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나누기 & 정보 더하기 / 오경준_환서중학교 교사
이 글은 <충남 새넷 2021 새학기 준비 연수>에서 진행한 연수 내용을 기초로 작성하였습니다.
수업은 어디에
그림 설명 : 작년, 한 학생에게 교과 문집의 표지에 쓸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뒤, 그 학생은 판서 내용도, 사람들도 없는 쓸쓸한 그림을 그려왔다. 아마도 이것이 코로나 소동 속에서 학생들이 경험한 학교의 모습일 것이다.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 노래를 자세히 듣다가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주가 어떤 사악한 마왕의 손에 잡혀 마법의 성 꼭대기쯤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으레 짐작했다. “그대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 몇 날 며칠을 울었을 나의 공주여! 그런데 어느 날, 노래를 듣다 보니, 어라? 공주가 있는 곳은 마법의 성이 아니었다! 마법에 빠진 공주는 바로 '어둠의 동굴 속 멀리'에 있다. 나는 마법의 성을 지나간다. 이어지는 늪을 건너, 눅눅한 진흙에 발이 반 뼘씩은 푹푹 빠지는 그런 길 뒤로, 그렇게 어둠의 동굴 깊숙한 곳으로.
우리가 당연히 거기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실은 큰 착각임을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 우리는 허무한 다급함에 시달린다. 가져야 할 것을 갖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급하게 찾고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허둥대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는 이러한 일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두고 나온 줄 알았던 차 열쇠는 곧 들고 있던 가방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지 않아 잃어버린 핸드폰도 주머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잠깐, 그런데 나의 수업은? 나의 수업은 내가 찾고 있는 거기에 있을까? 이 허무하게 다급한 교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수업을 기어이 찾아낼 수 있을까?
나는 우리의 수업도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괴상한 은유가 가능한 이유는 수업에 다다르는 길이 계열적 특성이 있는 요소들을 순차적으로 반드시 돌아보아야 하는 얼개를 갖기 때문이다. 수업을 찾기 위해서도 우리는 ‘어딘가’를 지나 또 ‘어디’를 건너 ‘어디’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수업이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딱 그쯤에 있다면 좋겠지만, 참 심란하게도 수업이 있는 곳은 더 멀고 지나야 할 곳도 더 많다.
수업을 찾는 우리는 그러나 종종 그저 한두 군데를 지나 멈추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교수법을 익히거나, 마이크로 티칭 기법들을 세밀하게 돌아보거나, 독서하고 사색하는 것들, 그것들이 다 우리가 지나야 할 길은 얼추 맞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다양하게 고안되고 시도되고 제안받는 수업에 대한 고민의 어느 한 부분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 안 된다. 일정한 점검과 나름의 대답을 마치고 또 다른 곳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렇다고 지나야 할 곳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동굴로 향하는 것도 안 된다. 어둠의 동굴에 서기 전 마법의 성과 늪을 지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공주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레트로토피아(retrotopia): 코로나 시대의 문제와, 그 이전의 문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레트로토피아>를 통해 혼란한 현재와 막연한 미래 앞에서 미화된 과거를 이상향으로 삼으려는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발 딛고 있는 불안한 현재의 정체가 과거의 ‘유토피아’이든 ‘실패한 유토피아’이든, 사람들은 그 불안에 맞서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미래를 꿈꾸는 대신에 이전의 ‘유토피아’에 대한 이차 부정으로서 ‘실패한 과거’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삼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경험한 과거로의 회귀가 새롭게 대안을 상상하고 창조하는 것보다 손쉽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육’이라는 문제에서도 새롭게 마주한 문제들, 즉 ‘코로나 시대의 교육’의 문제뿐 아니라 ‘코로나 이전의 교육’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물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뜨겁지만, ‘원격 수업 방법’에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사이, ‘코로나 이전의 교육’ 문제가 생략되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그 이전 교육 문제’는 여전할 뿐만 아니라 ‘코로나 시대의 교육 문제’가 ‘그 이전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생기와 웃음소리가 교실에 가득했던 아름다운 시절, 그러나 그 추억의 커튼은 냉정하고 과감하게 젖히고 생각해 보자. 코로나 이전의 수업이 가졌던 문제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역시나 선생님들의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즈음 ‘배움이 일어나는 수업’에 대한 집중이 ‘영양가 없는 협력 수업’, ‘질 낮은 모둠 수업’의 문제로 스멀스멀 제기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고 손뼉을 치고 학생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인 이후에 결국 ‘학생들은 무엇을 배웠는가?’라는 의아함이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남는 경우가 생겼다.
