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실패에 익숙해지기. 그리고 나를 알아가기.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연재 중
- 맥주 초보가 맥주 애호가가 되기까지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는지 알아가는 일상 이야기
제 2부_ 나만의 취향 탄생
열 번째 잔. 실패해도 괜찮아?
슈퍼에 가니 한 통에 1500원에 유기농 파인애플을 팔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잎은 말라 있었고 꼭지에 곰팡이가 조금 피기 시작한 것들도 있었다. 파인애플 위에는 ‘신선하지는 않지만 달아요’. 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파인애플은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수확한다. 껍데기가 푸른 파인애플은 신선하지만 달지는 않다. 일주일쯤 기다려 노랗게 익어야지만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수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선한 파인애플은 5000원 정도 한다. 오늘 저녁에 파인애플 볶음밥을 해 먹고 싶다던가, 내일 아침에 파인애플과 바나나 주스를 마시고 싶은 나에게 ‘신선한’ 파인애플이‘좋은’ 파인애플은 아니다.
극장에서 두 시간이 넘는 동안 영화를 보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은 여가 시간을 생각하면 꽤 긴 시간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 나누는 감상은 채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영화 어땠어?” “재밌었어. 이제 밥 먹으러 갈까?”
이렇듯 일상의 취향 표현은 단순하다. 맛이 있거나 없거나.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 마치 파인애플에 매겨진 가격표 같다. 싸거나 비싸거나.
홀로 여행을 떠났을 때는 예약해 놓았던 숙소 하나 찾기가 어찌나 힘든지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끊어놓은 기차의 도착 시각은 새벽 네시이고 터미널은 스산하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구석에 앉아 있는 시간은 어찌나 긴지 이제 아침인데도 하루가 다 지난 것 같다. 미리 찾아놓았던 맛집이 아직 장사를 시작하지 않아 한 두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는 허탈함에 맥이 풀린다. 때마침 메케한 고기 굽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시간이나 때울 겸 냄새에 이끌려 다다른 길가에 노점이 있다. 일회용 종이 접시 위에 커다란 닭 다리 하나, 밥 한 공기와 채소 한 움큼, 소스를 받아들고 이 천원 즈음을 건넨다. 오렌지를 서너 개쯤 짜서 만들어주는 주스를 500원 주고 마실 때쯤이면 어느새 원래의 식당은 까맣게 잊는다.
여행에서의 하루가 일상의 하루와 다른 것은 장소와 설렘의 차이뿐이다. 점심때쯤 느지막이 일어난 덕분에 유명한 유적지를 몇 개 빼먹었다고 해서 실패한 여행은 아니다. 나와 같은 곳을 여행한 친구가 다녀간 유명한 유적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야 비로소 미리 알아보고 갔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몰려온다. 그렇게 성공한 여행과 실패한 여행 사이에 가느다란 선을 긋는다. 그 선을 넘을 수 있으면 성공이고 넘지 못하면 실패이다. 여행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수없이 생겨나는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짜증스러웠던 소소한 기억들은 성공 혹은 실패 중 하나로 모인다.
