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그러다 정확히 4일째 되던 아침, 어떤 불길한 기운이 평화로운 일상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반복하던 습관에서 돌연 한 발짝 물러서려 한 것이다. 대체, 나는 왜 멀쩡한(물론 어떤 기준으로는 멀쩡하지 못하다.) 내 집을 두고 남의 집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건지, 내가 선택해 놓고도 그 결정을 납득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이불부터 개켜가며 시작된 일련의 행동들이 어쩌면 내가 주도한 게 아니라는 생각, 나는 누군가의 어떤 고의적인 횡포에 이끌려다닌 게 아닐까, 라는 이상한 판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내 몸은 그물망처럼 생긴 세포들로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다. 세포들은 현 시각에도 소멸되고 있지만 사라진 숫자만큼의 또 다른 세포들이 태어난다. 절묘한 사피엔스적 균형이다. 어느 한쪽으로 운명이 급격히 기울어진다면 지금까지 서로에게 의지하던 세포들은 힘없이 주저앉고 말 것이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일상도 사실 자세히 관찰해보면 균열 투성이일 뿐이다. 내 세포들엔 균열이 암세포처럼 자라나고 있는 건 아닐까.
‘짐을 챙기자. 그리고 이 집에서 나가자. 내가 머물 곳은 여기가 아니다. 나도 모르게 내 일상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한 의자에만 진득하게 앉아서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는 인간이 아니다. 아무리 낯선 공간이라 할지라도 3일만 지나면 지쳐버린다.’ 이 집 정중앙에 서서 원주율의 파이처럼 원을 그리며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역시 개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상상력이 배제된 공간이다.
백팩을 어깨에 짊어지려다가 냉장고에 든 몇 가지 음식을 가방에 찔러 넣었다. 그리곤 현관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철컥, 뭔가에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고리가 꼼짝하지 않았다. 손목에 스냅을 주고 한 번 더 돌려봤다. 역시 철컥 뭔가에 단단히 붙잡혀 있다. 뭔가 잘못된 흐름으로 기류가 흘러간다. 이것은 내 예측 프로그램에 입력되지 못한 예외적인 변수다.
문고리를 강하게 좌우로 흔들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1밀리미터의 미동조차 없다. 현관을 발로 걷어차 봤지만 발가락만 아플 뿐이다. 한 번 걷어차면 발등에 예리한 송곳이 찍힌 거인의 묵직한 숨소리 같은 것만 반사되어올 뿐이다.
현관을 포기하면 테라스로 나가면 된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적어도 서너 가지는 된다. 하지만 테라스 앞에서도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도 잠겼다. 커튼을 젖히니 단단한 방탄유리가 바깥세상을 태연하게 비춰줄 뿐이다. 주먹으로 쳐봤자 둔탁한 소리만 고요에 묻혀 되돌아왔다. 이쯤 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마련이다.
안방 침대의 작은 창, 지금 관찰해보니 지나칠 정도로 크기가 작다. 사람 손 뼘으로 두 개정도는 되려나. 저 정도의 너비라면 내 몸을 앨리스처럼 줄이지 않는다면 절대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안방에서 거실까지 그리고 다시 한번 현관 출입구까지 가능한 방법을 모두 점검해봤지만 현재로선 모든 게 불가능하다.
패닉룸이다. 여긴 완벽하게 외부로부터 격리된 세기말의 좀비로부터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한 피난처 같은 곳이지만, 현실에는 영화에 나오는 못생긴 좀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 존재한다. 좀비보다 때로는 더 끔찍해지고 잔혹해지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만든 패닉룸.
숨을 죽인 채, 나는 소파 앞, 그러니까 이 집의 중심부인 거실 바닥에 잠시 앉았다. 일단 침착해야 한다. 흥분하면 과거에 벌인 실수들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신을 가다듬고 침묵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
그때 뭔가 거대한 생물이 막 낮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육중한 진동이 위쪽에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철제로 장식된 거대한 철제 방화셔터가 모든 사물을 억지로 지우려는 듯한 포효 그 자체였다. 셔터는 어느새 천정에서 시작되더니 주변부를 하나씩 잠재우기 시작했다. 먼저 현관이 있는 벽을 에워싸고 아래쪽으로 침착하게 이동하며 출입문 손잡이를 감쌌으며 이동을 멈추지 않고 바닥 쪽으로 향하더니 기어코 신발장 밑까지 집어삼켜버렸다. 회색 빛깔의 철벽이 한쪽 면을 완전하게 잠식한 것이다.
