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행은 훌륭하다 #20
아이가 웃는다.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 내게 안긴다. 꺄르르 웃어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엔돌핀이 무한대로 솟는다. 세상에 이런 봄이 없다. 그러나 봄은 짧다. 24시간 아이에게 매인 채 화장실 조차 두 팔 무겁게 가고 있노라면 몸은 더운 여름이요 마음은 시린 겨울이 되고 만다.
한 손으로 간신히 두루마리 휴지를 끊어내며 엄마는 생각한다.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떠나고 싶다아아아. 그래. 가자. 여행, 여행, 여행. 24개월이 안된 아기들은 비행기도 거의 공짜로 탈 수 있다는 정보도 별안간 떠오르는 순간.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않다. 친정찬-쓰를 쓸 여건이 되지 않는 이상 아이는 여행길에서도 나의 껌딱지. 아가씨 시절 여행을 생각하면 충청남도 오산이다. 본격적으로 엄마와 아이의 로망을 동시에 이뤄줄 별 다섯 개 짜리 여행을 고민하게 된다.
일단 엄마의 로망만 한 트럭이다.
"아가씨 때처럼 신나게 놀거야. 시원한 커피 한 잔 손에 들고 쨍~한 햇빛을 누려야지. 쇼핑도 잔뜩 해와야 하니까 캐리어 대신 이민 가방 가져갈까? (가만있자. 비행기에 몇 kg까지 실을 수 있더라.) 백 만 년 만에 좀 차려입고 카쓰에 올릴 인생샷도 몇 장 찍어야 겠고 우아하게 미술관 나들이도 좀 해줘야지. 많이 움직이니까 금방 배고파질거야. 하루에 맛집 탐방 10개 씩하는 걸로. 가만있자... 우리 껌딱지한테도 뭔가 의미있는 여행이어야 할텐데 말이지."
우리 껌딱지의 로망을 헤아려 볼 차례다.
"그래. 우리 껌딱지 엄마 닮아서 이쁜 거 엄청 좋아하지? 까짓거 옷이고 장난감이고 맘껏 고르게 해주지 뭐. TV에서 본 애들이 막 돌아다니는 테마파크에선 아예 눌러 살자고 하겠지? 이것저것 그리고 만들어보는 것도 좋아할테고 말야. 커서 '이거 엄마가 찍어준거야' 생색낼 만한 사진도 잔뜩 찍어줄게!"
상상이 꼬리를 물고 번식할수록 엄마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런데 로망의 가짓수가 칠첩반상이다.
"근디... 저거 다 해보려면 세계일주라도 해야 하...나? ..."
갑자기 풀죽은 얼굴이 되어 '애 데리고 여행은 무슨'하며 조용히 현실로 복귀하려는 당신을 위해 준비한 도시가 여기 있다. 엄마와 아이의 오색 로망이 함께 이뤄지는 여행지, LA다.
1. 엄마와 아이가 함께 신나는 테마파크를 즐기고 싶다면
2. 엄마와 아이가 함께 이뻐지는 쇼핑을 꿈꾼다면
3. 엄마와 아이가 함께 우아해지는 미술관에 들르고 싶다면
4. 엄마와 아이가 함께 화보의 주인공이 되는 캘리포니아 햇살을 만끽하고 싶다면
5. 엄마와 아이가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는 영화 속 명소가 궁금하다면
LA는 엔터테인먼트의 도시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디즈니랜드, 레고랜드.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테마파크가 즐비하다. 하지만 아이는 신나서 방방 뛰고 엄마는 땀 흘리며 줄 서고 있는 슬픈 그림을 그릴 필욘 없다. 아이에겐 돌고래 소리 절로 나는 재미를, 엄마에겐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을 선사할테니까.
엄밀히 말해 LA도 아니고 다른 테마파크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개인적으로 유니버셜 스튜디오보다 좋았던 레고랜드를 소개한다. (LA 다운타운에서 차로 2시간 조금 덜 걸린다.)
레고월드 안에 진짜 세상이 있다. 우리가 여행 책자 표지에서 봐왔던 전세계 명소들이 그림자 끝자락까지 디테일하게 설계되어 레고로 만들어졌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도 흠잡을 데 없는 정교함에 한 번, 군데군데 움직이는 레고를 발견하는 재미에 한 번 더 감탄한다. 미니어처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으면 (거짓말 한 스푼 보태) 진짜 그 곳에서 찍은 것 같다. '다음엔 여기 가봐야지' 여행 뽐뿌를 일으키기도 하는 곳.
