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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24. 2022

<그리스 2일차> 델피의 신탁, 우리의 제물은..

<이탈리아 1일차> 로마의 휴일, 그래도 팁

<이탈리아 2일차> 화려한 바티칸, 투박한 산탄젤로

<이탈리아 3일차> 로마 여행에서 놓치거나 놓칠뻔한

<이탈리아 4일차>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이란

<이탈리아 5일차> 사기캐 토스카나에서 관광 대신 여행

<이탈리아 6일차> 몬테풀치아노, 로망이 이긴다

<이탈리아 7일차> 발도르차 평원의 빛과 바람

<이탈리아 8일차> 토스카나, 하늘이 다했다.

<이탈리아 9일차> 피렌체, 63층을 올라갔다니

<이탈리아 10일차> 오, 다비드.. 그리고 피스토야

<이탈리아 11일차> 파랗게 빛나는 친퀘테레..그리고

<이탈리아 12일차> 만토바 공국..가르다 호수
<이탈리아 13일차> 베로나, 시르미오네..넘치게 좋았다

<이탈리아 14일차> 구텐 탁, 돌로미티

<이탈리아 15일차> 돌로미티, 세체다에서 멈춘 시간

<이탈리아 16일차> 돌로미티, 길 위에서...친퀘토리

<이탈리아 17일차> 돌로미티, 트레치메 6시간이 남긴것

<이탈리아 18일차> 베네치아의 상인들

<이탈리아 19일차> 베네치아, 부라노 무라노

<이탈리아 20일차> 베네치아, 두칼레에서 키퍼에게

<이탈리아 21일차> 구겐하임& 베네치아 좋아진 이유


“이상하다. 내가 그렇게 예약했을 리가 없는데”
딸기가 외쳤다. 다음날 일정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수요일 투어는 only french 로 진행한단다. 영어로 예약했는데!
연이 갸웃 하더니 딸기를 달랬다. 야, 우리 가는건 목요일이야. (알고보니 french는 only 수욜)
델피-메테오라 1박2일 현지투어를 예약했다. 영어로 진행됐다. 친구들 덕에 가능했다.
알아듣다가도 놓친다. 어제 공항에서 만난 택시기사님은 계속 꼬레아도 싸메르냐고 물었다. 싸메르? 샤메르?
연이 맞췄다. 오, 코레아도 summer야. 역시 더워.
기사님이 사흘 정도 40도 날씨일거라 했다. 여기도 이상기온이다. 다행히 메테오라 쪽은 30도 안될거라 했다. 8월엔 40도 후반으로 기온이 오른단다.


어제는 도착해 숙소에서 쉬기만 했지만, 그래도 1일. 오늘은 2일차다. 아네테 아파트 숙소는 무척 쾌적했는데 129유로. 이탈리아보다 물가가 확실히 싸다.

오전 8시30분 1박2일 투어 버스에 올랐다. 그리스 거리는 겉핥기로 본다. 이게 기준이 될리 없지만, 로마와 피렌체, 베로나에서는 옷가게 쇼윈도우마다 세련된 패션에 반했던 반면 베네치아에선 좀 실망. 아테네도 베네치아 같다. (지못미 베네치아)

거리는 단정하다. 간판의 글자를 읽지 못하는 낯선 경험. 와중에 대우 라노스 차가 반갑다.


3시간 정도 달려서 델피 Δελφοί Delphi에 도착했다. 가이드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건 그의 액센트 리듬 탓이라 주장해본다.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도 땀이 흐르는데 셔츠에 양복, 중절모를 갖춰쓴 그리스 할아버지. 그의 설명을 알아들었으면 더 좋았을까? 친구들은 아니라 했다. 나름 그리스로마 신화를 달달달 외우다시피 빠졌던게..그러니까 너무 오래전이다. 아폴론, 음악과 의술과 활, 예언에다 태양까지, 한때 나의 매력적인 신. 하지만 다프네에게 한 짓은 용서가 안되지. 아무리 에로스의 활장난에 당했다지만 다프네를 스토킹하려다 그를 피해 월계수가 된 그녀의 이파리를 따서 기리는게 뭐람. 승자를 위한 월계수 신화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노여움이 많아졌거나, 마초척 폭력을 미화한 과거 서사가 예전과 달리 불편하거나. 그리스 신들은 치졸하고 뻔뻔한게 몹시 인간적이다. 그 시절 신의 공정함, 정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그냥 신의 뜻이겠지. 어쨌든 아폴론, 그 시대의 델피


옴팔로스, Ομφαλος omphalos 세상의 배꼽은 델피에 있다. 제우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린 두 마리 황금 독수리가 만난 세상의 중심. 제우스가 직접 저 돌을 던졌다. (너무 더워 설명을 읽지 못한채 사진만 찍어와서 뒤늦게 해석...) 진품은 박물관에, 이건 복제품..

이건 뭐더라...


