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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Apr 20. 2024

책속에서_또 못 버린 물건들

123

그러고 보면 이 글을 쓰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적인 감정이 작용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볍고 단순해지려는 사심이 있었다.

무겁고 복잡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 봤을 것이다.

때로 그 가벼움과 단순함이, 마치 어느 잠 안 오는 새벽

창문을 열었을 때의 서늘한 공기처럼,

삶이 우리의 정면에만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것을.

신념을 구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상이 지속된다는 것이야말로

새삼스럽고도 중요한 일임을.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10-11]          



124

오래된 물건들 앞에서 생각한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변해서 내가 되었구나.

누구나 매일 그럴 것이다. 물건들의 시간과 함께하며.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11]       


   

125

선물이란 인사를 건네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물건에 만족하고 즐거워할 것을 생각하면

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는, 그러니까 그냥 좋아하는

마음인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정확하게 생각하려고 애쓰는 조금 전 내 소설 주인공의 말을

다시 인용해보자면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 아무렇게라는 건 아니다”.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44]       


   

126

초보가 된다는 것은 여행자나 수강생처럼 마이너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지점에서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나이들어가는 것, 친구와 멀어지는 것, 어떤 변화와 상실,

우리에게는 늘 새롭고 낯선 일이 다가온다.

우리 모두 살아본적 없는 오늘이라는 시간의 초보자이고,

계속되는 한 삶은 늘 초행이다.

그러니 ‘모르는 자’로서의 행보로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는

훈련 한두 개쯤은 해봐도 좋지 않을까.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47]     



127

어린이는 정의로운 존재이므로 뜻밖에도 죄의식을 많이 느낀다.

어른과 다른 점이다. 그리고 자신이 나쁜 사람일까봐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해서

착한 어린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겁을 주기 때문이다.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49]          



128

금기 너머를 상상하는 것, 사소한 악의를 품는 것.

‘인간적으로' 둘 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제어하는 자유의지가 있다.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55]       


   

129

엄마가 돌아가신 뒤 엄마를 의식하고 엄마의 범주 안에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새로운 장소나 여행지에 갈 때마다

그곳에 엄마가 있다면 분명 이랬을 거라고 떠올리게 되는 일.

그것은 엄마가 그 장소를 즐길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혹은 내가 더 잘했더라면 하는 후회와 아쉬움만은 아니었다.

나를 믿어주었던 엄마가 더이상 내 곁에 없다는 상실의 실감이었다.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81]         


 

130

나의 물건이지만 모든 사물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다 똑같지는 않다. 실수로 물건을 떨어뜨렸을 때에

아끼는 물건일수록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더 크게

터져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있다. 그런 마음을

일일이 의식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대하는 것뿐,

머리와 가슴속에는 사물 각자의 캐릭터가 입력되어 있어

사물에 따라 미세하게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96]          



131

역시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복잡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는 한 누구나

섬세함이라는 상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존재이므로

나의 틀 안에서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단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 예술가는 못 되지만

문학이 우리에게 주려는 것,

인간이 가진 단 하나의 고유성을 지켜주도록

돕는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 싶다, 는 생각을 해본다.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96]         



132

글을 쓰는 것은 나의 내면을 남에게 내보이고

또 설득하는 일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글을 쓰다가 내가 배짱과 용기가 없는 작가라는 걸 자주 느낀다.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124]          



133

글을 마무리하기가 어려울 때는 ‘지켜볼 일이다‘와

‘그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조심스레 주장해본다‘ 같은

무책임한 애매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126]          



134

삶은 우리의 정면에만 놓여 있는 게 아니지만,

만약 정면에 놓여 있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뚫고 나가야 할 때라면 그렇게 해야겠지.

언제나 인간의 편으로 같은 자리를 지켜주는,

그래서 실생활에서는 쓸모없어 보이는 예술, 문학의 위로와 함께.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167]      



2024.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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