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 바깥쪽

연작소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침대 위에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3일 동안 매일 아침, 연희의 펜션에서 일어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선명하지 않은 어느 과거의 시점으로 되돌아갔다 여기에 다시 왔다. 희미하게 기억하기로 분명 나는 무모하게 벽으로 돌진했다. 벽을 돌파하기 위해서, 나든 벽이든 둘 중의 하나는 파괴될 수밖에 없는 숙명에 맞서서, 안벽과 바깥벽 사이, 어떤 숨 막히는 진공을 가르며 나는 내가 속한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추월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다시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눈을 떠보니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여기 남해도, 이 방의 구조도, 외관도 모든 물건도, 그리고 이 펜션의 형태적 특징도 심지어 테라스 바깥 풍경도 어제와 같다. 심지어는 날씨까지... 분명 어제 모든 벽을 가로막았던 철제로 만든 셔터조차 말끔하게 치워졌다. 모든 게 거품 같고 거짓말 같다.


누가 작동시킨 건지, 라디오에선 알람처럼 쇼팽의 녹턴이 막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누가 틀어 놓은 걸까. 나는 라디오를 작동시킨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환청이라도 들은 건 아닐까.


“정신이 들어요?” 그것은 진심이 결여된 소리였다. 일정한 체계를 가진 인간의 육성에 다소 인공적인 색채를 가미한, 그러니까 전파를 타고 우연히 날아온 라디오 디제이의 변조된 목소리와 거의 유사했다. 그 소리는 인간의 것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기도 했다. 가만히 그 소리의 주파수적 특성을 분석해보니 분명 연희의 목소리와 유사점이 많았다. 왜 연희는 몸은 감추고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것인지, 어째서 왜? 어제는 모든 내부 벽을 차단해버린 건지, 그 경험이 사실인지 사실 너머의 일인지, 모든 느낌이 사소한 착각에 불과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었다.


내 몸을 조심조심 더듬어 봤다. 이렇다 할 상처 따위도 충격파가 흡수된 흔적도 없다. 의심할 여지없이 내 몸은 무탈하다. 마치 내 몸이 복원 장치에 도움을 받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전과 이후는 외관상 아무리 똑같게 생겨도 어딘가는 탄력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방금의 연희 목소리도 환청일지도 모른다. 나는 손을 뻗어 공중에 머문 내 팔과 손 모양을 확인했다. 분명히 나는 어떤 실체로 실존하고 있었다.


“담대하게 나아가라, 의심하지 말고 추락에 대비하라” 또다시 들려온 음성은 이런 형태였다. 추락에 대비하라, 추락이라니 어디로 추락한단 말일까. 나는 엘리스적인 의심을 거두고 허공을 흔들던 팔을 모아, 현관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오른쪽으로 돌렸다.


스르륵, 문이 자백이라도 하듯이 움찔하며 열려버렸다. 거짓말처럼 자신이 언제 침묵했었냐고 오히려 나에게 되묻는 듯했다. 그리고 자포자기하며 자신의 죄를 낱낱이 실토하는 죄수처럼 바깥 세계의 출입을 허락했다. 세상이 밝은 햇살로 나를 맞이했다. 이 집 안쪽도 바깥쪽도 모두 그대로였다. 아무런 하자도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고 문 바깥쪽에는 연희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서 있었다. 며칠 전 음식물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자세와 거의 흡사하게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정면으로 물끄러미 응시하는 중이었다.


“어제는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려버린 거예요?”내가 캐묻자, 연희는 “무슨 소리예요? 문을 잠그는 건 뭐고 셔터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혹시 끔찍한 악몽이라도 꾼 거 아니에요?” 연희가 물었다. 끔찍한 악몽이라, 패닉룸 같은 곳에 갇힌다는 설정 자체가 끔찍한 악몽에 해당되는 걸까. 그런 악몽은 다시 꾸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눈만 감아도 그 광경이 현실처럼 수면 위로 상승한다. 나는 그것을 물리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제가 꿈을 꾼 거라고요? 그럼 연희 씨가 일부러 문을 잠갔다는 것도 아니고 셔터를 내린 것도 아니라는 거네요?” “민석씨 여기 봐요. 여긴 바깥에서 문을 잠글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봐요. 열쇠 같은 것도 자물쇠 따위도 없잖아요. 도어록은 바깥쪽에서 잠글 수 있지만 안쪽에서는 문고리를 돌리기만 하면 열린다고요. 민석씨 그것도 이해 못 해요? 그러니 뭐하러 바깥에서 문을 잠그겠어요. 게다가 민석씨를 여기에 가둬서 제가 얻는 게 뭐가 있겠어요? 민석씨 돈 많아요? 누가 인질로 잡기라도 한대요? 그런 상상을 한다는 거 자체가 한마디로 얼간이 같은 짓이라고요. 여긴 외부에 완벽하게 개방되어 있다고요. 이렇게 맘만 먹으면 민석씨가 샤워를 하고 있다고 해도 확 열어젖힐 수 있다고요.”


내 두 눈으로 분명히 그 사실을 확인했다. 구조적으로 볼 때, 안쪽과 바깥쪽은 문이라는 중간 매개체라는 단어적인 의미만 개입되어 있을 뿐, 그것을 물리적으로 차단할 방법은 그저 문을 닫는 행위뿐이다. 그렇다면 어제 일어난 사건은 무엇일까. 내가 정말 꿈이라도 꾼 걸까. 나는 그 가상의 시공간을 현실이라고 믿어버린 걸까. 그렇다면 지금은 현실이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연희씨 내 볼을 꽉 꼬집어줄래요?” “알았어요. 자, 얼굴 대봐요” 연희는 내 볼을 꼬집어 비틀어버렸다. 지독한 통증을 수반한 열기가 볼 한가운데에서부터 주변으로 순식간에 확산되어갔다. 참을 수 없는 지옥의 고통이었다.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은 현실이다. 적어도 환영이든 거짓이든 두 가지 경우의 수는 벗어난다.


하지만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내가 꾼 저주스러운 이야기, 즉 환영인지 사실인지 모를 그 이야기를 발설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조용하게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연희는 물론 셔터다, 벽에 충돌한 이야기다, 뭐다 무모한 이야기들에 대해 꽤 궁금해하긴 했지만, 그냥 그건 꿈에 불과할 뿐이라고 더 이상 이야기를 전개하진 않았다. 내가 입을 다문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연희도 더 이상 자세하게 묻지는 않았다.


다만, 물끄러미 내 눈을 쳐다보긴 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듯 의심하는 눈초리로 말이다. 하지만 속으로 나는 당분간 연희와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마치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 수준으로 관계를 격하시켜야겠다는 결정을 했다. 딱히 지금도 가까운 사이도 아니지만…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제17화 : 방황 2 제18화 : 떠남 1

제19화 : 떠남 2 제20화 : 만남 1

재21화 : 만남 2 제22화 : 만남 3

제23화 : 전환 1 제24화 : 전환 2

제25화 : 숙박 1 제26화 : 숙박 2

제27화 : 숙박 3 제28화 : 방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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