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행은 훌륭하다 #5
지인이 프라하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며칠 지나지 않아 페이스북에 요즘 유행한다는 여행지 스냅샷이 올라왔다. 까를교 야경을 배경으로 찍은 부부의 사진이 참 프라하스러웠다.
그렇지. 낭만과 사랑- 그게 프라하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몇 해 전, 흔히 유럽 패키지 여행에서 한나절 코스에 불과한 프라하에서 2주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사실 이동이 귀찮았다.) <프라하 걷기여행>이란 책 한 권 들고 종일 걸어다녔다. 그 덕에 프라하가 낭만의 도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프라하의 매력 가운데 4가지를 추려봤다. 다음의 4개 중 2개 이상 해당한다면 부디 당신의 다음 여행지가 프라하가 되길 바란다.
1. 로맨틱의 진수를 목격 혹은 경험하고 싶다면
2.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는 대식가라면
3. 클래식 음악만 들으면 꾸벅꾸벅 졸게 된다면
4. 왜 세상은 이따구냐 싶어 괴롭다면
프라하가 낭만의 도시라는 것에 토를 달진 말자. 서로를 눈에 담고 입맞추고 마주보는 커플은 서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이들만큼 흔하다.
사랑의 자물쇠는 아무래도 이 곳이 원조가 아닐까.
남녀의 눈빛만이 로맨틱한 건 아니다. 배경과 공기, 이 곳 사람의 모든 몸짓에 로맨스가 배어있다. 카프카 뮤지엄 옆길로 나오니, 볼타바 강에 사는 새들에게 레스토랑 요리사들이 빵을 던져주고 있었다.
프라하 maketh 로맨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존 레논의 벽>도 들러볼 만한 스팟이다. 세상의 평화를 바라는 젊은이들의 커다란 낙서장 정도 되는 곳. 평화의 전제는 '사랑'이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온갖 사랑의 언어가 넘실 거리는 벽이다.
"제인에게
제인. 난 이 글이 지워지기 전까지 이 곳에 돌아와 너에게 나의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혼할거야."
이보다 로맨틱할 수가 있을까?
(이 벽은 이 글 맨 아래서 다시 한 번 소개하겠다.)
프라하에 들른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먹게 되는 요리, '꼴레브'다. 돼지무릎 요리인데 화질 나쁜 사진으로도 전달될만큼 기름기가 충만하다. 느끼한 것도 그렇지만 양도 무척 많아 양이 적은 여성이라면 3명이 달려들어야 겨우 바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체코엔 꼴레브를 절대 외롭게 두지 않을 단짝, '맥주'가 있다. 체코 맥주는 정.말. 유명하지만 맥주를 즐겨하지 않는 나에겐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꼴레브를 먹을 땐 제법 괜찮게 목에서 넘어갔다. 특히 '벨벳 맥주'는 두 모금이나 먹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한 모금 마시고 가게를 나가는 나를 몹시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살면서 클래식 음악회는 두 어번 가 본 것이 전부다. 그마저 표가 생겨 공짜 음악을 들었지만 그 고마움을 헤드뱅잉으로 보답했다. 늘 졸았다. 음악에 문외한이라 그러하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프라하에서 접한 음악회들로 내 생각은 바뀌었다. 난 그저 이제까지 감동받을 만한 클래식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같다면, 모든 클래식 음악을 자장가로 변환하여 뇌에 입력하곤 했다면 프라하에서 색다른 경험을 권해본다.
프라하에선 연중상시 음악회가 열린다. 거장 누구누구가 지휘하고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누구누구가 등장하는 그런 음악회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정말 많은 음악가들이 몇 명, 몇 십 명을 앞에 앉혀놓고 음악회를 연다. 시민회관은 그 중심 중 하나다.
이 작은 음악회가 열린 한 시간 남짓, 난 다른 시간을 살았다. 뭐랄까. 술마시고 알딸딸해지는 느낌과 유사하다. 딱 그즈음엔 이 기분좋은 술기운이 가실까 걱정이 앞서기 마련. 연주가 끝날까 애가 탔다.
이 연주를 듣고 숙소에 돌아와 난생처음 아이튠즈 음원을 샀다. <볼타바>강을 거닐 계획이 있다면 부디 다운받아 가시길. 여행이 풍성해질 것이라 장담한다.
딱딱한 클래식 음악회만 있는건 아니다. 감동은 덜하지만 재미는 더 했던 <스메타나 콘서트>. 발레리나, 리노, 가수들이 함께 공연한다.
클래식만 음악은 아니다. 재즈클럽 <웅겔트>에서는 좀 더 흥겹게 (술에도) 취할 수 있었다.
그들은 참 신나보였다. 음악은 본능처럼 보였다.
여행은 일탈의 통로이기도 하다. 일상이 싫고 따분할 때면 유독 여행이 간절해진다. 로맨스의 도시 프라하를 찾는 많은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낭만과 사랑이 가득할 것만 같은 꿈결같은 도시, 프라하.
하지만 낭만의 반댓말인 공포, 고통, 냉혹- 프라하는 그 모든 단어를 거쳐 온 도시다. '왜 세상은 이따구냐' 싶어 괴롭고 짜증이 난다면 프라하의 이면을 한 번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날 이 곳의 낭만과 활기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 슬픔과 절망을 이겨냈기에 가능한 봄이다.
오늘날 수많은 연인들이 입을 맞추는 <까를교 동쪽 탑>엔 수많은 인간의 머리가 잘린 채 걸려왔다.
금빛 찬란한 성당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연이 전해진다. <성 치릴과 성 메토디우스 대성당>은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위대한 드라마가 펼쳐진 곳이다. 나치 사령관을 암살한 쿠바시와 가브치크가 대성당의 지하 무덤에 은신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수백 명의 나치에 의해 대성당은 겹겹이 포위당하고, 나치는 성당 안에 독가스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쿠바시와 가브치크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두 사람에 동조한 수많은 이들이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성당 앞, 그들을 기리는 현판 아래 두 손으로 검을 꼭 쥔 모양새의 구 조물이 있다. 검으로 지켜낸 평화와 자유라는 뜻일까.
관광객들의 천국, <바츨라프 광장>에도 어두운 역사가 서려 있다.
국립박물관 앞 자갈길엔 울퉁불퉁하게 십자가 하나가 놓여있다. 1969년 1월, 소련의 압제에 저항하며 분신한 체코 대학생 ’얀 팔라흐’를 위한 기념비다. 바로 이 자리에서 21살의 대학생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달 후 같은 선택을 한 얀 자이츠는 고작 19살이었다. ’오죽했으면 꽃도 피우지 못한 젊은이들이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스스로를 불태웠겠는가’라고 적어놓은 프랭크 크주니크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체코 다리 너머로 23m 높이의 거대한 메트로놈이 보인다. 저 자리는 본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50m 짜리 동상이 있었던 곳이다. 50m의 높이나 1만 7천 톤의 무게보다 그 동상에 엮인 사연이 애닳다. 이 동상을 제작한 건 체코의 조각가 오타카르 슈베츠. 그는 1955년 이 동상이 공개되기 3주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국과 민족에 부끄러워서 였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로부터 7년 후- 이 동상은 800kg의 폭약으로 파괴되었다.
1980년 존 레논이 자신의 광팬에게 암살당한다. 그 후 10년 동안 체코의 반 공산주의자들은 비틀즈의 노랫말과 자신들의 의지를 이 <존 레논의 벽>에 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적어놓은 낙서 한 줄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LENNON VS. LE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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