나는 이것이 ‘어떻게 가르칠까’의 고민이 ‘무엇을 가르칠까’의 고민을 잠식한 탓이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수업 방법은 의미 있는 수업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써 선택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가르칠까’라는 질문은 ‘무엇을 가르칠까’에 뒤따르는 질문이어야 한다. ‘무엇을 가르칠까’에 대한 대답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떻게 가르칠까’에 대해 답할 수 없다. 그렇게 ‘코로나 이전의 교육’ 문제는 결국 ‘무엇을 가르칠까’의 문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시작될 때 즈음, 팬데믹 사태가 터졌다. 시대는 이 문제의식을 덮고 또다시 우리를 ‘어떻게 가르칠까’의 질문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뉴스로 원격 수업 시행 소식을 접하고 수업을 당장 온라인으로 준비해야 했다. 나도 부랴부랴 온라인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하며 유튜버처럼, 때론 온라인 강사처럼 수업을 진행했다. 영상에 배경음악을 넣고 편집하고 자막을 달다가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
위드 코로나의 시대, 원격 수업의 이상적 형태로 실시간 수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생겨나며 그에 따른 권고들이 내려온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실시간 수업 방법에 대한 연수가 생겨나고 있다. 원격 수업의 이상적 형태가 있다는 발상도 위험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가르칠까’가 생략된 수업 구상의 위험이 있다. 물론 ‘어떻게 가르칠까’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수업 구상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가르칠까’의 고민 이후 그 실현을 위해 ‘어떻게 가르칠까’를 고민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둠의 동굴로 향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서
사진 설명 : 나는 수업 사진이나 활동 결과물 등으로 수업 나눔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수업 사진을 통해서 학생들의 시선이나 동작 등의 지표를 관찰할 수는 있고, 또 결과물로 수업의 도착점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수업 나눔이나 성찰에서 더 필요한 요소들은 학생들의 대화, 교사의 발문과 활동 개입 등, 수업 구상과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진기를 새로 사서 그 들뜬 마음으로 찍은 몇 장의 수업 사진을 찾았다.
'앞서 ‘수업에 다다르는 길이 계열적 특성이 있는 요소들을 순차적으로 반드시 돌아보아야 하는 얼개를 갖는다.’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했다. 한 차시의 수업을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교육이 무엇인지, 각자의 교과가 학생들에게 어떠한 지식과 태도를 왜 제공해야 하는지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도 대답을 마련해야 한다. 또 어떠한 방법으로 학습의 동기를 유발하고 어떠한 제재를 어떠한 활동으로 배치하여 수업을 진행할 것인지와 같은 매우 구체적인 상상까지 진행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무엇을 가르칠까’의 문제보다 ‘어떻게 가르칠까’에 집중했었다는 코로나 이전의 교육 문제는 다시 ‘삶에서 수업을 끌어내는 과정’이 생략된 문제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문제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 ‘레트로토피아’의 형태로 잊힐 우려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마법의 성’의 은유로, 우리의 수업을 찾기 위해 떠나야 할 여정은 무엇일까? 좋은 수업을 찾고자 어둠의 동굴로 향하는 여행자들이 지나야 할 곳들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기 위해 여정의 경유지에 해당하는 위계적 질문들을 마련해 보았다.
1. 삶의 태도와 가치관, 교육관
· 무엇을 위한 삶을 살 것인가?
· 나는 어떠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 교육이란 무엇인가?
