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 숙박 2

연작소설

남해 던전, 아니 남해 시외 터미널에서 문을 열고 나오니 연희가 또 어깨를 툭툭 치며 시비를 걸었다. “뭐해요? 택시 안 부르고? 빨리 불러요.”, “택시요? 저기 택시비는 누가…?” 내가 말끝을 흐리자, “아니 우리 집에서 공짜로 재워준다는 데 지금 택시비가 문제예요? 남자가 말이야, 쩨쩨하게 말이야. 빨리 불러요. 여기 택시 잡기 쉽지 않아요.”


나는 소심하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택시를 불렀다. 나는 맵 서비스에서 제안한 예상 금액을 확인하곤 크게 놀랐다. “이거 20분 걸리는데 택시비가 뭔 2만 5천 원씩이나 나와요?”라고 따져 묻자, 연희는 연속으로 어이를 상실했다는 표정으로 그러려면 당신은 걸어가고 자신은 버스를 타겠다고 어깃장을 부리려 하는 것 같아서 나는 방금 했던 말을 금방 취소해버렸다.


다행히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도 택시는 쉽게 잡히나 보다. 5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택시 한 대가 비교적 침착하게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연희는 눈으로 내가 먼저 탑승하라고 눈치를 준다. 음, 이런 건 레이디 퍼스트가 국룰 아닌가.


세상에 25분이면 올 거리를… 내 피 같은 돈 2만 5천 원을 카드로 결제하고 말았다. 연희는 우쭐한 표정으로 택시에서 내린 후, 다시 자신만만한 미소로 마을 입구에 서서 언덕배기를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더니 “올라가요”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하더니 아침에 조깅을 하는 사람처럼 날렵하게 몸을 옮겼다.


영락없이 연희의 집일 것 같은 아담한 단독주택 앞에서 연희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곤 뭔가 잠시 궁리라도 하는 듯했다. 여자만 사는 집에 남자를 들인다는 게 보통 문제는 아닐 터, 그것도 생판 모르는 남자라니. 나는 이상한 기대감에 심취한 바람에,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말이 언제 나올까 기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영혼을 어딘가에 팔아버린 기분도 들었다. 연희가 문을 따자마자, 나는 그녀를 뒤따라 안쪽으로 진입하려 했는데, 그 순간 “지금 뭐 하는 거예요?”라고 연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멀뚱 그녀의 분위기를 살폈다. “민석씨가 머물 집은 여기가 아니에요. 그러더니 연희는 또다시 그 가늘고 기다랗고 흰 손가락 끝으로 다른 집을 가리켰다. 그 집은 흰 벽돌로 담을 두르고 지붕은 피라미드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벽은 비교적 최근에 하얀 페인트로 도배를 했으나 관리를 제대로 안 한 건지,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 있고 색깔은 회색으로 바래져 있었다.


“설마 민석씨와 제가 한 집에서 지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여기서 라면 얻어먹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요. 가만히 있어 보자, 예약 시스템 확인 좀 해볼게요. 마침 저 A동은 오늘 예약이 없네요. 성수기도 아니니까 제가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해 드릴 테니.(아까 공짜라더니...) 계시는 동안 편하게 쓰시다 가시면 됩니다. 결제는 선불로 할까요? 후불로 할까요? 카드 주세요.”


나는 뭔가 이상한 사기단에 걸려든 기분이 들었다. 역시 내 주변엔 믿을 만한 구석을 가진 인간이 하나도 없다. 어이없었지만, 여기서 딱히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 나는 거의 울면서 한도가 얼마 남지 않은 카드를 연희에게 내밀었다. 그랬더니 연희가 쾌활하게 웃으며 “호호, 아니 제가 진담으로 그러는 줄 아셨어요? 돈을 받긴 왜 받아요. 저 그렇게 장삿속으로 사는 인간 아니에요. 장난 좀 쳐봤는데, 민석씨 진짜 순진하시다. 카드 빨리 넣어 두세요. 마음 변하기 전에요 호호. 싫증 날 때까지 계셔도 되니까요. 실컷 지내셔도 됩니다. 그리고 짐 정리하고 좀 씻는 게 어때요? 아까 옆에 앉아 있을 때, 뭔 홀아비 같은 냄새가 올라와 가지고…”


나는 흠흠 하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후 윗도리를 들추곤 냄새를 맡아봤다. “또 속네 또 속았어, 냄새가 나긴 무슨 냄새가 나요. 이 분 진짜 안 되겠네. 아니 남자가 무슨 말 한마디에 그렇게 허망하게 말려들어요. 이분 멘털이 거의 초절정 크리스털 급이네. 아니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30년 가까운 인생을 혼자 살아온 거예요?”


“죄송합니다.”라고 나는 부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하곤 그녀가 가리키는 오른편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뒤에서 연희가 뭐라고 뭐라고 몇 마디 더 추가했지만, 피곤했는지 거의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연희가 뒤늦게 달려오더니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포스트잇에 비밀번호를 적어줬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며.


나는 연희가 열어준 현관문을 반 정도 열고 안쪽을 살펴봤다. 인테리어는 비교적 무난했다. 2인용 소파와 작은 티브이, 그리고 두 칸짜리 싱크대, 깔끔한 화장실과 욕조, 볕이 잘 드는 테라스, 그것이 그 오래된 흰 집의 소박한 장점이었다. 나는 백팩을 소파 위에 대충 던져놓고 씻는 것은 일단 단념하고 안방 침대 위에 몸을 던저버렸다. 그리고 혹시 이 집도 김대리가 찾아와 박살 내버리는 것은 아닌지 짐짓 걱정하다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잠이 든 나는 또다시 3일을 내리 자고 말았다. 영원히 잠드는 마법에 걸린 숲 속의 공주처럼…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제17화 : 방황 2 제18화 : 떠남 1

제19화 : 떠남 2 제20화 : 만남 1

재21화 : 만남 2 제22화 : 만남 3

제23화 : 전환 1 제24화 : 전환 2

제25화 : 숙박 1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25화 : 숙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