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행은 훌륭하다 #6
여행엔 다양한 목적이 있다. 꿈결같은 풍경을 '보고' 싶어 떠난다거나 기가 막힌 음식을 '먹기' 위해 떠날 수도 있다. 혹자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라거나 음악을 '듣기' 위해서도 여행을 간다. 마찬가지로 '걷기' 역시 아주 멋진 여행의 목적이 된다.
몇 해 전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2주 남짓 걷기 여행을 떠났다. 300km 남짓한 길을 걸었고, 단언컨대 내 인생 최고의 여행으로 남았다. 다음의 4가지 중 2가지 이상 해당된다면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1.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면
2. 관광지 아닌 곳을 여행하고 싶다면
3. 하루 3만원 이하로 여행하고 싶다면
4. 2주일에 5kg 감량을 원한다면
우리는 너무 바쁘다. 내 방 내 침대에 누워 있을 때조차 혼자가 아니다. 페이스북과 카톡 알림이 쉼없이 울린다. 남의 삶 들여다보고 남의 이야기 듣느라 내 삶을 생각할 여유를 갖기 어렵다. 특히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잘 살고 있는건가.' 싶은 고민을 할 즈음엔 꼭 필요한 여유다.
'그래, 맞어.' 싶은 생각이 든다면 걷기 여행은 당신에게 좋은 솔루션이 될 것 같다. 필요한 건 휴대폰과 페이스북이 아니라 운동화와 책 한 권이다.
난 평소 좋아하는 김형경 작가의 <사람풍경>이란 책을 들고 갔다. 여행과 심리학을 섞어 풀어낸 에세이다.
누구하나 방해하지 않는 독서를 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책에서 만난 문장이 가슴에 콕. 박힐 때면 어디에든 받아 적었다. 그 당시의 내게 필요한 건 "괜찮아. 잘 하고 있어."란 한 마디였던 것 같다.
이제 나는 내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며
정의롭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하며,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며
그런 얼룩달룩하고 울퉁불퉁한 존재로서
존엄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순례자의 길> 곳곳엔 이런 노란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어김없이 노란 화살표가 등장한다.
눈에 보이는 길을 알려주는 것은 이 노란 화살표이지만, 내 마음 속 길을 알려주는 건 걸으며 만난 '사람'들이었다. '빨리', '먼저' 가야 한다는 강박이 걸음에도 투영되었던 모양이다. 유난히 급해 보이는 내게 한 독일 여성이 그랬다.
빨리 가지 않아도 돼. 즐기며 가야지.
대장정을 마친 후의 성취감 역시 삶에 도움이 된다.
해냈구나, 해냈어.
걷기 여행의 또다른 묘미는 '붐비지 않는 풍경'이다. 난 스페인을 여행했지만 바르셀로나는 구경도 못했다. 대신 이름없는 산길, 바닷길, 숲길을 걸었다. 걷기 여행의 루트는 대부분 관광지를 비껴 간다. 형형색색 요란한 관광지 대신 조용하게 따뜻한 풍경이 오래 뇌리에 남았다.
여행은 비싸다. 특히 해외로 '혼자' 여행을 갈 경우 부담은 더욱 크다. 유럽 여행을 기준으로 혼자 여행할 경우의 지출을 잠시 계산해보자.
숙박 10만원 + 1일 3식 5만원 + 교통비 2만원 + 박물관 / 유적 입장료 3만원 = 1일 20만원
나의 걷기 여행은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따라 이어졌다. 그 길 곳곳에는 순례자를 위한 (거의) 무료 숙소가 숱하다. (매우 저렴한 비용을 치르거나, 자발적 기부금 형태로 운영되기도 한다.) 폼나는 레스토랑은 찾을래도 찾기 어려우니 한 끼에 5천원이면 충분했다. 아주 훌륭한 커피도 2천원을 넘지 않았다. 박물관이나 유적은 여행 범위에 없었다. 걷기 여행이니 교통비도 필요없다.
숙박 1만원 + 1일 3식 2만원 (커피, 맥주 포함) = 1일 3만원
물론 어떤 길과 환경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예산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내 경우 하루 3만원으로 충분한 호사를 누렸다. IN / OUT 도시 여행과 항공비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먹고 사는 비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살 빼려 간 여행은 아니었으나 살은 빠졌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당연한 것이 하루에 20-30km를 걷는다. 아무리 잘 챙겨 먹어도 집밥 만큼 듬뿍일린 없다.
게다가 가방은 이렇게 무겁다. (난 내가 만난 걷기여행객 중 짐이 제일 적었다. 대부분 침낭을 돌돌 싸서 높게 가방에 올려서 다닌다. 10kg은 아주아주 기본 무게다.) 이걸 들고 걷는다고 생각해보자. 지방이들이 땀방울에 실려 내 몸을 떠나가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린다.
발은 엉망이 된다. 매일 뙤약볕 아래서 물집을 터뜨려야 걸을 수 있다. 발톱 한 두 개 빠지는 건 예사다.
팔은 이렇게 탄다. 나중엔 허옇게 일어오른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이다.
무튼, 2주 간의 걷기 여행 후 대략 5kg이 빠져 있었다. 게다가 운동(?)으로 빠진 살이라 쉽게 찌지도 않는다. 의도하진 않았으나 반갑기 그지없었던 감량 역시 걷기 여행의 매력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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