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 숙박 3

연작소설

눈을 떴을 때, 연희가 침대 맞은편에 앉아서 측은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볼 거라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침대 위에 쓰러진 모양, 마치 붕어빵 틀에서 막 구워낸 그것처럼 그대로 누워있다 일어났을 뿐, 기대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간 것일까. 시간을 겨우 인지했을 때, 지난번 회사에서 퇴사한 이후와 마찬가지로 3일이 경과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난 혹시 지독한 잠병에 걸린 건 아닐까. 이러다 3일이 30일이 되고 30일이 다시 300일이 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은 가벼웠다. 양쪽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 이방저방 가볍게 날아다닐 기분이었달까. 침대에서 사뿐하게 일어나 꽃을 찾아 나서는 나비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달라진 건 3일 전과 비교해도 딱히 없었다. 이곳은 연희가 최초로 안내해준 펜션의 특성을 보존하고 있다. 집을 구축하고 있는 구조적인 질서도 외관의 형식도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다. 다행히도 김대리의 영향권에서는 거의 벗어난 듯했지만.


이런 상상을 해봤다. 나는 세기말, 좀비들이 득세하는 도시의 폐허 속에 홀로 버려졌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떠 보니, 나 혼자 병원에 누워있던 것이다, 그래, 미드 '워킹 데드' 각본 그대로다. 난 이 세상에 살아남은 고독한 생존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독한 갈증이 몰려왔다. 공중엔 외로움의 불순물만 둥둥 떠다니는데, 심지어 그 분자들도 나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느낌.


그런 지독한 외로움에 집착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침대 옆, 벽 모서리에 얌전히 놓인 야구 방망이를 발견했다. 저것은 왜 저기에 놓여 있는 걸까. 저 방망이는 꽤 하루키적으로 생겼다. 하루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그 방망이가 아닌가. 무심결에 방망이를 들고 손잡이 위에 칭칭 감아놓은 검은색 테이프 부근을 꽉 잡았다. 누구든지 걸려봐라, 이제는 당하고 있지는 않겠다, 이렇게 분노 게이지를 최대의 상태로 끌어올렸다.


“저예요. 연희예요.” 나는 그제야 방망이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짧은 탄식을 풀어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대충 보기 좋게 정리해놓고 현관문을 반쯤 열었다. 연희를 집안으로 들이는 건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무사하다는 소식만 전하면 된다. “저 괜찮아요. 잠을 오래 잤나 보네요. 제 요즘 특기가 오래 자는 건데요. 3일 동안 자는 게 어느새 리추얼이 되고 말았네요. 좀 씻고 나서 말씀드려도 될까요?”라고 말하곤 문이 만든 틈을 없앴다.


바깥쪽에서 “알았어요”라고 다소 실망스러운 목소리가 여운처럼 들려왔다.


연희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욕실로 몸을 이동시켰다. 3일 동안 내리 잠만 잤으므로 내 몸에 굳어버린 몹쓸 패배의식 따위들부터 깨끗하게 씻겨야 할 것 같았다. 내 피부에선 녹슨 기름 찌꺼기 같은 것들이 끝없이 바스러져서 하수구로 쓸려 들어갔다. 내가 마치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한 번의 샤워로 나를 차츰 이전의 정상적인 나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샤워 따위는 천만번이라도 반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건 어리석은 망상에 불과했다.


샤워를 끝내고 대충 집안을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소파에 앉으니 연희가 어떻게 알고 타이밍에 딱 맞게 찾아왔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똑똑 문을 두드리고 내가 반응하기를 기다린 후, 자신감 있게 문을 박차고 안쪽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배 안고파요?” 연희는 이렇게 말하더니 등 뒤에 감춰둔 커다란 바구니를 마치 깜짝 생일 파티처럼 공개했다. 그 안에는 복숭아, 자두, 사과, 옥수수, 감자 이런 류의 작물들이 가득 놓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내 허기를 달래줄만한 음식이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실망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어서 “나중에 챙겨 먹을게요”라고 연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지금 원래는 죽을 드셔야 정상이죠 하지만 제가 민석씨 여자 친구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준비하는 건 좀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그냥 제철 과일과 텃밭에서 열매를 조금 챙겨 왔을 뿐이에요. 일단 찐 감자부터 조금씩 드셔 보는 게 좋겠어요. 탈 나면 또 번거로워지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3일 동안 잠만 잤으므로 사실 가마솥을 누룽지처럼 씹어먹을 정도로 배고픈 게 정상이었으나, 기묘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3일 동안 몸만 잠을 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 몸을 구성하는 모든 기관들도 일순간에 정지되었다가 정신이 깨어났을 때, 동시에 작동을 시작한 것이 아닐까 추측될 정도였다.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서… 여기 두시면 제가 나중에 챙겨 먹을게요”라고 말했다. 연희는 정색하며 뭔가 할 말을 가슴에 잔뜩 품은 사람처럼 토해내려 했다가 이내 포기하는 눈치였다. “알았어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저한테 연락하려면 이 번호를 이용해 주세요. 집으로 불쑥 찾아오지는 마시고요.”라고 하며 쪽지를 한 장 건넸다. 나는 알았다고 말하며 연희가 건넨 쪽지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연희는 눈인사를 가볍게 전하고 들어온 동작과 반대로 문을 열고 돌아갔다.


나는 그 이후 며칠을 연희의 집에서 묵으면서도 연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의도적인 행위였다. 연락하는 것과 연락하지 않는 것 모두 내 선택이다. 다만 어쩌면 연인으로 발전하게 될지도 모를 그런 긴장된 감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어쩌면 나는 연희와 힘 싸움을, 주도권 싸움이란 걸 모색하려고 시도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연희의 집에서 아침 6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침대를 정리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오전을 보낸 다음, 점심으로 고구마 한 개와 복숭아 한 개를 먹고 다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연희는 귀신 같이 내 집으로 찾아와 고구마와 감자를 같이 먹었고 때로는 옥수수도 나눠 먹었다. 마지막으로 어스름한 저녁이 찾아오면 우린 노트북으로 좀비나 하수구에 사는 끔찍한 괴물이 나오는 넷플릭스 영화를 같이 보며 비명을 질러댔고, 10시가 되면 나는 잠을 자야 했으므로 아쉬워 하는 그녀를 억지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녀가 돌아가면 나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고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3일 동안, 어쩌면 거의 한 달을 그렇게 살아가며 거의 비슷한 패턴을 매일 반복했지만 지루함 따위는 없었다. 나는 그 패턴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버린 것이다.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제17화 : 방황 2 제18화 : 떠남 1

제19화 : 떠남 2 제20화 : 만남 1

재21화 : 만남 2 제22화 : 만남 3

제23화 : 전환 1 제24화 : 전환 2

제25화 : 숙박 1 제26화 : 숙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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