로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과 피맛을 잔뜩 본 혀, 그리고 온통 충치로 뒤덮여버린 이빨을 쑥 내밀어버린다. 그게 아니면 작은 방 침대 밑에 엎드려 있다가 잠시 낮잠이라도 즐기려는 주인공을 낚아채며 휴식을 방해해 버린다. 좀비란 그런 존재다.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는, 말하자면 그 세계에서는 나름 강력한 돌발 변수인 그 무엇.
“앗, 아악!” 나는 그만 옆자리에서 터져 나온 다급한 비명소리에 심각하게 놀란 나머지 엉덩이에 붙은 허벅지를 들썩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소리의 진앙지는 다행히도 내가 아니었다. 망신살 뻗칠 뻔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노트북이 거의 바닥에 추락할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사건은 멀쩡한 양팔과 나의 노련한 대응력 덕분에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잠시 쓸어내리며 좀비가 튀어나오는 장면보다 더 심각한 충격을 입힌 대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사건의 발생 원인은 옆자리 티켓 14번에게 있었다. 예쁜 얼굴은 모든 걸 용서하나 보다.
14번 티켓을 든 여자는 아마도 아까부터 내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나 보다. 음, 한국 사람은 역시 좀비 영화를 즐기는 게 분명하다. 14번 티켓을 든 여자도 그러한 유형에서 결국 어긋나지 않는 걸까?
“대체 그런 좀비 영화는 왜 보는 거예요?” 그 여자는 이렇게 또박또박하게 그리고 그 말속엔 조심스러운 염려와 걱정거리를 잔뜩 버무려놓은 투로, 마치 식당에서 기다리는 음식이 대체 언제 나오냐고 짜증 내는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 좀비 영화를 보고 안 보고는 개인의 취향과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옆자리 당신, 14번 티켓을 든 여자는 버스 티켓을 구매했지 현재 상영 중인 내 영화의 티켓을 구매한 사실이 없다. 이건 저작권적인 문제가 아닌가. 그저 내 자리였어야 하는 자리에 앉아서 단지 내 옆자리라는 이유만으로 남의 노트북 화면을 훔쳐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섭다고요. 다른 영화 보면 안 돼요?” 14번 티켓을 든 여자는 조금 더 앞쪽으로 전진하고 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부지에 진입해놓고 이제는 그 위에 놓인 소유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참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 안의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쪽의 질문에 대해 답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습니다. 아까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계시든지, 몰래 보시는 건 제가 말릴 수 없는 상황이나, 관심은 좀 꺼두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내가 나름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여자는 어떤 말을 하려다가 “그래도 그건 좀. 제가 좀비 영화를 워낙 싫어해서요” “그렇습니까? 댁이 좀비 영화를 혐오하니까 저는 여기 댁의 옆자리에 앉은 잘못으로 좀비 영화 따위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형편이 된 셈이로군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는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할 필요까지 있겠어’라는 생각 때문에 “딱히 볼 만한 게 없어서요”라고 자신 없게 말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노트북 이리 줘봐요”라고 말하며 내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노트북을 강탈해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소유물이 분명했던 것이 어떤 불손한 의도로 잠시 옆 집으로 별안간 소유권이 이전되어버리는 상황과 엇비슷해다. 나는 저것을 되찾아 올 수 있을까.
“내가 볼만한 것들을 좀 찾아볼게요. 기다려봐요.”라고 여자는 말했다. 그리고 하얗고 투명한 손을 내 귀로 뻗어 얌전히 귓속에 감춰져 있던 이어폰 한 개를 쓱 뽑더니 그대로 뺏어가 버리고 말았다. "잠시 빌려갈게요" 두 번째 강탈이었다. 모든 일이 단숨에 숨 쉴 틈도 없이 벌어졌다. 좀비가 튀어나오는 상황은 얼마든지 예측이 가능했으나, 지금 옆 자리에 앉은 14번 티켓을 든 여자가 행동하는 패턴은 예상 범주 바깥에 속하는 일종의 강력 범죄류의 사건이었다. 나는 이런 긴급한 사건에 대해 어떤 반응을 펼쳐야 할지 예측하지 못한다. 그저 얼음처럼 경직된 채로 상대방에게 모든 걸 맡기는 수밖에.