· 교육을 통해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으며, 그것이 내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삶에서 어떠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또 결국 무엇을 위한 삶을 살 것인가. 인생을 조망해야 하는 답할 수 있는 이 질문들은 문득문득 우리의 삶을 따라온다.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사실 몇이나 되겠냐마는, 교사는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교육관을 세워야 하므로 서투르게나마 매번 깜냥의 결론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자신의 가치관에서 교육관이 분파된다. 교육관의 수립은 산발적이고 특수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책무인 척하는 복종의 요구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게 해 준다. 가치관과 교육관은 교사를 억압하려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교육관을 명명하는 작업에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어휘들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교육관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활동들의 전제가 마련되어야 하므로 그것은 또 다른 행동이나 질문을 연쇄할 수 있는, 즉 확장의 가능성을 내포한 문장이어야 한다. 또한, 삶의 태도와 가치관은 개인적이고 특수할 수 있으나, 그와 관련한 교육관은 타당성과 보편성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정리하면, 교사는 개인적이고 특수하며 조금은 설익은 나름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보편타당하고 확장 가능성이 있는 교육관을 세워야 한다. 이 과정을 지나 교사의 교육적 행동의 방향이 정해진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이미 올라와 있는 수업 영상을 그대로 링크해 놓고 주식 시세를 슬금슬금 확인하는 교사와, 사비를 털어가며 기기를 마련하여 더 효과적인 온라인 수업을 고민하는 교사의 차이가 그렇게 발생한다. 이 경유지를 지난 뒤, 그 방향이 어떻든 교육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은 이제 그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된다.
2. 핵심역량과 교과 이해
· 보편적 인간으로서 학생들에게 어떠한 능력이 필요한가?
·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학생들에게 어떠한 능력이 필요한가?
· 핵심역량을 기르기 위해서 나의 교과는 무엇을 제공하는가?
핵심역량에 관한 관심과 반영에는 다소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다. 핵심역량 중심의 교육과정은 시대적 맥락과 사회의 요구 속에서 개인이 발휘해야 하는 능력을 계발코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6가지 인재상에는 그래서 어떠한 능력이 있어야 하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핵심역량과 하위 요소 간의 위계나 연관이 엉뚱한 것들이 많이 있으며(심미적 감성 능력-정서적 안정감, 타인의 경험에 대한 공감 능력 등) 그 적절성과 충분함을 의심할만한 것들(여가 선용-적절성 의심, 지식정보처리-보편적 정의와 괴리, 다문화 관련 역량이 부재-충분함의 의심)이 많이 있다.
결과적으로 핵심역량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수업에서 구현하는 것은 결국 교사의 몫이 될 것이다. 교사는 보편적 인간으로서, 또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학생들에게 어떠한 능력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각 교과에서는 무엇을 제공해줄 것인가를 설정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교사에게 성취기준이나 학습 요소의 가치를 해석해야 하는 과제로 이어진다. ‘학생들이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교과의 가치에서부터 비유하기, 고쳐쓰기, 풍자와 역설, 반어 등의 성취기준 및 학습 요소들이 어떠한 가치를 갖는지를 밝혀내어 학생들에게 국어 교과를 바탕으로 더욱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제안하고 설득하고 경험하게 해야 한다.
사실 이 단계 정도에서 교사가 취해야 할 학습 형태들이 정해진다. 여기까지의 여정에 다다르지 못한 상태에서 수업의 기술이나 특정한 학습 모형에 몰두하는 경우 스스로 지치거나,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수업의 당위성을 잃어 그 방향을 놓치게 된다. 기존과는 다른 수업을 하고자 하는 교사들도 그렇게 원래의 수업으로 회귀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학습자 중심 수업과 협력 학습을 중심으로 하는 수업 혁신으로 처음 도전하는 교사들의 의도는 사실 조금 이기적인 측면이 있다. 많은 교사는 학생들이 지루해하는 수업을 하고 싶지 않다든가, 학생들이 재밌어하는 수업을 하고 싶다는 의도로 수업 혁신을 시작한다. 이러한 목표가 얼핏 학생들을 위한다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사실 그 기저에는 학생들이 지루해하는 수업, 학생들이 재미없어하는 수업을 진행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당혹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그러한 수업을 하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이유, 학생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이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이러한 이기심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의도에서라면 그 의지는 얼마지 않아 꺾이게 되기에 문제가 있다. 수업 혁신은 기존의 수업을 진행하기보다 더 까다로운 과정이 필요하며, 우리가 예상하는 재미를 실현하는 것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학습자 중심 수업이나 협력 학습이 제공할 수 있는 ‘재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재미’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철학의 수립과 가치의 규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 수업 기술과 형태를 실현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학습의 재미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 풍선을 불고 움직이고 손뼉을 치는 것으로는 학습의 재미를 유발할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내가 지금 배웠다는 느낌, 모르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성취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느낌 등이 교사로서 수업에서 제공해야 하는 재미이다.
