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 전환 1

연작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우린 잠시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다시 어색한 침묵 속으로 융해됐다. 여자는 여자의 노트북으로 나는 앞자리에 앉은 남자의 뒤통수로 서로의 눈길을 외면했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몇십 분을 흘려보내다,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곳에는 여자가 그토록 좋아한다던 드라마가 한철 여름 매미처럼 우렁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즐겨하는 드라마에 잠시 빠져 보려고 노력했으나, 드라마보다 나는 내 인생의 보잘것없음과 서울이 아니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다며 도피행각을 벌인 나 자신의 비겁함을 비판하다,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갑자기 깨어났을 때, 버스는 남해 시외버스 터미널에 진입하는 중이었고 여자는 노트북을 내 의자 앞 받침대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두곤 내릴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머뭇거리던 나의 의식을 흔들어댔다.


“안 내려요? 터미널에 도착했어요”

“내려야죠. 네.”


나는 선반 위에서 백팩을 느릿느릿 꺼내고 노트북과 케이블을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그리곤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아무런 계획조차 마련된 게 없지만, 미리 일정을 완벽하게 짜 놓은 사람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한편으론 여자의 눈치를 슬슬 살폈지만.


여자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민석씨 잘 있어요. 넷플릭스 잘 봤어요.”라고 말하며 앞문으로 향했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한쪽 어깨에 백팩을 짊어진 채, 여자의 뒤꽁무니를 슬금슬금 따라갔다. 나는 마치 여자를 미행이라도 하는 듯이 뒤쫓아갔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여자는 분명 나에게 '잘 있어요,' 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장에 다른 클리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암호화된 상징 같은 것이 숨어 있고 나는 그것을 반드시 내 힘으로 번역해 내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쭈뼛하게 그 여자 뒤에 서서 “저기요? 연희씨”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날렵한 청새치처럼 “제가 신세도 졌으니 차라도 한 잔 살까요?” 라고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마치 떡밥이라도 던지듯이… 하지만 그 말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인사치레로 건네는 그런 흔한 말이 아니었다.


나는 약간 놀라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그랬더니 연희는 “뭘 그렇게 놀래요? 여자하고 차 한 잔 마시는 게 100만 년 만에 경험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도 되는 거예요? 뭔 초등학교 여자아이한테 처음으로 데이트 신청받는 아이처럼 감격스럽게 쳐다봐요? 사람 무안스럽게” 그러더니 여자는 내 팔을 툭 치고 재킷 한쪽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끌고 나갔다.


우리는 터미널을 통과해서 카페를 찾으려고 했지만 바깥에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횅한 도로뿐이었다. 커피를 마실 만한 곳이라고는 터미널 내에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뿐이었다. 연희는 당당하게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딸기 치즈 아이스크림 작은 컵을 하나 주문하곤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래 카드를 꺼내라는 얘기다. 이런 눈치는 내가 원래 빠르다. 아니, 아까는 신세 졌다고 차 한 잔 산다더니 이건 또 뭔가. 그러자 연희가 마치 내 눈치를 읽었다는 듯이, “내가 차 한 잔 산다고 했지 아이스크림 산다고는 말 안 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주머니에서 카드 지갑을 꺼내고 거의 한도에 다다를 거라고 짐작되는 카드 한 장을 건넸다. 다행히 결제 승인이 나고 성인 두 명이 와서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를 주문하는 것에 대해서 마치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 같은 아르바이트생의 눈초리를 피하여 횅댕그렁한 카페 정가운데 좌석을 잡았다.


“우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연희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우연이라면 이 거대한 천체라는 세계와 그 천체가 속한 거 거대하고 육중한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의 수학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거의 0에 가까운 생명을 얻은 인간의 우연을 얘기하는 건가요?” 내가 심오한 철학자처럼 말했다.


“그렇게 매번 과학적으로 수치적으로 뭔가 아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아는 게 거의 없는 배부른 돼지처럼 생긴 철학자처럼 말해요? 뭘 자꾸 공대생처럼 계산만 하려고 들어요? 특히 예쁜 여자와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그래요? 여자와 별로 사귀어 본 적 없죠? 모태 솔로죠? 민석씨.”


나는 여자의 당돌한 질문에 대해 다소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런 사소한 한 마디에 감정을 발산하는 행위가 나의 품위와 격조를 떨어뜨리는 짓이라 생각이 들어 겨우겨우 화를 달랬다. 감정은 감당하기도 힘들고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르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뭘 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답변하려 들어요. 민석씨는 질문에 대해 늘 잘 들어맞는 답변을 찾으려는 사람 같아요. 지금 사각형 큐브를 하나 들고 그것에 딱 들어맞는 큐브를 찾아 그것에 정확하게 끼우려고 노력하는 사람 같아요. 꼭 정확하게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곳에 끼워 넣어야 성미에 맞아요? 조금 비어 있으면 어때요. 조금 크면 어떠냐고요. 다른 큐브를 그 빈자리에 채워 넣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왜 자꾸 똑같이 생긴 녀석만 찾으려고 해요? 민석씨는 그렇게 경직된 사람이에요?”


“음.. 아.. 흐음…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딱 들어맞는 큐브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큐브를 들고도 과연 거기에 놓아도 되는지 계산이 제대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심각병에 걸렸네요 민석씨.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요. 우연이라는 게 별거인가요? 터미널에서 민석씨가 저를 따라서 티켓을 발권한 것처럼, 또 저를 따라서 여기 남해까지 오게 된 것처럼 또 이렇게 우리가 오손도손 앉아서 아이스크림 한 그릇을 나눠먹게 된 것처럼, 그저 모두가 우연의 결과라고요. 작은 사건이 큰 사건을 낳게 될 순간을 우린 함께 겪고 있는 거라고요. 무슨 우주고 생명이고 유전자를 찾아요. 그냥 남녀가 만나서 커피 마시는 것뿐인데요”


“우리가 마시는 건 커피가 아닌데요… 그리고 전 유전자를 언급한 적이 없어요.”라고 내가 말하자, 연희는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남녀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하면 조용한 카페와 달콤한 커피가 떠오르는 건 거의 기본이잖아요. 우린 그냥 남녀가 어느 순간에 만나서 그 시간을 함께 헤쳐나가는 경험을 공유 중인 것뿐이라고요. 앞이 보이지 않는 아마존 숲을 무딘 칼로 개척하며 길을 만들어가는 가는 게 아니라고요.”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제17화 : 방황 2

제18화 : 떠남 1

제19화 : 떠남 2

제20화 : 만남 1

재21화 : 만남 2

제22화 : 만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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