“혹시 우리들의 블루스 보셨어요? 넷플릭스에 있지 않나요? 노희경 작가 각본이라잖아요?” “드라마는 잘 안 봅니다.”라고 내가 단조롭게 대답했다. “드라마를 잘 안 본다고요? 왜요? 무슨 이유 때문에 드라마를 안 봐요? 혹시 나의 아저씨도 그럼 안 봤어요? 분명 안 봤다고 그리고 볼 생각도 없다고 퉁명스럽게 얘기하겠죠? 원래 그렇게 불만이 가득한 사람처럼 말하는 편이에요?”
나는 원래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의도적인 공작에 뜻하지 않게 휘말려버린 바람에 내 인생이 갑자기 뒤틀어져버렸다고, 그 사건 탓에 내가 이런 욕구불만 투성이의 인간으로 변신하고 말았다고 실토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 앞에서 내 인생에 대해 이렇고 저렇다 토로해봤자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여자 앞에서는 솔직해져야만 할 것 같았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 여자와 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막장의 기류라도 조심조심 흘러가는 걸까? 심상찮은 그리고 예고 없는 변주가 시작되려 한다. 3막의 연극 중에서 이제 막 1막이 열리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댐을 손으로 막아 네덜란드를 구한 소년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계속 부피를 확장해나가는 불길한 구멍을 메우고 있었다. 절대 한치의 틈이라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나는 완벽하게 모든 변수들을 다루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며 나는 예측하지 못한 일상 바깥의 일들을 할 일 목록에 올려두고 당장은 처리 못하더라도 언젠가 그것을 봉합시키겠다는 외과 의사처럼 무엇이든 꿰매려 했다.
“이건 내 노트북이고 내 넷플릭스입니다. 선택은 오로시 나에게 있어요. 14번 티켓을 들고 당당하게 앉아 계신 당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고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소 못생겨 보이는 여자(그 순간 분명 그렇게 보였다)에게서 노트북을 돌려받고 다시 받침대 위에 단단하게 붙들어두었다. 그런데 넷플릭스도 좀비 영화도 내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맑은 날에 태풍이 찾아왔다가 홀연히 떠나가는 것처럼.... 내가 대체 어느 장면을 놓쳤고 어디까지 진행했는지 아무런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죄송해요”라고 여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가 너무 모기의 날갯짓만큼 들려서 거의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자의 표정과 난처한 손동작으로 판단했을 때, 분명 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일종의 사과를 하려는 것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뭐, 그게 사과까지 할 일인가요? 죄송해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그 여자는 기다렸다는 덧이 “그렇죠? 제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죠? 그렇다니까요. 좀비 영화는 그만보고 우리들의 블루스 같이 봐요 총 20편인데요. 혹시 어디까지 가세요?” “저요? 남해까지 갑니다만” “오! 그래요? 잘됐네요. 저도 남해까지 가는데, 그럼 적어도 5편은 볼 수 있겠어요. 우리 같이 봐요. 이런 드라마는 혼자 보는 것보다 나란히 같이 앉아서 보는 게 딱이라니까요. 여기 먹을 것도 있어요 여기 감자칩 드실래요? 이거 신상이래요. 통감자가 들어 있어서 살도 안 찌고요. 이거 맛있어요 하나 먹어봐요 자 아,”라고 말하며 내 입속에 칩 하나를 꽂아 넣고, 다시 한쪽 귀에 꽂은 내 블루투스 이어폰을 마치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단히 귀에 고정해두는 것이다. 나는 강한 자석에 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