반대로 여기까지의 여정이 충실하게 이루어진 경우, 특정 수업 기술과 형태를 선택·구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삶을 살게 하고 싶다면 시를 통해 인간의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소설을 통해 다양한 세계와 각각의 상황에 부닥친 인간을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화자의 감정이나 작가의 창작 의도를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그에 적합한 제재가 선정되어야 하며 이러한 배경에서 시 수업이나 소설 수업에서의 협력 학습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3. 성취기준과 단원 구성
· 나는 성취기준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
· 성취기준들은 어떠한 목적에서 단원으로 구성되었는가?
이 부분에서 살펴야 하는 정보들은 대부분 교사용 지도서에 실려있다. 교사용 지도서에 실려있는 정보로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없다면, 교육과정 해설서나 이론서들을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영역부터는 조금은 특수한 예이지만, 2021학년도 환서중학교 국어 수업 구상의 예시를 들어야겠다.
동아 출판의 2학년 1학기 1단원의 제목은 <세상을 보는 눈>으로 (1) 관점에 주목하여 작품 감상하기, (2) 관점에 주목하여 한 권의 책 읽기라는 두 개의 소단원으로 구성되어있다. 관련 성취기준은 ‘[9국어 05-04] 작품에서 보는 이나 말하는 이의 관점에 주목하여 작품을 수용한다.’이다. 결국 문학 작품에서 형상화된 세계를 말하는 이의 관점에서 올바르게 읽어내기 위한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단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관점’이란 무엇이며, ‘작품에서 보는 이나 말하는 이의 관점에 주목하여 작품을 수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점’은 문학 비평과 시, 소설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에 이 단어에 대한 개념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 단원에서의 ‘관점’은 문학 작품 속 말하는 이가 작품 속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말하는 이가 누구인가?’, ‘그가 작품 속 세상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즉, 말하는 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중심에 두고 작품을 읽음으로써 작품을 온전하게 읽어내는 문학 작품 감상 능력을 신장하기 위한 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이 있다면 문학 작품의 오독을 막을 수 있으며 그 문학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와 감동을 오롯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소단원(1)을 통해서 말하는 이의 관점을 중심으로 문학 작품을 읽는 방법을 익히고, 소단원(2)에서 직접 책을 읽어보면서 그 지식과 기능을 수행해보자는 의도에서 이 단원이 묶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소단원 구성은 자연스럽고 타당해 보인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교사용 지도서를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성취기준의 해석과 대단원 구성의 취지는 타당하다. 그러나 단원 설정의 취지에서 사건을 누가 보고 전달하는가에 따라 ‘그 느낌과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설명은 조금 어색하다. 말하는 이의 관점에 주목하여 작품을 보는 것은 ‘느낌과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품을 올바르게 읽어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을 ‘풍부하게’ 감상한다는 설명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문학 작품 속에서 작가가 형상한 세계를 올바르게 읽어낼 수 있다는 설명이 더 적절할 것이다.
또한 작품 감상 내용을 관점을 달리하여 재구성하거나 자신만의 관점으로 새롭게 창작하는 활동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작가는 정밀한 의도에서 말하는 이를 설정하였기 때문에 말하는 이의 관점에 따른 생각의 방향, 시선의 한계 등은 그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문학 작품에서 형상화한 세계를 말하는 이의 시선을 떠나 더 다양하게 파악하는 것이 문학 작품을 읽는 주된 목적이 아닌데, 굳이 다양한 관점을 떠올리거나 말하는 이를 달리하여 작품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필요한 활동이 될 것이다.
이 단원의 제재로 ‘전봇대’와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적절하게 선정되었다고 생각한다. 전봇대는 ‘전봇대’라고 하는 일반적 대상을 ‘연대를 추구하는 외로운 존재’로 바라보는 개성적이고 감동적 관점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 감상의 난이도나 주제도 적절해 보인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봉건적인 관점에서의 여성관이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으나, 그것이 불합리한 사회적 편견임을 전제로 하여 감상한다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 말하는 이가 개성적으로 설정되었을 때 형성되는 효과가 잘 드러나고, 현대적 관점에서 ‘예전에는 저런 생각을 했었구나’라는 관점에서 감상한다면 그 주제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단원(1)의 적용 활동에 있는 두 편의 시조는 볼륨도 크고, 굳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알레고리’로서의 시적 대상을 해석하는 경험이 이곳에서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에 ‘알레고리’로서의 시적 대상을 해석하는 방법까지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며, 이것을 다른 작품으로 대체하거나, 시의 관점을 해석하는 경험으로서 현대 시 작품의 추가를 고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4. 핵심 질문
· 수업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은 무엇인가?