굳이 이 스팟을 찾지 않더라도 레고랜드 자체가 온통 레고 모형으로 가득 차 있다. 3걸음에 한 번 씩은 사진 찍어가고 싶은 귀여운 레고모형들이 눈에 띈다.
레고의 세계는 정말 다양했다. 단순히 집이나 배, 건물을 짓는 세트 뿐 아니라 <호빗>이나 <스타워즈>같은 영화, <빅뱅 이론>같은 TV 시리즈를 테마로 한 레고도 눈길을 끌었다. 아래로는 한 살부터, 위로는 99살까지 즐길 수 있는 넓은 스펙트럼도 놀라웠다. 아이와 엄마가 아웅다웅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장난감. 무엇보다 지갑을 열게 하는 건 '가격'이다.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시중가격을 찾아봤더니 거의 절반값이다.
한국에서 워터파크 갈 일이 생기면 일단 손이 배로 향한다.어떤 수영복을 입고 (그 위에 뭘 걸쳐야) 얘들을 가릴 수 있을지... '출산 후에도 변함없는...'으로 시작하는 기사 타이틀을 보며 우울과 좌절을 경험하곤 하는 (하지만 클릭은 하는) 보통 엄마들에게 레고랜드의 워터파크는 완벽한 자유를 선사할 것을 확신한다. 그 누구도 당신을 곁눈질하지 않는다. 레고랜드 안 워터파크는 레고랜드 입장권에 아주 약간의 비용을 추가하면 구입할 수 있다.
레고랜드는 정말 창의적인 놀이기구로 가득 차 있다. 무섭거나 안 무서운-으로 나뉘는 놀이공원이 아니다. 예를 들면 '레고 소방대'같은 것. 레고로 만들어진 차가 3,4대 늘어서 있다. 한 명이든 3,4명 가족이든 차에 탄다. 그리고 소방 알람이 울린다. 10m 앞 불이 난 건물을 향해 온 힘을 다해 펌프질을 해야 한다. (1명이 탄 차는 ......) 사정거리에 이르러 차에 설치된 소방호스를 들어 물을 뿌린다. 진짜 물이 건물에 닿으면, 그 팀이 승리한 것.
아이들이 레고로 만들어진 자동차를 운전한다. 그냥 치고 받는 범퍼카가 아니다. 그럴싸하게 놓인 도로를 질서정연하게 주행(?)한다. 이따금 사고를 내는 어린이 운전자들은 곧장 도로에 난입(?)한 직원의 경고를 받는다.
레고랜드는 단순 테마파크 이상이다. '레고'란 브랜드를 전세계인들에게 체험하게 하는 마케팅 현장이다. 실제로 레고랜드 곳곳엔 다양한 레고를 만들어볼 수 있는 공간이 무척 많았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이 곳에 들어온 어린이들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두한다.
레고를 가지고 놀았던 건 대충 유치원생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손톱보다 조금 작은 레고 세트 하나를 마르고 닳도록 가지고 놀았다. 레고랜드 스토어에서 느낀 건 세상은 넓고 레고는 많다는 것과 이제 걷기 시작한 애들도 가지고 놀 수 있는 레고가 있다는 것. (정확히 1살 반부터 가지고 놀라고 적혀 있긴 하다.) 아이에게 이 닦고 밥 먹고 잠 자는 라이프 패턴을 알려줄 수 있다는 키트부터 아이스크림과 햄버거를 쌓아볼 수 있는 키트까지 어른인 내가 봐도 욕심나는 게 많았다. (실제로 1살 짜리 레고를 가지고 1시간을 넘게 놀았다. 훌륭한 놀이감이다.)
누가 뭐래도 쇼핑은 여행의 중요한 요소다. 하루가 다르게 옷이 작아지는 아이도 아이거니와 애엄마 소리는 안 듣고 싶은 엄마들에겐 더욱 그렇다. LA 시내엔 핫한 쇼핑스팟인 그로브몰이, 좀 더 멀리 가면 트렁크 가득 쇼핑해올 수 있는 데저트힐 아울렛이 있다. 내 경우엔 레고랜드 일정을 고려해 규모가 좀 작은 칼스바드 아울렛을 선택했지만 그 곳에서도 하루가 부족했다. 쇼핑을 즐긴다면 LA는 더할나위 없는 곳.