그 이후 다시 왼쪽 벽에서 셔터가 내려가 테라스를 삼켰고 정면 티브이 뒤쪽의 벽을 삼켰으며 순차적으로 안방의 모든 면, 주방을 차지하는 각양각색의 면, 그리고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이 집에 존재하는 모든 벽을 셔터가 함락시켜버렸다. 질서 정연한 움직임이었고 냉정한 차단이었다. 결국 이 집에 존재하는 모든 면이 셔터로 장식된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셔터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모든 공간을 무력화시켰다.
그때 갑자기 조르바의 문장이 생각났다. 가방에서 책을 꺼낸 후, 급하게 문장을 찾았다. 페이지를 수차례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넘기다, 겨우 그 문장을 찾아냈다.
“인간이라는 불운한 존재는 작고 초라한 자신의 삶 둘레에 난공불락이라고 믿는 방벽을 쌓아 올린다. (…) 지금, 이 거대한 확신이 내 존재의 장벽을 뚫고 들어와 내 영혼을 덮치려 한 것이다.”
나는 이 평범하게 생겼지만 괴물 같은 모습을 감춘 공간에 완전히 갇혔다. 트랩의 유도 트리거를 내발로 밟아버린 것이다.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내 선택이다. 아무도 나에게 남해로 가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연희와 함께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순전히 내가 원해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캄캄한 고래뱃속에 갇힌 꼴이 됐다. 참, 우습다. 허무한 일이 아닌가. 기껏 남태평양의 외딴 무인도도 아닌 남해 독일마을에서 파국을 맛본다는 것이.
지금 내 삶을 덮어버린 저 난공불락의 방벽은 내가 믿는 어쩌면 나의 분신은 아닐까. 나는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차단시키는 걸까. 과연 저 벽은 실존하는 걸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가 보고 듣고 만져본 것을 과연 실제라고 증명할 방법이 단 하나라도 존재하는 걸까. 내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막 시작되려고 한다. 나는 그 움직임을 간파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무엇도 감각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지극한 블랙이거나 섬광처럼 밝은 점 하나 둘 중에 하나다. 무엇도 보이지 않고 무엇도 확인할 수 없는 완벽한 블랙이 지배하는, 오직 침묵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나는 벽이라는 두려움을 더 두텁게 세워가고 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무엇이든 돌파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벽은 실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창조해낸 것들이다. 그러니 무너뜨리는 것도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그 사실만 선명하다. 나는 일어서서 주먹을 꽉 쥐고 벽 한 면을 지목했다. 그리고 잠시 죽음 너머의 세상을 가늠하고 솟아나는 의심들을 잠재워 버리고 저 두껍고 단단한, 미지의 벽 안쪽으로 뛰어들기로 했다. 공중으로 몸을 날려서 날렵하게 또한 묵직하게 전속력으로 벽으로 돌진했다. 의심은 거둬버리고 죽음을 몰락시키면서, 벽자체의 견고함보다는 반드시 돌파하고 말 거라는 일념 하나만으로 달려갔다. 벽에 강한 충격을 가하는 것, 오직 내 힘으로, 내 숭고한 정신력만으로.
벽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고 그 충격은 머리에서 시작되어 어깨로 팔로 가슴으로 허벅지에서 발가락까지 모든 신체 기관에 균일한 파동을 가했다. 온몸이 전율에 흔들렸고 충격을 흡수하지 못한 폐포들이 일제히 현기증을 냈다. 그렇게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이 조각조각 춤을 추다, 말다,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목격했다. 하나의 순간이 영원히 정지되면, 그 장면이 하나씩 내 머릿속에서 인화됐다. 그러다 기묘하게도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통증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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