· 핵심 질문은 어떠한 소질문들을 유발하는가?
핵심 질문이란 한 차시 혹은 한 단원의 수업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출발 질문, 전개 질문, 도착 질문 등의 개념이 있고 나름의 구성 방법을 제안하는 연구도 많이 있지만, 나는 수업의 흐름을 구상하는 관점에서 조금은 유연하게 생각하여 핵심 질문을 구상한다. 이를테면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글쓰기의 단원에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이 핵심 질문을 설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핵심 질문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어떤 내용에 감동하는가?’, ‘나의 경험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이 나의 경험 속에서 감동과 즐거움을 느끼려면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등의 다양한 소질문들을 파생한다.
그렇다면 1단원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을 어떻게 설정할 것이고 이어지는 소질문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까 고민을 해야 한다. 말하는 이를 살피면서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문학 작품을 올바르게 읽어내기 위함이다. 그래야 문학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감동이나 재미, 깨달음을 온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작 질문으로 “문학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문학 작품을 올바르게 읽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문학 작품에서 말하는 이는 무엇이며, 말하는 이가 가진 관점이란 무엇일까?”-“해당 작품에서 말하는 이는 누구이며 어떠한 관점을 갖고 있는가?” 등이 될 것이다. 차시별 수업에 필요한 질문들은 읽기의 단계와 해당 수업에서 다루는 작품에 맞게 이후의 과정에서 마련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5. 제재와 학습 형태
· 어떠한 학습 형태가 왜 필요한가?
· 핵심 질문과 소질문들을 탐구하는 데에 어떠한 제재가 필요한가?
이렇게 ‘무엇을 왜’ 가르칠지를 구상한 이후에 학습 형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학생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배우지만, 기본적으로는 ‘교사의 도움(설명 또는 질문)’, ‘모방’, ‘협력’ 등을 통해 핵심 질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학습이 이루어진다. 1단원 (1)관점에 주목하여 작품 감상하기의 단계에서 문학 작품에서의 ‘관점’을 학생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설명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제재인 ‘전봇대’를 올바르게 읽어내는 난이도는 ‘모방’과 ‘협력’ 모두 필요하다는 예상을 한다.
그래서 먼저 문학 작품의 말하는 이, 그리고 관점에 대한 설명이 ‘직접 교수법’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관점에 주목하여 시를 감상하는 방법을 모방할 수 있도록 교사의 ‘시범’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과서의 제재 외에 시범으로 보여줄 조금 더 쉽게 해석이 가능한 시 작품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전봇대>의 시 읽기에 돌입한 이후에는 학생들끼리 의견을 교환하며 시의 내용을 바탕으로 말하는 이의 관점을 중심으로 시를 해석하는 활동은 모둠 활동으로 진행하여 학생 간의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구상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6. 수업 디자인
· 핵심 질문과 소질문들을 어떠한 경험으로 제시할 것인가?
· 학생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모방’ 또는 ‘협력’하는가?
· 학생들은 어떠한 순간에 어려워할 것이며 어떠한 순간에 앎의 재미를 느낄 것인가?
이제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수업의 구상을 진행해야 한다. 수업의 진행하는 데에 주된 교재는 역시나 교과서이다. 그런데 교과서는 차시별로 구성된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 내용을 몇 차시의 수업으로 구성할 것인지 분류하고 각 차시를 어떠한 핵심 질문으로 이끌어 나갈지, 어떠한 흐름으로 진행할지를 정해야 한다. 교과서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는 역시 교사용 지도서에 제안된 교수·학습 계획을 살피면서 조정하는 것이 편하다.