잠도 줄여가며 수능 공부를 했다. 대학을 다니는 시간 내내 학점 관리를 한다. 인턴십, 해외 연수, 토익과 토플, 모두 다 성공한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다. 취업에 ‘실패’한 순간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의 그 시간은 실패의 경험이 된다. 수능 공부도, 대학에서의 공부도, 그것을 통해 배우는 하나하나의 소소한 경험과 지식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종 목적은 취업과 남부럽지 않은 삶이다. 그래서 취업이 결정되는 순간에서야 그 모든 시간의 ‘성공’ 혹은 ‘실패’가 결정되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취업할 때까지의 삶을 견디어 낸다.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홀로 계획하는 여행 속의 수많은 실패는 언젠가 성공하는 여행으로 보답 받는 것일까? 그런데, 성공한 여행과 실패한 여행은 무엇일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에는 얼핏 들으면 실패해도 괜찮고, 실패에도 가치가 있는 것 같이 들리지만 본질적으로는 실패는 나쁜 것이고, 성공의 자양분으로서의 실패만 의미가 있으며, 언젠가는 성공으로 열매 맺어야지만 가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장을 볼 때마다 이번 달 생활비를 계산하고, 공과금 생각에 에어컨을 끄며 살아가는 하루하루. 생존 자체로 버거움을 느끼는 삶에서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참을 고르고 기다려온 공연이 생각보다 지루해도,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가 그림이 아닌 인간 전시회였어도, 큰맘 먹고 산 맥주 한 잔이 기대만큼 맛있지 않아도 그저 실망하면 그뿐이다. 내가 어떤 공연을 좋아하는지, 어떤 맥주를 싫어하는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늘 실패해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 취미의 공간에서는 실패하는데도, 성공하는 데도 쉽게 익숙해 질 수 있다. 그렇게 매일 매일 나 자신의 취향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어느새인가 성공도 실패도 내가 모르던 맥주를 경험해본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언젠가 당신에게 당신의 정의와 이성의 판단에 따라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큰 법을 어겨야만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모든 것이 당신의 선택에 달린 그 순간, 당신은 이미 규칙을 어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 매일 매일 당신이 생각했을 때 말이 되지 않는 작은 규칙을 어기는 연습을 해봐라. 예를 들면, 아무도 다니지 않는 대낮 오솔길을 무단 횡단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머리로 그 순간 그 법이 말이 되는지, 아니면 바보 같은지 판단해 보아라.”
- 제임스 C. 스콧
성공과 실패에 익숙해지기, 그리고 나를 알아가기.
일상의 작은 취미에서부터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쌓는다면, 언젠가 삶의 거대한 결정을 내릴 때도 조금 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공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취미로부터 나의 취향과 성향을 알아간다면, 삶에서도 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좀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취미는 무료한 일상의 도피처가 아니라 삶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입이라는 대기실에서 음식을 만나고 그곳에서 인사를 나눈다. 우리는 음식을 더듬어 조사하고, 그것을 에워싸고, 그것을 촉촉하게 만들고, 치아 바로 안쪽의 단단한 입천장에 음식을 혀로 누르고, 압력을 가하면서 빨고, 이리저리 돌린다. 우리는 음식과 장난을 치고, 음식과 친구처럼 사귀고, 음식을 반갑게 맞아들인다.”
- 로버트 노직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일주일에 2회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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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 맥주 자체도 우리의 삶에서 음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제 1 부
1-1. 술을 도대체 왜 마시는 걸까요? 上 - 지금 마시는 술은 내가 선택한 한 잔인 가요?
1-2. 술을 도대체 왜 마시는 걸까요? 下 -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건배해야 할까요?
2-1.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上 - 다 함께 술 마시며 회식하면 하나가 되나요?
2-2.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下 - 숙취를 방지하려면 적게 마시는 방법뿐일까?
3. 즐기는 사람도 잠재적 중독자 - 쥐들은 외로움에 적응하기 위해 마약을 했다?
4. 취향은 나 자신의 거울이다 -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5. 한국인의 커피, 한국인의 맥주? -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입맛은 존재하는 것일까?
제 2 부
1. 맥주의 의미의 의미 - 낯선 의미의 맥주, 벨지안 스타일 트리펠
2. 맥주의 이름 - 맥주 알코올 도수가 와인이랑 비슷해?
3. 자꾸만 이름은 늘어간다 - 세상에 존재하는 100가지가 넘는 맥주
제 3 부
1. 한 잔의 맥주를 만나기 까지
2. 맥주와 함께 여행하기 - 上
3. 맥주와 함께 여행하기 - 下
4. 맥주와 함께 여행하기 - 맥주 생활 영어
5. 맥주의 재료 - 효모
그라폴리오에서는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습니다.
http://www.grafolio.com/story/19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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