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 숙박 1

헉, 1분 이내 요약이라. 내가 인공지능 회사에서 새로 출시된 최신 번역기도 아닌데, 1분 이내로 그간 벌어진 일을 모두 요약하라니, 그게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무성 영화의 친절한 성우처럼 차근차근 하지만 최대한 핵심만 간추려서, 그간 내가 직장에서 억울하게 당한 사건, 그리고 Y대학교에서부터 김대리의 집을 침범하기까지의 과정과 성수대교를 야밤에 건너가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한 일, 그리고 철저하게 파괴된 내 집을 거쳐서 여기 남해까지 겨우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니 아쉽게도 당초 계획한 1분 이내 주파엔 실패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5분 내 끝낸 것에 가치를 두고 싶었다.


연희는 굉장히 집중한 나머지, 재미있는 이야기 연못에 빠져버린 요정처럼 넋을 잃고 있다가, 내가 손뼉을 짝 하고 치자, 깜짝 놀라며 현실로 겨우 돌아왔다.


“뭔 재미없는 이야기에 그렇게 빠져들어요?”라고 내가 의뭉스럽다는 반응을 보이자, 연희는 두 손으로 턱을 감싸고 아주 슬픈 동화를 들은 공주처럼, 당장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듯한 동그란 눈으로 내 눈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곤 “그렇군요. 그래서 그 집에서 도망치듯 튀어나와 여기까지 오게 된 거군요. 근데 갈 곳은 정해놨어요? 결국 오늘 여행도 즉흥적으로 선택한 거잖아요.”라고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쓰다듬을 것 같은 자세로 말했다.


“솔직히 정해놓은 건 없어요. 키오스크 앞에서 충동적으로 남해를 선택하긴 했지만, 일단 거기까지 가보자, 가보고 나서 그 후의 일은 나중에 선택하자고 생각했죠. 어쩌면 바닷가 백사장 앞에 앉아서 모닥불이나 피워놓고 바다멍쯤에 시간을 소비하다 아무데서나 누워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죠.”라고 말하자 연희는 “그러다 입 돌아가면 어쩌려고 해요? 아무리 봄이 지나서 이제 5월을 넘어선다고 하지만 밤에 바닷가 옆이 얼마나 기온이 떨어지는지 몰라요? 이분 겁 없네 아주 겁이란 걸 상실한 남자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연희는 아주 큰 동작으로 주변에 돌아다니는 공기를 모두 끌어모은 다음, 그것들을 한꺼번에 배출이라도 하는 듯이 커다랗고 길게, 아주 오랫동안 숨을 참았다가 내쉬는 노련한 수영선수처럼 숨을 아주 기다랗게 내뿜었다. “휴…”


“근데 제안서는 왜 안 쓴 거예요? 개발자는 글 쓰면 안 되는 거예요? 뭔 사람이 그리 싸움을 할 줄 몰라요?” 연희가 베테랑 형사처럼 취조하듯 말했다. “아뇨 제가 원래 김대리와 싸워보려고 플라자 호텔에 찾아가서 BMW 컨버터블 앞에 드러눕기까지 했다니까요? 그리고 녀석의 안방에까지 침투에 성공한 사람인데…”라고 나의 반항 연대기를 순서대로 나열했다. “아니 그런 물리적 싸움 말고요,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오면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죠. 왜 도망쳐요? 도망치면 문제가 해결돼요? 김대리가 사과라도 걸어와요? 제안서 쓰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걸 안 했어요.” 연희는 답답한 마음이라서 그런 건지 마치 속으로 “야이 한심한 인간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가 현직 기자 아닙니까.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게 제안서, 보고서, 기획 기사 이런 것들이에요. 민석씨 개발자라고 했죠? 우리 회사 개발자들 보면 그렇게 존경스럽더구먼, 사실 코딩에 비하면 제안서 작업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아까 언급한 기계적인 매뉴얼 작성과 다를 바가 없다고요. 옆집 사는 5세 훈이도 하는…”


“글쓰기에 기-승-전-결, 서론-본론-결론 이런 구조가 있다는 건 잘 알죠? 그다음에 제안서에는 주제가 있죠? 주제와 딸린 소주제가 있고요. 그런 것들을 정리해놓고 그다음엔 목차를 작성하겠죠. 목차는 이미 제안요청서에 나와있어요. 사업 배경부터 시작해서 기획의도, 목적, 내용, 사업성, 뭐 이런 내용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죠.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고요.”