그루브몰은 LA의 대표적인 쇼핑몰이다. 백화점도 있고 전차(?)도 다니지만 사실 규모가 그리 크진 않다. 가격으로 승부하는 아울렛에 비해 쌀 리도 없다. 하지만 30대 여성들의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 핫한 의류, 생활용품, 가구 브랜드들이 한 데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방문 가치가 있는 곳. Anthropologie에선 앞치마도 이리 이쁠 수 있구나 깨닫고, Crate & barrel에선 그릇과 가구를 짐짝채 실어 나오고 싶다. DVF 매장에선 누가 아이 업어갈까봐 이 옷들 다 입어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쇼핑의 짝꿍은 맛집이다. 그루브 바로 옆에 그런 마켓이 있는 것은 양측 모두에게 행운이다. <파머스 마켓>에서 신선한 채소와 과일, 식재료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요리를 가볍게 즐길 수 있다. 수다를 떨며 숟가락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미소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로브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유난히 많아 보였다. 이들을 위한 문화행사도 다양했다. 내가 들렀던 날엔 <LA KIDS FASHION FAIR>와 잔디밭 콘서트가 열렸다.
이 중 LA KIDS FASHION FAIR는 간단히 아이들을 위한 작은 축제였다. 몇몇 브랜드가 테이블을 차려놓고 아이옷과 신발, 양말을 판다. 공짜 컵케이크와 음료가 무제한으로 제공될 뿐 아니라 페이스 페인팅과 풍선쇼도 아이들을 즐겁게 했다.
키즈 패션 페어가 끝난 후 잔디밭엔 콘서트가 열렸다. 가수는 잔디밭에 앉은 이들과 대화하며 노래 했다. 잠시 쉬고 오겠다며 5분 후에 보자고 이야기하는 여유도 인상적이었다.
아이들도 알 건 안다. 좋아할 건 좋아한다. 그로브몰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브랜드들이 꽤 많았다.
가장 신선했던 건 <아메리칸 걸> 매장이었다.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끼고 다니는 인형의 뷰티를 위한 아이템이 즐비했다. 그야말로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인형을 위한 (비싼) 토탈 뷰티 솔루션 샵인 셈이다. 가격표를 보니 당분간 딸을 이 곳에 데리고 오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형이 진짜 이쁜 코트를 입고 진짜 이쁜 캐리어를 끈다. 어릴 적 종이 인형에 종이 옷 오려 입히던 그 시절이 아니었다.
아주 짧지만 그로브몰엔 트램이 다닌다. 그것도 2층이다. 아직 다양한 대중교통을 접해보지 못한 아이에겐 무척 신선한 볼거리였다. TV에서 자주 보는 토머스와 친구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이야기한 파머스 마켓의 명물 중 하나는 호박 아이스크림이다. 쨍한 날씨, 이 곳을 그냥 지나칠 여자 사람은 드물다.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핥아 먹고 있는 엄마를 가만히 놔둘 아이는 더욱 드물다.
그로브몰같은 종합 쇼핑몰과는 다른 각도에서 매력적인 것이 바로 '아울렛'. 그 매력은 한 단어로 정리된다. '가격'. LA에 간다는 내게 지인들은 하나같이 가방 큰 것 가져가라 조언했다. 본격적인 쇼핑에 돌입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크지도 않은 아울렛에 10시에 들어가 7시에 나왔다. (들어가보지 못한 매장이 많다.) 이민 가방을 반 넘게 채울 정도로 많이 샀는데 30만원 정도 들었다. 나름 백화점 입점 브랜드 가방도 있었고 (아이것도 끼어 있었지만) 신발도 5,6개 쯤 샀는데 그랬다. 워낙 싼 미국 가격에 쿠폰의 힘이 컸다. (온라인에서 다운받아 가거나 그게 안되면 인포데스크 가면 바로 준다.매장 안에서 아이와 씨름하고 있으면 이를 불쌍하게 여긴 매니저가 와서 쿠폰을 선물하기도 했고, 매장별로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곳도 많았다.)
요즘은 너무 흔해진 게 해외여행이라지만 그래도 챙기고 싶은 지인은 있기 마련이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브랜드 제품이라면 선물에 더욱 적합할 터,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대로 선물을 장만할 수 있다. 부모님께 드릴 C 브랜드 가방은 10만원 정도. 친구에게 선물할 P 브랜드 니트는 3만원 선이었다. 임신한 친구에게 줄 아기옷은 한 벌에 만 원 남짓.
