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 전환 2

연작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그렇군요. 우린 아마존 밀림 한가운데서 말하자면 목적지를 잃은 셈이로군요.”


“민석씨 얘기가 듣고 싶어요. 민석씨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민석씨 안에서 시작된 그런 고유의 이야기 말이에요. 민석씨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연희가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왜 이곳 먼 남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반도의 남쪽까지 다다르게 된 걸까. 여기 아이스크림 가게에 앉아 있는 나와, 그동안 내 삶 속에 존재했던 모든 나는 전혀 별개의 나일까. 내 영혼이 어딘가를 통과해왔으나 그것들은 모두 붕괴되고 현재는 그저 가죽 같은 것들만 남은 상태에 불과할까. 어쩌면 나는 방향을 잃거나 제대로 된 방향을 찾아가야 할 감각마저 모두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이전에 내가 알던 나로, 내가 원하던 삶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저는 말이죠. 흐음. 뭐라고 저를 표현해야 할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저는 존재감을, 인정을, 감각마저 잃은 사람 같아요. 말하자면 갈 곳을 잃은, 그래서 늘 목이 마른, 그리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완전히 망각해버린 그런 총체적인 무의 상태라고 봐야겠어요”


“말이 좀 어렵네요. 하지만 잃어버리는 것은 민석씨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아요. 인간은 이미 많은 걸 어딘가에 놓아두고 떠나는 편이고, 그 자리도 좀체 찾아가지 못하니까요. 그러니까 이 문제는 민석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전인류적으로 고통받는 공통분모에 해당되는 문제라는 거죠”


“민석씨, 저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연희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매로 물었다. “글쎄요. 버스 안에서 말씀하기로는 잡지사에서 글을 쓴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 정보로 종합해 봤을 때...” “글쎄요. 기자라는 직업,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게 제 정체성을 설명해줄지는 잘 모르겠어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로서 저를 설명할 때, 쉽게 저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산다고 얘기하는 편이죠. 이 명함에 각인된 몇 글자들처럼요.”


연희는 지갑에서 하얀 명함을 꺼내더니 곧바로 나에게 건넸다. “김연희”라는 이름이 정가운데 선명하게 볼드체로 새겨져 있었지만, 그 정보 외에는 연희라는 사람이 어떤 개성을 지니고 있는지 나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명함 하나만으로는 연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할 뿐이다. 마치 옛 선인들이 즐긴 여백의 운치 같은 건 느껴졌지만…


“이상하네요. 어떻게 명함에 이름만 찍혀있는 거죠? 이렇게는 제가 연희씨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겠는데요?” “왜요? 저에게 연락하고 싶어 졌어요?” 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연희에게 아무런 호기심조차 없었다. 그저 신기했고 요란스러우면서도 말랑말랑한 그녀의 태도에 잠시 물들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래, 그게 전부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어도, 내 색채를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과 함께 묻어갈 수 있다는 것, 나는 그 사실에 잠시 기분이 고양된 것이다.


“저는 잡지사에서 기자로서 일하고 있어요. 기자는 물론 글을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이죠. 다만 내가 아닌 타인, 즉 회사라는, 어떤 구체성을 띠지는 않지만 독자라는 대상을 위해 막연한 글을 쓰죠. 그렇다고 저를 대표하는 본질이 회사라는 건 아니에요.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업이라는 어떤 소명 의식이 저를 대표하지는 못하죠.”


“뭐랄까, 저는 저 자신을 대표하는 수단을 이렇게 가정해봐요. 말하자면 현실의 세계는 무작위성이라는 법칙이 삶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상 정해진 게 하나도 없다는 거죠. 어딘가에 도달할 가능성은 어쩌면 0%일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계획된 게 없으니까, 어쩌면 0은 100이 될 수도 있어요. 제가 설정하고 행동하기 나름이라는 거죠. 저는 그래서 그런 무작위성과 변칙성, 불규칙적인 걸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흐름에 따라가며 정처 없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또한 흐름에 편승해서 같이 무의미하게 굴러가는 게 아니라, 옆길로 새고 또 옆길에서 다른 옆길로 연달아 새는 걸 반긴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불규칙의 변주죠. 다만, 그 옆길은 제가 주도합니다. 변칙성이라는 변주에 묘한 규칙성을 함유시키는 거죠.”


“아, 명함, 왜 이름만 새겨져 있냐고 물으셨죠? 정해진 틀은 식상하고 재미없잖아요. 그런 건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요. 정해진 틀 같은 것,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러니까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자갈돌 같이 생겨먹은 명함은 그냥 재미없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매뉴얼 같은 거예요. 민석씨 개발자라고 했죠? 매뉴얼 자주 다루시겠네요. 매뉴얼 볼 때, 막 호기심 같은 게 생기던가요? 그거 작성할 때 막 창의력이 발동되나요? 읽을 때는, 어떤 순수한 이미지가 마음에 착상되어서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독하고 그래요? 민석씨 그런 사람이에요?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하고 그것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에요?”라고 연희가 약간 따져 묻는 듯했다. “저 매뉴얼이라면 딱 질색인 인간입니다. 매뉴얼 따위는 만들지도 않고 읽지도 않습니다. 저는 개발자거든요. 오직 코딩으로 승부합니다.”


나는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연희씨의 명함을 받았다고 치죠. 지금 받았으니까 질문할 자격은 있죠? 만약 연락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요? 직접 물어보고 요기 흰 여백 어딘가 예쁘게 적기라도 해야 하나요? 그럼 높은 점수를 받는 거예요?” “맞아요. 그거죠. 지금 저에게 연락처 물어보셨죠? 그럼 그거 머릿속에 한 번 기입하고 다시 직접 손으로 기록하는 겁니다. 형식적으로 인쇄된 연락처가 가진 의미보다는 덜 구조적이고 다소 수고스럽긴 하지만, 직접 손으로 기록하는 게 더 기억에 오래 남지 않겠어요? 저 김연희라는 사람이 더 오래 민석씨 머릿속에 각인될 거 아니냐고요. 저는 그걸 노린 거예요. 장면의 특성을 이용한 거라고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자 연락처를 불러 주세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사실 그녀의 의견이 말장난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설득되는 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실 명함이란 것은 사무적으로 주고받고 서랍 한구석에 방치되었다가 쓰레기 통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그녀의 방식처럼 진정으로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연락처는 이메일이든 물어보겠지. 기회를 만약 놓친다면 다시 연락할 방법은 없다. 나중에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저 민석씨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어요. 민석씨처럼 투덜거리는 사람의 속마음이 전 늘 궁금했거든요. 특히 제가 업무적으로 자주 부딪히는 사람들은 죄다 문과생 출신들이라 이과생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요. 그런 제가 속하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연희가 말했다.


“게다가 말이죠. 지금 이 휴가 시즌도 아닌 시기에 남자 혼자서 남해로 여행을 선택했다? 분명 말 못 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평범하지 않은 케이스잖아요. 그 이유를 1분 이내로 요약해서 한 번 말해봐요. 민석씨 저 바쁜 사람이에요.”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제17화 : 방황 2

제18화 : 떠남 1

제19화 : 떠남 2

제20화 : 만남 1

재21화 : 만남 2

제22화 : 만남 3

제23화 : 전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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