<충남 새넷 2021 새 학기 준비 연수>에서는 수업 사례 발표를 위하여 차시별 수업 계획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 소개했다. 그러나 매번 그렇게 수업 계획을 도식화하지는 않는다. 어떤 때에는 간략한 메모로, 영 다급한 날에는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면서 다음 과정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투박하게 정리하더라도 최소 소단원 단위의 수업 구상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계획은 확정된 것이 아니다. 특정 수업에서 구상한 학습이 부진하다면 활동이나 자료를 추가하기도 하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도입-전개-정리의 3단 구성으로 1차시의 수업을 마련하는 형식을 선호한다. 활동 이전에는 첫 핵심 질문의 배경지식이 될 수 있는 경험을 떠올리거나, 배경지식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면 간접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학습 동기를 유발한다. 학습 내용에 따라 직접 설명하고 질문하는 것으로 1시간이 다 채워지기도 하지만, 국어 교과의 특성상 1회 이상의 협력 학습을 통하여 학생들이 말하기/듣기/읽기/쓰기의 언어 활동을 경험하도록 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차시별로 수업을 구상하는 것은 실질적인 수업의 장면을 만드는 핵심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단계에서의 관건은 학생들이 ‘모방’과 ‘협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질문을 배치하고, 그에 적절한 질문과 자료, 활동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설정한 핵심 질문들을 학생들의 처지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며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떠한 자료와 활동을 제공할지에 대한 고민이 진행된다.
물론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수업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 수업 상황에서는 교사의 관찰과 안내, 질문, 힌트 등의 즉흥적 스캐폴딩 작용이 핵심이 될 것이다.
7. 교육 자료 구성
· 교과서의 활동 중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어떠한 자료, 질문, 활동들이 더 필요한가?
차시별 수업 구상이 끝났다면, 이제 각 수업에 필요한 자료들을 마련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지금 드는 수업 구상의 예시의 앞선 경유지에서 나는 1단원(1) 1차시에서 필요한 자료로 먼저 동기유발에 사용할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의 간략한 소개 자료가 필요하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이 책의 난이도는 중2 학생들이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상황과 유사하고 흥미로운 도입부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 읽기의 가치를 설명하는 예시로 적절히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도전적인 독서를 좋아하는 학생은 실제로 이 책에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재미있는 자료’ 정도로 생각하는 동기유발은, 그보다는 학생의 경험과 학습 내용을 연결 짓는 생각을 유발하는 것이 핵심일 것이다. 이 수업의 시작 질문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이며 나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으며 재난 속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 고민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난 한 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설명하면서 문학 작품의 가치를 소개할 것이다. 이는 자신의 독서 경험을 떠올려보는 시범으로도, 또 독서 경험이 적은 학생들에게 문학 작품과 관련한 배경지식을 보충해주는 자료로서도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1차시의 수업에서 단원의 길잡이를 읽은 뒤에는 학생들의 모둠 활동이 이어진다. 여기서 모둠 활동을 진행하는 이유는, 문학 작품을 읽는 데에 그저 주관이 아니라 작품에 근거한 해석을 위해 자기 생각을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기 위해서는 ‘말하는 이’, ‘관점’, ‘시적 상황’, ‘시적 정서’와 같은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이러한 개념의 점검이 생략된 상태에서 바로 시 읽기 활동으로 들어간다. 또한, 적용 활동에서 이어지는 작품으로 시조가 제시되어 있어서, 기본 개념을 익히고 시를 읽는 방법을 배우는 현대 시를 읽는 활동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학습지를 준비하였다.
안도현의 ‘스며드는 것’은 SNS로도 많이 공유되는 대중적인 작품이다. 학생들이 이 시를 접하지 않더라도 시적 상황이 복잡하지 않아 그 난도가 높지 않으며, 또한 시적 대상에 한정하여 말하는 이의 개성적인 관점을 생각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마도 학생들은 마지막 질문을 어려워할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 ‘관점’이란 개념을 어떠한 의미에서 생각해야 하는지 활동 안내에 미리 적어주었고 이 개념은 학생들에게 설명된 상태에서 수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말하는 이와 작가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라는 발문은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이 혼란해 할 것이다. 더 좋은 발문이 생각난다면 그것으로 교체하고, 어쩔 수 없다면 ‘말하는 이가 곧 작가인가?’, ‘그렇다면 말하는 이는 작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라는 추가적 질문을 통해서 말하는 이에 작가의 생각과 삶이 투영되었지만, 말하는 이가 곧 작가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활동지는 학생들이 협력 학습 방법을 익히는 연습을 제공해주는 목적을 함께 갖는다. 그래서 문제를 함께 읽고 잠시의 시간을 갖고, 한 사람씩 모두 이야기하고, 의견을 종합하여, 각자의 생각으로(다른 이의 학습지를 베끼지 않고) 학습지를 채울 것을 강조하고 관찰하여야 한다.