아이들 브랜드가 유난히 많았다. 일반 의류 매장 안에도 아이들 옷 코너는 항상 있었다. 워낙 싼 가격에 유행에 민감하지만 않다면 그대로 5년 치 옷을 쟁여가도 좋을 것 같았다. 간절기에 입기 좋은 상하의 세트가 보통 만 원을 넘지 않았다. 한국에서 7,8만원 정도 했던 니트류도 3만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신나게 쇼핑백을 수집하다보면 날이 저문다.
미술관은 유럽인 줄 알았다. 미국은 그저 화려한 네온싸인의 나라라고만 생각했다. 이렇게 훌륭한 미술관들을 오지 않았다면 모를 뻔 했다. 세계적인 명화를 소장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예술 이상의 감동을 자아내는 자연, 아이를 배려한 시설과 동선, LA의 상징이 된 설치미술까지 모든 것이 놀라웠다. 미국의 이미지 자체를 바꿔버린 LACMA, 석유재벌 게티가 세상에 남긴 위대한 미술관 게티 센터를 소개한다.
미술에 문외한이다. 무슨 사조, 무슨 화법으로 그린 그림인지 들은 들 들리지 않는다. 다만 화가가 어떤 마음과 상황에서 그린 그림이란 '이야기'엔 귀가 쫑긋한다. LACMA에는 모네, 고갱, 드가, 로트렉 같은 대가의 그림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내 눈과 귀를 쫑긋하게 한 건 모네와 로트렉의 그림이었다.
모네의 그림 중 유독 인상적인 것은 익히 알려진 <수련>과 <정원의 두 여인>이었다. 문외한의 생눈으로 봐도 왜 폴 세잔이 모네를 일컬어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심히 붓을 찍어 누른 듯 하지만 꽃이 되고 빛이 되어 버린다. 빛에 몰두한 탓인지 말년에는 거의 시력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말년의 모네가 그린 그림이 궁금해졌다. 듣지 못하게 된 베토벤이 끝내 길이 남을 곡을 남긴 것처럼 모네도 그러했을까.
니콜 키드만의 투명한 피부와 붉은 입술로 기억되는 영화 <물랭루즈>에 나오는 난장이 화가의 이름을 기억하는지. 그의 이름은 툴루즈 로트렉, 귀족으로 태어났으나 평생 다리에 장애를 안고 산 천재 화가다. LACMA에 전시된 그의 그림 중 <메살리나 The Opera 'Messalina' at Bordeaux>는 로트렉이 실제 오페라 <메살리나>를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그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뇌성마비와 언어장애를 가진 50세의 남편,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18살의 아내 메살리나를 맞이한다. 어머니에게조차 괴물같은 남자라 무시당하며 자란 클라우디우스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아내를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죽인다. 어려서 다리를 다쳐 키가 자라지 않았던 로트렉은 클라우디우스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터. 투구에 가려진 황제의 눈빛이 슬퍼보인다.
LACMA가 고전적인 명화만 전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획전 형식으로 다양한 예술 세계를 전달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Islamic Art Now>였다. 폐쇄적인, 지극히 종교적인 세계일거라 여겼던 이슬람의 또다른 면모를 조명한 전시의 백미는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이슬람 예술이었다. 걸음을 떼는데 한참이 걸렸던, 인상적인 작품의 연속이었다.
LACMA는 안팎이 꽉 찬 미술관이다. 내부에 전시된 그림과 조각 뿐 아니라 외부에 설치된 조형물도 무척 유명하다. 그 중 가로등과 엄청 큰 돌은 꼭 찾아서 인증샷을 찍을 것을 추천.
LACMA에서 가장 많은 셔터가 눌러지는 장소다. 202개나 되는 가로등을 줄 세워 놓았다. 해가 지고 불을 밝혔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지만 5시에 LACMA가 문을 닫은 통에 사실여부를 확인하진 못했다.
<공중에 떠 있는 돌>이란 이름이 붙은 이 바윗덩어리는 그 예술적 함의보다 수송 비용에 더 귀가 쫑긋했던 작품이다. 수송 과정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던 이 돌은 무려 340톤, 수송 비용은 천만불이 들었다고 한다. (오 마이 갓) 이 작품을 기획한 마이클 하이저의 이야기가 사뭇 흥미롭다. 24살의 마이클 하이저는 아주 오래 전, 매우 거대한 돌로 자신들의 예술을 했던 선사시대를 기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크레인이 부서지고, 알맞는 돌을 찾지 못하며 보낸 40년의 세월이 지나 그는 드디어 이 돌을 발견한다. 그리고 2012년 LACMA에 기어이 이 작품을 걸었다. 그 이야기를 알고 거대한 돌덩이를 올려다보니 캘리포니아의 쨍한 태양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다. 하늘과 태양, 거대한 돌덩이만이 시야에 존재하니 잠시 선사시대에 온 듯한 느낌이다.