“Top-Down, 폭포수 구조. 개발자니까 이런 용어에 익숙하시죠? 제가 어떻게 이런 걸 아냐고요? 제가 IT 잡지가 기자인데 이 정도 용어도 모르겠어요? 사람 무시하지 말 것!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어디까지 우리 이야기했죠? 아 맞다 폭포수 이야기했죠? 폭포수 이야기하는데 왜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또 옆길로 새 버렸네요. 미안, 그냥 그 장면이 떠올라서요. 하여튼 제가 엉뚱한 이야기를 자꾸 던지고 있는데요. 제가 말하면서 정리하는 타입이라 이해 요망. 그러니까 폭포수 모델의 핵심은 먼저 핵심 주제를 하나 정해놓고 점차 세부적으로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개념이잖아요. 제안서 작성도 똑같아요. 처음에는 추상적이지만 어쨌든 커다란 주제를 정해놓으면 사람의 머리란 것이 자동적으로 세분화, 정리 작업을 하게 되어있다 라는 거예요. 그냥 정리하며 쓰기만 하는 건데. 민석씨는 주제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GG를 친 셈이네요”


“아니 그런 건 어떻게든 정하겠죠. 그런데 쓰는 건 어떻게 해요. 저는 코드만 작성해봤지 글쓰기는 영... 전 집에서 다림질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사람인데요”라고 내가 말했다. “어렵죠. 알아요. 제안서 쓰기, 글쓰기가 얼마나 힘들어요. 그러니까요 민석씨 정말 힘드셨을 것 같아요. 이럴 줄 알았죠. 이 바보 같은 사람아. 어렵다고 해본 적 없다고 손 들었단 말이에요? 그냥 냅다 수건 던져놓고 상대방이 네가 졌다,라고 손 내려주길 기다렸다는 거잖아요.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서점에 가서 혹시 잡지 같은 거 뒤적거려봤어요. 이달의 기획기사, 특집 이런 거 들춰봤냐고요. 기자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전문가들의 글쓰기를 공부해봤어요? 안된다는 생각만 하니까 머리도 이미 결정해버린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 절대 글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바보다, 이렇게 정의해버린 겁니다. 그런 사람을 민석씨 같으면 신이 도와줄 것 같아요? 아효 답답해 정말.”


그녀는 폭주하는 열차처럼 끊임없이 발언이라는 것을 토해냈다. 나는 연희의 이야기를 듣다, 도저히 소화낼 수 없는 무지막지한 정보의 홍수를 손으로 막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말은 연희씨처럼 쉽죠 연희씨는 그 일을 오랫동안 해왔으니 쉬운 거예요. 제가 노트북 한 대 주고 파이썬으로 자동화 프로그램 만들라고 하면 당장 짤 수 있겠어요?라고 과제를 냅다 던져주는 것과 뭐가 달라요.”라고 내가 나름 멋진 비유를 해낸 것 같은 우쭐함에 사로잡혀 말했다.


연희는 한심한 눈초리로 논리 싸움에서 승리해서 참 좋겠네, 라는 곱지 못한 시선으로 눈을 흘겼다. 그러더니 속에서 불타오르는 울화를 다스리기 위해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러더니 잠시 후, 폭탄선언을 했다.


“우리 집으로 일단 갑시다. 저 남해 독일마을에서 혼자 살아요. 외로운 여우랄까요 일단 남자를 재워놓고 간을 몰래 빼먹는 호호호”라고 침착하지만 비교적 하이톤의 말투로 정적을 무너뜨렸다. “헉, 외로운 여우라니 그럼 저는 늑대여야 하나요?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쌩판 모르는 남자를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끌어들이겠다는 얘기잖아요? 제가 위험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래요?”라고 내가 말했다.


연희는 나를 더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저도 그 정도 견적은 낼 줄 알아요. 저 바보 아니라고요. 자 빨리 갑시다. 가서 민석씨가 겪은 사건사고를 회고해보고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해 봅시다. 하, 오늘 오지랖 좀 오래간만에 부려야겠네.”라고 자기 사정을 챙기는 데 주력하는 것보다, 남의 사정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인류적인 태도로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제17화 : 방황 2 제18화 : 떠남 1

제19화 : 떠남 2 제20화 : 만남 1

재21화 : 만남 2 제22화 : 만남 3

제23화 : 전환 1 제24화 : 전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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