8. ‘나의 수업’을 위한 더 많은 질문들
나름의 여행 구상은 일단 여기까지만. 수업으로 향하는 여정들을 중, 이 글을 통해서는 ‘수업 준비 과정’까지의 질문들만 다루고자 한다. 미처 다루지 못한 경유지는 조금은 거친 질문들과 함께 아래 표로 정리해보았다. 물론 우리가 성을 지나고 늪을 지나는 중, 또 다른 질문들을 더 만날 수도 있겠다.
코로나 시대의 교육 문제: 원격 수업이 대면 수업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림 설명 : 원격 수업 초창기의 나는 컨텐츠 수업을 진행하면서 e학습터에 대한 불신으로 유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했다. 그래서 링크를 클릭만 해도 학생들은 수업 이수가 가능했다. 음악도 넣고 자막도 넣었다. 그런데 유튜브가 분석해준 이 36분짜리 영상의 평균 시청시간은 15분이 채 되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실시간 수업이든 콘텐츠 수업이든 절대로 대면 수업을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첫째로 원격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앞서 이야기한 ‘무엇을 가르칠까’의 문제가 여전히 생략되어 ‘코로나 이전의 교육 문제’가 극복되지 않는 듯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원격 수업이 대면 수업을 어떻게 비대면으로 구현하는지에 집중하며 줌, 구글 클래스룸, 패들렛 등과 같은 새로운 매체를 찾아 익히고 제안하는 모습은 우리가 그 이전에 ‘거꾸로 수업’, ‘하브루타’, ‘비주얼싱킹’과 같은 수업 방법이 좋은 수업을 담보해줄 것이라는 환상이 다시 귀환하는 것만 같다.
새로운 매체와 같은 기술적 방법에만 다시 몰두하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가르쳤나’, ‘학생들은 무엇을 왜 배웠나’와 같은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또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무엇을 가르칠까’라는 질문의 답변에 후행하여 코로나 그 이전의 문제를 극복한다면 원격 수업으로도 성공적인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어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나는 비관적이다.
원격 수업이 대면 수업을 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의 두 번째 이유는 원격 수업이 ‘교사 변인’ 외에 너무 많은 실패의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숨이 나는 인터페이스에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적 플랫폼, 여전히 19세기의 그것인 부실한 학교 공간, 한정된 예산에서 지급된 열악한 기기들은 우리를 지치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원격 수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원인은 ‘학생 변인’에 있다. 학생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일상은 무너지고 관계는 단절되었다. 집에서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 시간 속에서 반복한 잘못을 매번 부모님께 들켰을 것이다. 핸드폰 블루라이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늦게 일어나는 날엔 학교에서의 독촉 문자와 전화가 쏟아졌을 것이다.―나는 일어나지 않는 학생에게 수십 통의 전화를 건 적도 있다.―그 자책과 불안 속에서 그런데도 학생들은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학생들의 가정환경에 따라 이러한 어려움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나라도 보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틀렸다고 이제 생각한다. 학생들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이 체계적이고 성실하게 원격 수업에 참여하길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고 생각한다. 교사들도 뉴스로 접해야만 했던 원격 수업인데 학생들은 그보다도 더 늦게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아직 삶의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알아서 자신의 생활 리듬을 지키고 성실히 생활하라는 메시지가 과연 응원이 될 수 있었을까?
마치며 : 마지노선 그리고 ○○○선
마지노선(Maginot Line)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국경에 설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건설을 제안한 앙드레 마지노(Andre Maginot) 장관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하니 ‘마지∨노선’이 아닌 ‘마지노∨선’이라고 끊어 읽는 것이 옳겠다.
