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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Apr 26. 2024

책속에서_앞으로 올 사랑

135

간호사를 인터뷰하는 도중 ‘장의 매뉴얼’이라는 것이

사건 초기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시신’과 관련된

‘장의’ 문제는 간호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던 업무 중 하나였다.

인터뷰 두 달 뒤 나는 장의 매뉴얼을 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 이 매뉴얼을 읽던 날 락스 냄새가 하루 종일 나를 따라 다녔다.

시신과 락스는 슬픈 이야기다. 이럴 때 슬픔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러나 슬픔으로 무엇을 하는가는

‘자연’과는 다른 이야기다. 우리가 어떤 사회에, 어떤 ‘문화’에

사느냐에 달린 이야기다. 슬픔과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면서 문명은 종말을 맞는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문제이기도 한-가 남는다.

우리는 왜 죽음을 특별히, 특별히 슬퍼하는가?

죽음이 소중하다면 삶도 소중한 것 아닐까?

죽음과 삶을 차별할 이유가 있는가? 이미 우리가 삶을

잃고 있다면 그것은 누가 애도하는가?

[정혜윤, 앞으로 올 사랑, 10~11]       



136        

우리가 어떻게 살든 우리는 우리가 잃은 것,

슬픔과 고통, 죽음 등에 대해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2020년 여름, 우리는 코로나와 기후 위기를 한꺼번에 겪었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미래, 우리의 인간적 가능성은

꽤 오랫동안 코로나와 기후 위기라는 단어들 위에 구축될 것이다.

코로나와 기후 위기는 일자리, 식량, 생명, 죽음 등

인간의 거의 모든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할 것이다.

코로나와 기후 위기, 두 가지 위험은 모두 생태와

우리의 잘못된 연결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침이나 마스크 말고 더 근본적인, 더 본질적인

변화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만이 ‘코로나 2021’ 같은 감염병의 반복과

다가올 기후 재앙을 그나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정혜윤, 앞으로 올 사랑, 13]               



137                    

사실, 친구의 사랑관은 우리가 사는 모습의

모든 면을 문젯거리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러나 이 불편함이 현실을 사는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의심을 품으면 자유,

의심을 품지 않으면 부자유라는 말에 입각해서 보면

내 친구는 자유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반대할 일이 없다는 점이다.

아파할 일도 없다. 내 친구도 마찬가지다.

친구는 쓰레기를 양산하는 상품보다 생각을

혹은 지식과 꿈과 경험을 나누면서 사랑하고 싶어 했다.

소비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사랑했다. 함께 소비하는 것보다는

함께 추구하는 것을 사랑했다. 사물들로 이뤄진 세상이 아니라

가치들로 이뤄진 세상을 사랑했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의 삶을 고치고 수선하는 삶을 사랑했다.

내 친구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새로운 대화를 만드는

전문가일 수 있었지만,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해냈지만,

꽤 고독했다. 한 도시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혼자 깨어 있는 사람처럼, 누군가 일어나는 기척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고독했다. 꿈과 욕망이 달랐고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다.  

[정혜윤, 앞으로 올 사랑, 41~42]                    



138

우리는 안다. 못질 당하는 몸의 고통을.

겪어봐서도 아니고 배워서도 아니고 그냥 안다.

감각적으로 안다. 마치 마취 없이 수술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듯. 우리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다른 몸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아파한다.

그럴 때 우리도 동물이다. 고통받는 몸을 보고 즉각

가슴에서 솟구쳐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동물적 연민이다.

동물적 연민을 ‘느끼는’, 이것이 ‘동물-인간’이다.

서로의 고통을 몸으로 아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사랑과 유대의 기초 중의 기초, 근본 중의 근본이다.

[…] 어둡고 슬픈 일은 나쁜 일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어둡고 슬픈 그 일이 너무나 아파서,

아픈 나머지 길을 찾기 시작할 수도 있다. 아파해야 한다.

그 아픔을 막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

또한 아파해야 한다. 가슴 아파함 없는, 안쓰러움 없는,

연민 없는 사랑은 없다. 가슴 아파할 수 있음이 앎과 변화를 낳는다.

[정혜윤, 앞으로 올 사랑, 54~55]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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