TIP. 에펠탑을 손바닥에 놓고 찍는 게 파리 여행객의 필수 코스가 됐다면, 이 곳에선 누구나 두 팔로 돌을 이는 포즈를 취한다.
Boone Children's Gallery는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다. 붓, 연필, 마커와 같은 다양한 도구가 종이와 함께 무한정 제공된다. 그림은 가져가거나 전시할 수 있다. 돌잡이 아가부터 제법 큰 어린이들까지 누구나 위대한 꼬마 화가가 될 수 있는 공간. 부모들에겐 멋진 뷰와 함께 잠시의 휴식을 선사한다.
'뚫고 들어갈 수 있는'이란 이름이 붙은 이 조형물 역시 LACMA의 상징 중 하나다. 노란 고무호스를 신나게 헤치고 다니며 깔깔대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Penetrable'이란 이름을 붙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술작품이기 앞서 아이들의 놀이터. 물론 작품의 보호를 위해 직원이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게티는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23살 때 석유 기업을 물려받아 38살인가에 은퇴한 후론 남은 여생을 전세계를 돌며 미술품을 수집하며 보냈다. 게티 센터와 게티 빌라는 게티의 놀라운(!) 취미 생활의 흔적이다.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늠하는 것조차 포기하게 만든 것이 이 흰 대리석의 향연이었다. 센터로 올라가는 열차부터 시작해서 엘리베이터, 건물, 바닥 모든 것이 흰 색.
루브르엔 <모나리자>가 있고 게티 센터엔 <아이리스>가 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카메라를 든다. (거의 모든 작품의 촬영이 허용된다.) 고흐의 대표작이기도 하고, 실제 그림의 아름다움이 놀랍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그림에 얽힌 이야기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흐는 불운한 삶을 산 화가다. 스스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는데, 그곳에서 처음 그린 작품이 바로 <아이리스>다. 꽃의 강인한 생명력을 통해 삶에 대한 의지를 다시금 부여잡고 싶었던 고흐.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린 이듬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고흐의 <아이리스>를 보며 생각했다. '자연은 예술에게 엄마같은 존재 아닐까. 캘리포니아의 선명한 하늘과 쨍한 햇살 아래 놓인 이 정원을 보니 '그래, 그렇다니까.' 싶다. 사진으론 담기지 않는 생생함이 아쉽다.
게티 센터는 여러 모로 놀라운 곳이다. 일단 (주차비를 제외한 모든 것이) 공짜다. 심지어 한국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가 탑재된 아이팟도 공짜로 빌려준다. 20개 남짓의 하이라이트 작품만 설명되어 있지만 아이에게 중요한 작품을 쉽게 설명해주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게티 센터는 정말 어린이 친화적인 미술관이다. 스케칭 갤러리는 그 대표적인 사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명화를 앞에 걸어 둔 채 나만의 화폭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이다.얀 스테인 Jan Steen의 <The drawing lesson>에서 모티브를 얻은 공간이라고 한다.
게티센터는 아이들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멋진 물건들을 모아놨다. 게티센터에서 제작한 것도 있고, 뉴욕현대미술관 MOMA 제품도 있다. 인형, 책, 스티커, 장난감, 그림도구 모두 탐났던 곳. 이윤이 아닌 아이를 위한 공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게티 센터는 공짜다.)
아이들이 '몸'으로 미술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패밀리룸 역시 훌륭했다. 종이 가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고무 로프를 연결해 구조물을 만들 수도 있다. 아이가 어리다면 동물 자석을 여기저기 붙이며 노는 공간을 추천.
게티 센터의 장점 중 하나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점. 워낙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많은 터라 아이들이 뛰노는 것이 민폐로 여겨지지 않는다.