이 마지노선은 막대한 노력과 자금을 들여 완성한 요새였으나, 2차 세계 대전에서의 독일은 요새가 마련된 프랑스와의 국경을 피해 비교적 돌파가 쉬운 벨기에로 우회하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이 요새는 무시라도 당하듯이 덩그러니 남겨진 채, 결국 적군의 본토 침공을 허무하게 허용하게 된다.
이러한 마지노선은 현재에 와서 ‘물러설 수 없는 선’이라는 관용적 의미로 자주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노선이다!’라는 선언은 어쩐지 위태위태한 느낌을 준다. 우선 그 어원이 되는 요새가 애초에 침공을 예상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선언과 동시에 위기가 환기된다. 게다가 결국 그 방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어원의 경력’ 때문에 그 비장함에 비해 어째 든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노선을 지켰다.’라는 표현보다는 ‘마지노선이 뚫렸다’라는 문장이 더 익숙하다.
우리의 삶에도 꼭 그러한 ○○○선이 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저마다 지켜야 하는 선을 사수하며 살아간다. 쓰레기가 여기저기 방치된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다 마신 일회용 컵을 가방에 넣는 것이나, 차 없는 건널목, 모두가 무시하고 지나가는 붉은 신호 앞에 묵묵히 서 있는 것과 같이,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나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겠다는 선’이 각자의 마음속에 감춰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청춘의 열기가 사그라드는 것일까. 요즈음의 나는 마지노선을 지키는 개인의 태도나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래서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 그래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그 결과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마지노선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의 사수에는 실패했다. 마지노선을 지키는 삶은 내가 그렇게 살면 될 일이지만, 내가 마지노선을 지키는 것이 무엇을 지키거나 바꿀 수 있는 일일까? 내가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면 우리의 자연이 지켜질까? 내가 기부를 한다고 지구의 가난이 없어질까? 내가 열심히 수업한다고 학생들의 삶이 바뀔까? 그렇게 마지노선의 성패가 내 손을 떠나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내 마지노선을 우회하는 강렬한 침공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나이가 들어가는 나, 그리고 나의 마지노선은 허무라는 침공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오래전 마지노선 요새가 그랬듯, 삶에서의 마지노선 사수도 결국 실패의 운명을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 긴 시간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린 수업 영상에 ‘싫어요’가 처음 달리기 시작했을 때였을까, 야심 차게 진행한 원격 수업의 마무리로 올려놓은 구글 설문지에 엉뚱한 대답이 올라왔을 때였을까, 그보다 먼저 교육이 사회를 바꾸기는 어렵겠다는 의심을 시작한 어느 날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떨치기 어려운 실패의 예감으로 마지노선에 서 있다. 하지만, 시인 이성복은 <극지의 시>라는 시론집에서 ‘시(詩)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려다 끝내 실패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나는 그것이 내가 접한 시의 정의 중에서 제일 탁월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시는 일상 언어로 추상화할 수 없는 감정과 세계를 온 힘을 기울여 문학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애초에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는 대상이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라는 한계는 모든 시를 결국 ‘실패’라는 쓸쓸한 결말로 이끈다.
그래도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결국 써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포착한 찰나가 태생적 한계로 결국 언어로는 온전히 담아질 수 없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완전히 다다를 것이라는 희망은 비록 헛된 것일지라도 말이다. 또한, 진실에 비해 투박하고 엉성할 수밖에 없는 그 언어들을 또다시 조각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그것이 비록 시인의 찰나에서는 왜곡된 모습일지라도, 독자의 삶에서 다시 새로운 진실이자 찰나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마지노선에 선 나도 매번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상황에 놓인다. 실패의 가능성이 어찌 원격 수업만 있겠는가. 그리고 나의 교육도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려다 끝내 실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 그리고 수업이라면, 또 교육이라면, 시의 그것처럼 내 손을 떠난 뒤엔 이제 학생들의 몫이라는 반전이 남지 않았을까? 나는 나의 마지노선을 지킬 뿐, 조금 무책임하고 얄미운 말이지만, 그 이후는 어쩌면 이제 내 몫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어쩌겠나, 부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길, 제발 청출어람이 청어람이길!
들어가는 글_2021 새넷 봄호
1. 시론
2. 포럼 & 이슈
3. 특집
4. 전국 NET
5. 수업 나누기 & 정보 더하기
6. 티처뷰_teacherview
7.이 책 한 권!
2020년
2019년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