드디어 피톤 Python. 그리스 서사는 대부분 막장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장남 우라노스과 티탄족 거인 열둘을 낳았다. 가이아가 따로 홀로 낳은 자식 중 거대한 뱀 피톤이 있다. 가이아의 신탁을 대리하던 피톤을 죽이고 이 신전을 빼앗은게 아폴론. 가이아는 크로노스를 낳고, 크로노스는 제우스를 낳고, 제우스는 아폴론을 낳았으니..가이아의 아들을 증손자가 죽인 셈이랄까. (가이아가 괴물 아이들을 가둬버린 장남이자 남편 우라노스에게 분노해 막내아들 크로노스와 짜고 우라노스 성기를 잘라 내쫓은 이야기.. 잘린 몸이 바다에 빠져 생긴 거품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나고.... 이건 넘어가자.. 하여간에 그리스 신화란)
피톤을 기리면서 4년에 한 번 아폴론 신전에서 피티야 경기를 열고, 승자에게 월계수 관을 씌워준 전통을 보면.. 병 주고 약 주고. 피톤, 뱀이 또아리를 튼 듯한 청동 기둥.. 뱀 머리는 영국박물관, 이스탄불 등에 있다고...  그리스도 빼앗긴 유물이 한둘이 아니다.. 영국이 한때 그리스는 유물 보존 능력이 없으니 대신
 보관하겠다고 우겼다. 기원전 6~7세기에 이런 신전을 올리며 서양 문명의 근원이 됐던 그리스에게 신은 자비롭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델피가 가장 좋았다고 혜윤 선배는 말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하지만 37도의 뙤약볕에 산을 오르면서 그런 생각을 먼저 하긴 힘들다. 8월보다 낫다는 6월인데 더웠다. 그늘은 놀랍도록 시원한데 낮 12시쯤 도착해 그림자가 짧았다.
우리는 산 중턱까지 버스를 탔지만 옛 사람들은 이 험준한 산을 타박타박 올랐을게다. 노예에게 제물을 짊어매도록 하고 긴 옷자락을 걷어잡고 걸었겠지. 기후재난 이전인 기원전에는 덜 더웠으려나. 더위 정도의 고행은 고귀한 신탁을 얻기 위한 과정이니 견뎌야지. 우리의 제물은 아마 우리의 땀, 달리 바칠게 없었던 탓에 고생이다.
아폴론 신전 신녀 피티야에게 제물을 바치고 예언을 얻는 신성한 곳 델피. 사소한 불평은 옛 선인처럼 자제해야지.
신의 뜻을 묻는건 경건한 행위다. 전쟁을 시작해야 할지, 어떤 전술을 써야 할지, 큰 질문도 있을테고, 저 집안과 결혼을 해야할지, 다른 도시로 옮겨야할지 작은 질문도 있었을 법 하다. 책임의 무게는 다르겠지만 소망의 무게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라 해서
 적을리 없다. 국제문제 전문가 딸기는 세계 식량난이 해결될지, 우크라니나 전쟁은 어찌될지 묻고 싶지만 일단 참겠다고 했다. 이 여행기는 책으로 내게 될까? 사실 궁금하지 않다. 나와 친구들을 위한 기록이면 됐다. 행복은 신탁이 아니라 내 마음에 달렸다. 신탁은 정치인에겐 명분을, 전쟁을 원하는 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을게다. 신의 뜻을 빌어 자행된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교회 권사이신 시엄니에게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을 빌미로 학살한 죄를 뉘우친 적 없지 않냐고 했었지. 철없던 옛날 일이다.


그리스는 2010년 이후 EU와 IMF에게 구제금융을 세 번이나 청했다. 그 중 이자율이 높은 IMF 구제금융을 2년이나 앞당겨 지난달 조기상환했다. IMF는 3월 보고서에서 그리스가 경기침체에서 회복되고 있으며 성장세를 이어갈 것이라 전망했다. 관광은 살아날게 분명해 보인다. 저평가된 그리스 부동산이 상승세이며, 외국인들이 사들이고 있다는 분석을 봤다. 한국의 98년 외환위기 당시 외국 자본이 금싸라기 빌딩들을 헐값에 사들였던 일이 떠오른다. 친절한 그리스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괜히 응원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뭔가 사고 싶을 때 마다, 기왕이면 그리스 경제에 기여하겠노라 참았는데.. 


수천 년 된 돌들의 기운은 부질없는 생각에 빠진 인간을 맑게 해준다. 그리 믿는다.

원형 극장. 사이프러스 나무들..


오늘의 관광 일정은 1시간 반 정도 델피를 만난게 전부다. 에어컨 시원한 버스로 오며가며 나머지 몇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충분했다. 더 바랄게 없다. 델피 부근 식당 옴팔로스의 음식은 그리스에 반하게 해줬다. 관광식당도 이 정도라니. 양고기도 돼지고기 꼬치구이(시시케밥)도 파스타도 밥도 다 우리 취향. 드디어 그리스식 샐러드도 시작이다. 풀떼기 없이 토마토 오이 양파 피망 올리브, 페타치즈, 조화롭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리조트들.. 겨울엔 스키탄다고.


버스에서 졸고 있는데 딸기가 꺠웠다. 잠시 내려서 구경하란다. 뭔지 모르고 내리다가 정말 쓰러질 뻔. 공기가 다르다. 숨이 턱턱 막힌다. 태양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다. 간신히 사진 찍고 바로 버스에 탔다. 영화 300 주인공? 아, 됐다고요. 버스가 얼마나 쾌적한지 알려주는 서비스 같다. 잠시 후 딸기가 사진을 공유해줬다. 41도다. 


투어에서 3성급 숙소를 예약했는데, 4성급 아말리아 호텔 칼람바카에 왔다. 갑자기 럭셔리 휴가다. 투어에 포함된 호텔 뷔페를 먹으며 호기롭게 로컬 와인 한 병 주문했다. 12유로다. 


수영은 하지 못한채 수영장에서 쉬었다. 다만 충격... 우리 발 꼴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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