여행의 완성은 사진이다. 페북에 올려 좋아요 받자고 찍는 것만은 아니다. 이 순간의 행복을 고이 봉인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꺼내게 하는 게 '사진'이다.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할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더욱 중요하다. 사진을 재료 삼아 어릴 적 함께 한 추억을 조잘조잘 이야기해주는 수다쟁이 엄마가 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LA가 훌륭한 까닭은 망작이 나오긴 어려운 '쨍한 햇살'이다. 다녀본 곳 중 가장 추억을 훌륭하게 기록한 곳은 두 곳이었다. 바다 한 곳과 명소 한 곳을 소개 한다.
내 상상 속 미국의 해변은 이랬다. 일단 금발의 비키니 미녀들이 즐비하고 인구 밀도가 현저하게 낮아 풍경 자체가 여유로울 것 같았다. 총천연색 칵테일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시며 뜨거운 햇살을 즐기는 이들의 해변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 속 산타모니카는 아~~~주 끝없이 길게 펼쳐진 해운대 같았다. 해변엔 작은 놀이공원과 음식점, 노점상이 즐비했다. 인구 밀도는 매우 높았다. 비키니를 입은 미녀는 못 봤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려져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나 '쨍한 햇살'만은 기대 이상이었다. 붐비는 곳을 벗어나면 이 곳의 바다와 햇살, 그리고 '우리'만 렌즈에 담을 수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다.
게티빌라는 게티센터와 마찬가지로 석유재벌 폴 게티가 전세계인을 위해 공유하는 놀라운 공간이다. 게티센터와는 달리 그리스 로마 조각 중심의 전시를 주로 하고 있는데 사실 그보단 아름다운 정원과 건물을 구경하기 위해 오는 이들이 많은 듯 했다. 예약해야만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도 이 곳에서 셔터를 마구 누를 수 있는 여유를 만든다.
아이와 함께 동남아 여행을 다녀온 지인이 우스갯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 돈 들여 여행 데려왔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더라고. "바닥에서 껌 가지고 장난친게 제일 좋았어!" 어차피 기억도 못할 거 왜 데려갔나 싶더라고." 그렇다. 아이는 아마도 눈 앞을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명화와 명소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열심히 그림을 설명해주는 엄마의 표정, 내 손을 잡고 있는 엄마의 체온은 아이의 무의식에 차곡 차곡 쌓여 살아갈 힘이 되지 않을까. 아이의 삶에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엄마들에게 산타모니카 해변에 있는 맛있는 새우요리전문점 <버바검프>를 추천한다.
* <버바검프>는 영화 속에서 포레스트 검프가 친구 버바와 함께 차리기로 했던 그 새우회사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음식점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메시지를 (맛있는 새우 요리와 함께) 곱씹을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전세계인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영화다. 1994년 만들어진 이래 변함없는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바보' 포레스트 검프가 세상을 살아내는 특별한 여정을 담은 까닭이다. 그리고 그의 삶은 엄마, 검프 여사에 뿌리 내리고 있다.
포레스트의 아이큐는 75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세상이 포레스트 검프에게 '바보'란 꼬리표를 붙이게 두지 않았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감싸고 돌지도 않았고, 적절한 보호를 요구하며 세상과 타협하지도 않았다. 아들에게 현실적인,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이야기했고 아들을 위해 세상과 맞섰다.
아이큐가 75인 포레스트 검프를 입학시킬 수 없다는 교장에게 그녀는 말한다.
"대체 '정상'이란 게 뭐죠? 우린 모두가 달라요. 선생님."
그녀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포레스트의 삶이 된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거야. 어떤 걸 가질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란다. 신이 주신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과거는 뒤에 남겨 둬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단다."
'엄마'란 타이틀을 달게 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전전긍긍하는 나를 발견한다. 아이가 더디게 자라는 것만 같아 불안할 때가 많다. 혹여 아프고 다칠까 겁이 난다.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이 세상을 쉽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열쇠가 있다면 억만금이라도 주고 미리 구해주고 싶을 때도 있다. 곧게 살라는 말보다 쉽게 살라는 말이 더 현실적인 것도 같다.
하지만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다. 살며 부딪힐 어떠한 역경도 대신 막아줄 수 없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인생의 기본자세를 보여주는 것- 그 뿐이다. 남보다 잘 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대신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좌절과 원망 대신 희망과 감사로 마주하는 삶을 아이 앞에서 살아 보이는 것.
검프 여사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에게 꽤 괜찮은 인생의 기본 자세를 선보이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버바검프>는 제법 멋진 장소다. 맛있는 새우 요리 한 접시 하며 나와 아이의 삶을 위해 화이팅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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